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충원 장충단을 놀이공원으로 바꾼 일제 (2부)

장충단의 훼손은 조선인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일환
역사복원신문 | 입력 : 2011/07/14 [16:52]
국립현충원인 장충단의 건립
 
▲ 황성신문 1900년 11월 12일자에 장충단이 건립되었고 갑오 이후 죽은 전망자와 대소 각 부원, 무관, 학도를 위해 제사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1900년 5월 고종 황제의 지시로 동년 11월 10일 남산 남소영(南小營) 터에 장충단(奬忠壇)이 완공되기에 이른다. 장충단은 1894년 갑오전쟁(동학농민혁명)과 1895년 을미참변(명성황후시해사건) 당시 왕실 수호를 위해 희생당한 군인들의 충절을 기려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제사시설이었다. 

현재 장충단의 원형을 보여주는 사진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종실록>·<순종실록>·관보·황성신문·만세보와 1901년 8월 발간된 <장충단영건하기책(奬忠壇營建下記冊)> 등의 자료에 따르면 장충단은 제단을 비롯해 꽤 많은 시설과 부속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 건물인 장충단 제단은 현 신라호텔 자리에 건설되고, 부속건물들은 현 장충단공원 내에 자리 잡았다. 장충단에는 3층 기단 위 15칸으로 된 제단과, 장충단비, 그리고 1칸짜리 비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부속 건물로 6칸 전사청(典祀廳), 17칸 반의 양위헌(揚威軒), 10칸의 장무당(壯武堂), 30칸의 요리정(料理亭), 고직처(庫直處), 3칸의 고사(庫舍), 1칸의 측간(厠間)이 있었다. 기타 소나무 가지로 만들어진 홍여문(虹如門), 다리 2개(대량판교와 중판교), 가산(假山) 등도 있었다. 

이들 건축물들은 국가의 제사를 지내는 건축물이므로 화려한 단청을 하지 않았다. 또한 단사나 전사청 등은 3개 층의 석조 기단을 쌓는 등 권위 있는 형태를 취하였고, 국가기념물인 만큼 대한제국기(大韓帝國旗)를 4면에 꽂도록 기주(旗柱)를 설치하여 명실상부한 국립 현충원의 위용을 갖추었다.  

이렇게 세워진 장충단에서는 1901년 봄부터 제사가 치러졌다. 1901년 4월 22일 황성신문에는 장충단에서 초혼제가 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장충단은 이처럼 국가적으로 신성시한 제사 공간이었으나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면 점차 일본 군인들과 관공서의 운동회나 유람장소로 변화하게 된다.

야유회 개최 및 이등박문의 동상 건립계획 
 
▲ 일본군 사단장이 이또오를 초청해 장충단에서 야유회를 했다는 1908년 5월 8일자와 9일자 황성신문  기사     © 역사복원신문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실질적인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자 장충단은 일제에 의하여 공원화되기 시작했다. 1908년 5월 8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오카사키(岡崎) 일본군 사단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초청하여 원유회를 했는데 여기에 일본인 관료와 한국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 한성부윤 박의병(朴義秉)이 내왕했음을 보도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이 국립묘역을 건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대한제국 군인들로 하여금 국가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에 대한 훼손행위를 감행한 것으로, 후에 대한제국의 국가묘역을 유원지공원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판단된다. 

일제는 1908년부터 장충단에 올리는 제사를 금지하도록 압력을 가하였고, 안중근장군의 이또오 척살 전 이미 ‘이등박문 동상설’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1908년 12월 30일자 『공립신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일본통감 이등박문의 공덕을 기념하는 동상을 만들어 세우자고 김윤식 등 22명의 원로가 주장하야 신구정부 대신과 협상한 바가 있는데 근일에 김윤식이가 일동을 대표하야 이등의 허락을 청할 계획이고 장차 동상 건조비로 연조금을 모집하는 발기가 있을 터이라더라. (중략) 이등이가 원치 않을 이유는 여차하거니와 다만 이등의 공덕 기념으로 동상을 건조한다는 소문만 한 번 세계에 드러내어 한국의 민심이 여차하다 자탁할 간계는 있을지라. 그런 고로 이등의 동상은 의논만 있고 마는 것보다 차라리 세워 놓은 뒤에 전국 인심의 반감정이 어떠한 것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는지 한인의 몽매한 것이 더구나 한심하도다.”
 
▲국립현충원 장충단에 세워질뻔한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 일본 초대총리를 지낸 이토의 동상은 국회의사당 등 여러 곳에 있다.

『매천야록』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의 무뢰배들은 이등박문이 공덕이 있으므로 그의 동상을 만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고, 혹은 이 말을 김윤식이 유포하였다고 하였다.” 또『대한매일신보』도 “이학재씨가 이등공의 송덕비를 세우자고 발기함은 여러번 게재하였거니와 겸하여 동상을 제조할 차로 경비 삼만원을 예산하고 일전에 궁중고문 이윤용씨를 찾아가서 협의하였다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일제의 ‘통감부 비밀문서’는 「기헌 제2164호 이또오공 송덕비 건립의 건」이라는 제목으로 비밀리에 조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고 이등공(故伊藤公) 생전의 덕을 칭송한다 하여 대한상무조합 부장 이학재는 동상건의소를 설치한 것을 위시 중부 전동에 사는 전 군수 민영우 외 십여 명은 동아찬영회, 서대문 밖 경교동에 사는 전 군수 정교와 서부 사직동에 사는 전 전기회사 사무원 한백원 외 수명의 무리도 역시 기부금을 모집하여 송덕비 혹은 사당 등을 건립하고자 분주하다는데 그 내막을 탐사하니 발기자 등은 모두 그날의 호구조차 궁하고 평소 협잡배로서 성실히 공의 덕을 칭송하자는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이를 구실로 기부금을 모집하여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야심인 것 같다.” 

이등박문 사망 추도식이 열리는 장충단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의 초대 통감을 지내다 1909년 안중근장군에게 척살당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장례식 추도회가 장충단에서 열렸다. 이는 일제가 한국인에 의한 이토의 사망을 한국인에게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인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실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은 당시 실록의 원문이다. “태자의 태사 문충공 이토오공작의 국장일에 황족, 궁내관, 각 부의 관리 및 인민들이 함께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太子太師 文忠公 伊藤公爵 國葬日, 皇族、宮內官、吏閣部官吏及人民一同, 設行追悼會于 奬忠壇)” (순종실록 1909년 11월 4일) 

또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은 한일합방으로 달려가던 정국에 충격파를 던졌다. 친일파들은 공포에 휩싸여 더욱 적극적으로 합방을 추진하게 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척살에 매국친일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통감부문서>의 헌병대 기밀문서는 “이완용이 이토공(公) 피해 이후에 눈에 띄게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안중근이 일제 검찰의 신문에서 “이완용은 망국적 큰 괴수로서 이토에게 자신의 직무를 팔아넘겼다”라고 비판한 것처럼 다음 표적은 이완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마냥 위축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내각 차원에서 이토오를 위해 성대한 추도식과 장례식을 준비했다. 헌병대 기밀문서에 따르면 11월 4일 오후 2시부터 3시 45분까지 “서울 장충단에서 이토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전·현 내각대신과 황족 원로, 궁내부를 비롯해 각 부의 고등관과 군 장성, 엄비가 보낸 사신이 참석했다. 그 성대함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회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관·공립을 불문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참석시켜 추도회장(장충단)을 채웠던 조작된 성황에 불과했다. 그뿐만 아니라 친위부의 보병 2개 중대를 참석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치러졌다. 순종은 애도사에서 메이지천황에게 吾國의 兇手에게 死, 즉 우리나라 악당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을 쓰며 이토의 훙서(薨逝)에 애통해 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또한 친일파들은 장충단에서의 이또오 추도식 직전 고종황제로 하여금 통감관저에 마련된 빈소에서 직접 조문을 계획했다. 통감부문서 1909년 11월 1일의 태황제가 통감관저에 행림하신 내부사정이란 문서가 그 전말을 전해준다. 고종황제는 직접조문 의견이 나왔을 때 “내가 직접 통감관저로 가서 조문한다면 국민들이 어떤 감정을 갖겠느냐. 칙사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승녕부 총관 조민희와 농상부장관 조중응이 작당한 후 조민희가 “직접 조문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자 11월 2일 결국 허락하고 만다. 다만 고종은 엄비(嚴妃)가 추도식에 직접 가는 것은 적당치 않다면서 상궁과 황태자 유모 2명을 보내는 것으로 조정했다. 결국 고종황제는 11월 2일 통감관저로 가서 자신의 외교권과 왕위를 빼앗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해야만 했다.

▲ 장충단에서는 이토오의 애도식이 열렸다. 일본 동경에서 거행된 이토오 히로부미의 장례식 행렬    

 
놀이공원으로 바뀌는 국립현충원 장충단 

▲ [경성시가도, 1927]에 나타난 전차선로. 1926년 4월에 완공한 [장충단선]의 선로는 동대문에서부터 지선으로 출발하여 황금정6가(을지로6가)를 거쳐 장충단공원 입구에 이르고 있다.
장충단은 국권을 상실한 후 제사가 중지되고 운동회 등이 개최되는 장소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원래의 형태는 유지되었으나, 이후 아예 장충단에 있던 비석을 뽑아내 숲속에 버렸으며 사전(祀典)과 부속건물을 폐쇄하였다. 1919년 경성부에 의해 동대문 부근의 훈련원 터와 함께 장충단이 공원조성 대상지로 선정되고, 벚나무 수천그루를 심고 광장, 연못, 어린이놀이터, 다리를 시설하여 1921년 공원으로 개장한 후, 1926년 4월 전차선로를 장충단공원 입구까지 연장하여 ‘장충단선’으로 개통하였다. 

더욱이 상해사변 때 결사대로 죽은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웠으며, 조선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영혼을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도 들여앉혔다. 1929년부터 1931년 사이, 공원 동쪽 4만평의 숲을 파헤쳐 일본식 절을 지었는데 심지어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선원전을 파괴해 옮겨 본전과 서원을 짓고 또 경희궁의 흥화문을 뜯어와 입구에 대문을 세우는 등 실로 만행을 저질렀다. 

▲ 1925년 6월 30일 동아일보기사,  장충포열의 거룩한 제단이 지금은 환락장으로 바뀐 것을 개탄하는 기사  

박문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3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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