중국 삼황오제 요임금은 단군왕검에게 항복했다 (4부)

순임금은 동이족으로 단군왕검이 고대 중국에 파견한 총독
성훈 컬럼니스트 | 입력 : 2011/07/26 [16:09]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원문에 “단군왕검 정사 50년(b.c 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단제께서는 풍백(風伯)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무오 51년(b.c 2283) 임금께서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그것이다.
갑술 67년(b.c 2267) 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순)과 만나게 하였다.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가 속했으며,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를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순임금)에게 그 일을 감독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설) 위 홍수에 대한 기록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하찮은 기록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기록이다. 왜냐하면 위 홍수에 대한 기록은 단군조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대중국의 4번째 삼황오제인 요임금의 나라에서도 동시에 큰 홍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은 이 홍수를 슬기롭게 평정하였으나 요임금은 홍수를 다스리지 못해 민심이 흉흉해져 곧 나라를 단군왕검에게 잃게 된다. 

요임금의 도읍지를 평양(平陽)이라고 하는데 현재 산서성 중부에 있는 임분시로 그곳에는 요임금의 무덤(堯陵)이 있다. 따라서 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의 아사달은 평양(平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단 말과 같은 것이다. 우수주(牛首州)는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하남성 통허현’으로 나오는데 황하변 하남성 개봉(開封) 근처인 것으로 보아 그곳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으로 보인다.
“牛首 : 春秋郑邑,在今河南通许县西北,《左传》桓公十四年,宋人以诸候伐郑,取牛首,《杜注》郑邑,《九域志》咸平县有牛首城。(함평현=통허현)” 
 
▲ 산서성은 대대로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
▲ 산서성 남부 임분은 요임금 도읍인 평양(平陽), 운성은 순임금이 돌아가신 명조(鳴條), 우수(牛首)는 하남성 개봉 바로 아래

 
b.c 2283년 마리산(摩璃山)에 참성단(塹城壇)을 쌓았다는 기록의 마리산은 지금의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참성단(塹星壇)과는 다른 곳이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은 우리 민족이 중국대륙에서 쫓겨 들어온 고려 후기나 조선왕조 때 새로 조성한 천제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왕검 때의 마리산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아마 단군조선의 도읍지인 산서성 태원 북쪽에 있는 산서천지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본다.
(아래 “우리 민족의 백두산과 천지는 원래 어디일까?”참조)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60&section=sc6&section2=  


하화족의 왕통이 동이족 순임금에게 넘어간 이유 

하화족(夏華族)의 왕통이 황제헌원의 계보로 이어지다가 왜 4번째 삼황오제인 요임금 다음에 느닷없이 동이족인 순임금이 즉위하게 되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의 기록에 있다. 황제헌원에서 이어진 고대 중국의 왕통이 이때부터 끊기고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나 다름없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로 이어지는 동이족의 나라가 세워진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원문) 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天王=단군)은 마침내 우순(虞舜=순임금)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唐)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 형제가 다시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함을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山)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우(禹:하나라 시조)를 파견하여 조선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에 우를 낭야성(琅耶城)에 두어서 이로써 구리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했다.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단군)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辰韓)에 조근(朝覲=알현)하기를 네번씩 하였다.” (인용 끝)

단군왕검이 우순(=순임금)에게 요임금을 치라고 명한 것은 순임금이 단군왕검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요.순을 태평성세를 이룩한 성인(聖人)이라고 하며 자기네 조상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넣었으며, 요임금이 순임금의 인간됨을 보고 스스로 왕위를 넘겨주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단군조선에게 굴복하여 어쩔 수 없어 왕위를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잃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요임금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단주가 거만하고 포악하고 항상 게으르고 놀기만 좋아해 요임금은 단주를 남방으로 추방하여 제후로 삼았는데, 순임금에게 왕위가 넘어간다하자 단주가 반란을 일으켜 부자간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요임금이 두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다. 부자간에 전쟁을 했다는 것은 정권쟁취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맏아들이 방탕하면 다른 9명의 아들 중 똑똑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도 있었으나 혈통이 전혀 다른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왕위가 넘어갔다는 것은 뭔가 외부의 압력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자의가 아니라 단군왕검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요임금은 순임금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양위했다고 하는데, 박제상의 <부도지>에서는 요임금이 두 딸로 미인계를 써 순임금을 유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태백일사>의 위 내용은 요순의 치세가 기록되어 있는 상서순전(尙書舜典)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순임금이 이해 이월에 동쪽을 순행하여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고 동쪽의 후를 알현하고 철과 달을 맞추고 날짜를 바로 잡았으며 악률과 도량형을 일치시키고, 오례와 오옥 세 가지 비단, 두 가지 산 짐승, 한 가지 죽은 짐승 및 예물을 정리하였다. 다섯 가지 옥기는 예가 끝난 후 돌려 드렸다. (歲二月東巡守至于 垈宗柴望秩于山川 肆覲東后 協時月正日 同律度量衡 脩五禮五玉三帛二生一死贄 如五器卒乃復)”라는 구절이 있는데, 중국은 동후(東后)를 동쪽에 있는 제후로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으로 사근동후의 근(覲)자는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찾아뵙는 뜻이므로 당시 동후는 동쪽의 상제(上帝)인 단제(檀帝) 즉 단군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원문의 낭야성(琅耶城)은 아래 <수경주>에 기록되어 있듯이 하남성과 산동성과의 경계에 있던 발해(渤海=대야택) 부근의 하남성에서 찾아야 하는데 현재 중국에서는 이를 산동성 청도로 지명을 옮겨 놓았다.
(琅邪台:《水经注》琅邪台在渤海之间琅邪之东,《注》按秦始皇二十八年,作琅邪台,立石刻,颂秦德   번역: 낭야대는 발해와의 사이에 있는 낭야의 동쪽에 있다. 진시황28년 낭야대를 만들고 석각을 세우고 공덕을 칭송했다.) 

▲ 발해는 고대중국의 동해로 하남성과 산동성 경계에 있던큰  내륙호수    

 
산서성과 하남성은 단군조선의 영토 

순임금이 동이족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맹자의 어록에서 찾을 수 있다. 맹자는 <이루장구 하(離婁章句下)>에서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고 하였다. 

순임금이 죽은 명조를 <중국지명대사전>에서 순임금의 무덤이 있는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에 있는 염지(鹽池) 일대로 맹자가 말하길 “이 땅이 동이족의 땅”이라 했으니 바로 여기까지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것이다.
“명조 : 고대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안읍진 북에 있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정벌한 전투지이다. 고후원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산서성 운성시 하현의 서쪽, 일설에는 하남성 낙양부근, 또 일설에는 하남성 신향시 봉구 동쪽에 있다고 한다. (鳴條:“古地名。在今山西运城安邑镇北,相传商汤伐夏桀战于此地。又名 高侯原 。●古地名,又名高侯原,其地具体位置,异说甚多,一说在今山西省运城市夏县之西,一说在今河南洛阳附近,还有一说在河南省新乡市封丘东。)” 

여기서의 유주란 <한서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듯이 요동군, 요서군, 낙랑군, 현토군, 상곡군, 북평군, 어양군이 포함되어 있는 행정구역이다. 즉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영주는 유주와 거의 같은 지역으로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는 요택과 발해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영주의 요택 일대는 나중에 거란족의 발원지가 된다.  

<대명일통지>의 설명에 따르면, “순임금이 기주의 동북을 나누어 유주와 금주로 했다. 상나라의 고죽국이며 주나라의 유주 땅이다. 진나라 때는 요동군이 땅이었으며 또 이 유주는 요서군이 되었다. 한나라 때는 무려와 망평현의 땅이었으며 요동군에 속했다. 당나라에서는 유성현을 설치했으며 영주에 속했다. (大明一統志 : 舜分冀東北爲幽州錦州 其所統也 商爲孤竹國 周幽州地 屬燕 秦爲遼東郡地 又以幽州爲遼西郡 漢爲無慮望平縣地 屬遼東郡 唐置柳城縣屬營州)”라는 기록이 있어 유주와 영주는 거의 같은 곳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유주는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로 대대로 우리민족의 영토였다                           


회대 지방의 제후를 평정하고 분조(分朝)를 두고 다스렸다는 말은 그야말로 분국(分國)을 두어 순임금으로 하여금 지휘감독하게 했다는 뜻으로, 회대(淮岱)는 말 그대로 산서성 남부인 대(岱)와 하남성 남부인 회(淮)를 말하는 것이다. 즉 요임금의 강역이었던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까지 단군조선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회주(淮州)는 회안군으로 하남성 심양현이며, 회주군(淮州郡)은 하남성 정양현으로 둘 다 가까운 곳으로 모두 하남성 남부에 있는 지역이다.
(淮安郡 : 后魏东荆州,西魏更名淮州 (서위 때 회주로 이름을 바꾼다) ,隋改显州,又改淮安郡,唐复曰显州,又曰康州,后复曰淮安郡,又改唐州,今河南泌阳县治。- 하남심양현)
(淮州郡 : 南朝梁置,北齐废,故治在今河南正阳县东南 -하남정양현 동남) 

대(岱)는 대종(岱宗) 즉 태산을 말하는 것으로 산동성에 있는 태산이 아니라 산서성 임분시 동쪽에 있는 태악 즉 곽태산(霍太山)을 말하는 것이다. <주례직방>에 ‘其山镇曰’이라는 같은 문구가 있어 泰山 = 太岳으로 볼 수 있다.
泰山: 是为东,亦曰岱宗《书舜典》东巡狩至于岱宗 《周礼职方》河东曰充州,其山镇曰岱山
太岳: 即今山西之霍山(산서 곽산)《正义》地理志,河东彘县东有霍太山,周礼职方氏,冀州,其山镇曰霍山,即此太岳是也,《蒋廷锡尚书地理今释》太岳,一名霍太山,今为中镇,在山西平阳府霍州东三十里,山周二百余里,南接岳阳赵城二县,北接灵石县,东接沁源县界,(<장정석 상서지리지 주해> 태악 일명 곽태산 산서 평양부(임분) 곽주 동쪽 30리, 산 둘레는 이백여리, 남으로 악양현과 월성현과 접하고, 북으로 영석현, 동으로 심원현 경계와 접한다)
 
▲ 회(淮) 지역은 하남성 남부 주마점시 일대, 대(岱=태산)는 산서성 임분 동북쪽에 있는 산

이렇듯 황제헌원부터 이어진 하화족의 나라는 이미 단군왕검 때 요임금이 패망함으로써 없어졌다가 서이(西夷)족의 나라인 주(周)나라가 망하고 사분오열된 춘추.전국시대가 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보잘 것 없던 고대중국의 역사가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이유는 명나라 때 조선이 속국이 되면서 역사가 왜곡되면서 대륙을 지배했던 웅장한 역사를 스스로 지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제식민사학의 폐해로 단군조선의 영토를 한반도와 만주 일대로만 알고 있었으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인 단군조선의 강역은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 거의 대부분과 중앙아시아를 지나 터어키(돌궐)까지였으며, 도읍이 있던 핵심강역은 바로 산서성 중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 단군조선은 산서성을 도읍으로 하여 한반도, 만주, 몽고, 중국대륙, 중앙아시아를 거쳐 터어키까지 지배했던 아시아대연방제국이었다.  일제가 단군을 신화로 만든 이유는 조선이 워낙 장엄한 역사를 가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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