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사회, 과연 망가졌나?

김지호 | 입력 : 2011/09/12 [11:21]
영국에서는 ‘망가진 사회’라는 이슈를 두고 논쟁이 한참이다. 카메론 수상은 지난 달에 발생한 폭동을 도덕의 붕괴로 사회가 망가졌기 때문에 발생한 범죄로 규정하고, 강경한 대응책들을 주문했다. 이에 대해, 노동당과 진보언론들은 청년실업과 부의 양극화에 따른 불만누적을 간과한 억압적인 미봉책이라고 비판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 폭동으로 불탄 건물 - 런던의 크로이돈 거리    ⓒ 런던타임즈 LONDONTIMES

 
‘전통가치 복원을 통한 병든 사회 치유’는 지난해 총선 때 보수당이 내세웠던 슬로건이었다. 카메론 총리는 “폭동은 역겨운 범죄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병들고 망가진 사회 치유’를 최우선과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보수당은 2015년으로 예정된 총선에서도 이 이슈를 활용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논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노동당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받지 못하는 것은 특별한 이슈 없이 약탈과 무분별한 파괴로 진행된 폭동의 명확한 원인을 현재로선 밝히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 병이 들었나?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예의가 바르고 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명예를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매너가 이들이 자랑스럽게 지켜온 전통적인 신사도다. 그러나 지난 폭동은 충격적인 야만의 모습이었기에 수많은 영국인들의 자존심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후, ‘오늘날의 영국사회에 깊은 병이 든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을 두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는 점은 대체로 인정하면서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하는 주장들이 격돌하는 실정이다. 보수진영은 전반적인 도덕과 준법정신의 해이가, 진보진영은 실업과 양극화에 따른 불만 누적이 폭동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양측이 모두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론도 힘을 얻고 있다. 노동당 출신의 토니 블레어 전 수상은 “멍청한 분석은 잘못된 처방을 만든다”면서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옵저버’에의 기고문을 통해 “영국은 도덕적으로 병들지 않았다. 망가진 사회에 대한 논쟁이 망가뜨리는 것은 영국의 대외적인 평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폭동이 선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절한 행동양식을 익히지 못하고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소외된 젊은이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체가 아닌 일부 계층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며 대다수 영국인들의 도덕관념은 건전하다는 것이다.

사회 구조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좌절세대 

그렇다면 사회구조의 문제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지난 30년간 산업구조와 복지제도의 변화를 살펴 봄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영국은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절대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한때는 ‘무덤에서 요람까지’로 대변되던 사회복지 제도를 구축해 왔다. 하지만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인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폐단이 발생했다. 80년대 보수당의 대처정부는 이를 ‘망국적인 영국병’이라고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복지를 축소하면서 산업의 구조조정과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밀어 붙였다. 이후 영국의 경쟁력은 타 유럽국가에 비해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지역과 계층별 소득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특히 경쟁력을 상실한 제조업이 축소 조정되고 금융과 서비스 중심으로 경제구조가 개편되면서, 엘리트 그룹은 많은 혜택을 누렸지만 단순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사라져 갔다. 따라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자들은 보잘것없는 실업수당에 의지하는 희망을 상실한 낙오자들이 되었다. 소위 좌절세대가 된 것이다. 근래의 금융위기로 야기된 세계적 경기침체와 재정적자로 인한 긴축정책은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했고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전체 실업률이 7.7%에 달하고 특히 청년실업률이 20%를 넘으면서 좌절세대의 불만은 이미 임계수위에 도달했다. 이전에는 훌리거니즘으로 그 불만이 표출되었으나 이제는 약탈 폭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토트넘, 맨체스터, 리버풀 등 유명 프리미어 축구팀이 있는 지역들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을 보면 그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해법은?

대처 이후 노동당 정부에서 이러한 소외계층을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자했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복지의 강화로써 뒤틀린 산업구조의 문제를 커버한다는 것은 이상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호경기에는 그래도 그런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작동하는 듯 했지만, 현재와 같은 불경기에는 아예 고장이 나 버린 것이다. 카메론 수상은 사회적 책임감을 고취하기 위해 시민봉사 프로그램을 확대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법질서회복을 위해 범법자들에게 복지혜택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런 강경조치들로 단기간에는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폭동의 불씨가 여전히 잠복된 상황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회의적이다. 지금은 오히려 시장만능주의를 채택했던 대처리즘의 후유증을 치유해야 할 시기라고 보인다. 소외된 계층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사회통합에 노력을 기울여야만 뇌관을 제거하고 안전핀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토리즘으로 불리는 영국의 전통 보수는 극우가 아니다. 통합된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며 양보할 줄 아는 보수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18세기 이웃 프랑스로부터 혁명의 열풍이 불어 올 때도 양보와 타협정신으로 파국을 막았던 역사가 있다. 강력했던 노조의 영향력을 떨쳐내고 실용주의를 견지해 온 노동당도 극좌가 아니기에, 사회통합에 대한 공감대는 의외로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단지 이 과정으로 백가쟁명의 논쟁이 한동안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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