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체벌(體罰), 그리고 무덕(武德)

전자발찌로도 성범죄 재범을 막지 못 하는 이유
신성대 논설위원 | 입력 : 2011/11/20 [13:49]
▲ 신성대 논설위원     ©한국무예신문
난데없는 선거바람에 ‘도가니’의 불길은 사그라져 버리고 ‘도가니법’이 국회의 일거리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범죄를 줄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글쎄 그 효과 역시 잠시일 뿐, 성범죄는 늘었으면 늘었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fact)을 ‘있는 그대로’의 사건으로 보지 못하고, 영화라는 픽션으로 가공되어서야 분노하는 시민들의 무딘 감성도 차제에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실 자체에 대해 덜 이야기하고 사실의 표상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것이 영상매체들의 속성이다. 그리고 현실과 가상을 뒤섞음으로써 혼돈을 초래하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란 기본적으로 흑백론이란 프레임을 가지고 짜깁기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사건의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서 모든 사건을 이번처럼 픽션화된 편견으로 분노하고 단죄하는 것은 궤도이탈의 우려가 크고, 자칫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또 다른 부작용을 불러오게 마련이니 하는 말이다.
 
아무튼 도가니의 실제모델이었던 인화학교가 폐쇄절차를 밟고 있어, 학생들이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야하게 생겼다. 결국 그만한 시설이 다른 어딘가에 들어서야 할 것이고, 그때까지 학생들의 상당수는 일반학교에 다녀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분개했던 그 마음 그대로 그들을 거부하지 말고 우리들 자녀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심을 잃지 말았으면 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범죄의 중독성
인간의 몸 중 손가락, 혀, 성기에 의한 경험은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우리 뇌에 강하게 기억되고 그로 인해 각종 신경전달물질을 분비시켜 신체 전반은 물론 인간의 사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화투, 마작, 도박, 낚시, 장기, 바둑, 골프, 손가락을 이용한 악기연주, 각종 구기 종목 스포츠, 호신권법류 무예, 기타 수공예적 놀이나 작업 등은 손가락 짜릿한 전율과 쾌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강한 중독성이 생긴다.
 
직업 중에서도 손가락으로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여간해서 다른 업종으로 못 바꾸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해서 평생 장인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컴퓨터 자판이나 마우스 클릭 역시 손가락으로 하기 때문에 중독성이 강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게임은 비록 간접체험이긴 하나 손가락 끝에서 살인, 폭력, 파괴라는 극도의 스릴과 흥분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한번 빠지면 여간해서 벗어나기 힘들다. 덕분에 게임산업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만약 키보드나 마우스의 손가락 닿는 부분에 점자식 요철을 넣으면 더욱 중독성이 강해져 다른 밋밋한 자판기는 싱거워 사용 못하게 될 것이다.
 
또 지금은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걸 모르고 피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끊기 힘든 것은 니코틴의 중독성이 주된 원인이지만, 담배를 손가락 끝에 끼워서 피게 만든 때문이기도 하다. 담배를 못 피게 되면 혀가 답답해지는 동시에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혀와 손가락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라이터를 켤 때 ‘찰칵’하는 쾌감도 무시하기 힘들다. 이는 손가락 빠는 젖먹이 아이에게서 손가락을 못 빨게 하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이다. 허전함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체에 대한 대표적인 직접범죄가 강간, 살인, 폭행이다. 이를 통해 가해자는 가학적 쾌감과 스릴, 전율을 동시에 얻기 때문에 강한 중독성이 생겨 반복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교정이 무척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다. 해서 성범죄에 대한 형벌을 어지간히 높인다 해도 줄어들지 않는다. 특히 성범죄는 아무리 예방차원에서 윤리도덕을 가르친다 해도 상업화되어 범람하는 향락문화와 그로 인한 성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함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신체적 고통에 대한 기억이 없는 현대인
사람들은 꿀을 먹어보지도 않고 ‘꿀맛’이란 상투적 표현을 쓴다. 이처럼 폭력의 고통을 당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고통’이란 말을 입에 담는다. 그러다보니 고통과 고민을 혼동하게 되어 대수롭지 않게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죽음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고민만으로 자살도 하는 것이다. 자살 또한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육체적 고통의 기억을 갖지 못한 현대인들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상대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 실감 내지는 짐작조차 못한다. 남이 당할 고통을 자신의 사소한 고민쯤으로 가볍게 여기는 탓이다. 게다가 짜릿한 전율을 동반하는 폭력의 쾌감은 사람의 사고를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에 다른 여러 경우의 예방적 교육을 무시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해서 남을 상습적으로 때리거나 맞는 사람도 문제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혀 맞아보지도 남을 때려본 적도 없는 사람 또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전자는 웬만한 폭력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고통에 대한 면역력이나 자제력이 없기 때문에 사소한 손찌검에도 가공할 충격을 받는다. 더구나 자신이 남에게 가하는 폭력의 고통의 세기에 대해 짐작하지 못한다는 데에 더 심각성이 있다. 이들은 체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는가 하면 사람에 따라 폭력에 대한 피해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문명이 야만보다 우월하다는 건 문명인의 착각
죄를 지어 감옥에 간 사람들이 과연 모두 참회할까? 오히려 죄 값을 치렀으니 당당해하지는 않는지? 같은 범죄를 또 저지르는 사람에게 감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범죄인을 위해 세금으로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한다는 건 모순이 아닌가? 오늘날 부드러운 처벌은 말이 좋아 범죄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것이지, 기실 우리 모두 자신과 가족이 어쩌면 죄를 지어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위선은 아닌지?
 
현대적 격리처벌에는 신체적 고통이나 공포가 없다. 단지 재수 없어 걸렸다는 억울함과 약간의 후회만 있을 뿐이다. 해서 감옥에서 일정기간 참을 수밖에 없는 답답함만 감수하면 다시 자유다. 이런 나약하고 수동적인 최소한의 형벌로는 극단적인 범죄를 예방하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설사 죄의식을 가지고 반성한다 해도 한 번 경험한 전율적 쾌감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 해서 아무리 전자 팔찌 발찌 허리띠 채워도 못 막는 것이 성범죄 재발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쁜 버릇 고치는데 매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다만 인간은 말귀를 알아듣기 때문에 지금처럼 가두어두고 다시는 그 짓 하지 말라고 설득하고 반성시키며 그 기억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당히 고비용적이고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재발방지에 대한 경고효과가 그만큼 떨어지는 덜떨어진 교화수단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그 쾌감보다 더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그 위에 덧씌우는 것뿐이다.
 
때로는 문명이 야만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원래 고대에는 보통의 범죄인에 대해 징역형이라는 장기격리제도가 없었다. 포로나 노예, 그리고 짐승들만 가두었을 뿐이다. 죄수라 한들 수사 중에만 잠시 수감했던 것뿐이다. 판결이 끝나면 곧바로 태형이나 사형, 유배, 추방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지금같이 큰 감옥이 굳이 필요 없었다.
 
사람이 살인이나 강도짓을 저지를 때에는 만일의 경우를 예상치 않을 수는 없다. 여차해서 발각되어 잡힐 경우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을 말이다. 헌데 그 예상치가 그럭저럭 감내할 만한 정도라면 범죄 실행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은 불문가지. 처벌은 모범적이고 교화적이어야 하되 무엇보다 단호해야 한다. 사실상 한국에서도 사형제도가 없어졌다. 법에는 존재하지만 집행하지 않아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다. 단호함을 상실한 처벌은 모범적이지도 교화적이지도 않은 그저 만만한 규제의 철조망일 뿐이다.
 
그리고 현대의 징벌 수단은 피해자의 한을 근본적으로 풀어주지 못한다는 데에 치명적이다. 태형이나 사형은 피해자의 원한을 그나마 가장 근접하게 해소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왜 이 직접적인 징벌제도를 미개하다 하는가? 도덕이니, 인권이니 종교니 하는 위선적 감화로는 날로 복잡해지고 끔찍해지고 늘어나는 이러한 신체에 대한 직접범죄를 예방하고 교정하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지금은 회교권 국가에만 남아있지만 고대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살인에는 사형이 기본이었다. 전통적으로 도둑과 강도, 성범죄는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대개 태형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곧바로 풀어주는데도 다시는 그 짓 못한다. 왜냐하면 순간의 쾌감에 대한 대가치고는 고통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다. 잔인하다는 것 빼면 가장 합리적인 형벌 수단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화되고 범죄율이 낮은 싱가포르는 지금도 이 태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지금은 체벌을 못하게 하니 옛말이라고 밖에 할 수 없지만, 매는 일찍 맞을수록 좋다고 했다. 헌데 이 태형의 판결을 받게 되면 그 즉시 집행되지 않는다. 언제 집행관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가해자(죄인)는 그동안 끔찍한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데, 그 기다리는 고통 자체가 더없는 악몽이자 형벌이다. 집행 중 의사가 판단해서 정해진 매를 다 채우지 못할 경우, 남은 만큼은 나중에 다시 집행한다. 한 번 태형을 당해 본 사람은 그 끔찍한 고통의 기억 때문에 일평생 범죄는 꿈도 꾸는 것조차 싫어하게 된다.
 
얼마 전 중동의 어느 국가에서 자신의 청혼을 들어주지 않는 여성에게 염산을 뿌려 눈을 멀게 한 청년에게 회교율법에 따라 ‘눈에는 눈’이라는 벌을 받게 하였다. 헌데 그 집행일 날 청년의 눈에 염산을 떨어트리기 직전 피해 여성 측에서 용서를 한다는 바람에 청년은 형의 집행을 면케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청년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진실로 참회했다고 보고 용서한 것이다.
 
학교체벌 금지가 최선인가?
가정체벌이든 학교체벌이든, 또 형벌적 체벌이든 체벌금지는 문화인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폭력의 부재가 또 다른 폭력을 부르듯 체벌금지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것은 당연한 일. 오히려 인간 내면의 야만성을 촉발시켜 변태적 범죄를 더욱 부추기게 될 것이다. 그것도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기괴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유럽 선진국들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체벌이 금지되고 있다. 부모라 한들 자식들 뺨 한 대 때렸다간 고발당해 곤욕을 치르기 일쑤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폭력이 덜한 나라인가? 개개인이 문약해질 때 오히려 폭력이 더 난무하는 것이 인간사회다. 아무리 고상한 집안 출신이라 한들 일평생 폭력에 당하지도 가하지도 않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마 성인의 나라에 산다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폭력, 성폭력, 시위폭력, 국회폭력이 난무하는 한국사회가 유독 학교체벌과 폭력적 형벌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 문명, 문화, 철학, 사상의 발전 방향이 언제나 한 방향으로의 일직선일 수만은 없다. 극에 달하면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 사형이나 태형, 그리고 체벌이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이며 비교육적이라 하여 내다버리는 바람에 도덕심과 법률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시대의 도래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폭력과 무덕(武德)
적당한 체벌로 인한 신체적 고통에 대한 경험, 타인에 대한 배려심, 절제력을 동시에 교육시키지 않으면 이런 신체에 대한 범죄를 예방하기엔 불가능하다. 물론 덕(德) 없는 무(武)가 그렇듯 절제되지 않은 체벌, 감정이 가미된 체벌은 자칫 폭력이 된다. 그렇지만 법과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 정제된다면 이보다 효과적인 범죄예방법도 없을 것이다. 특히 호신무예 지도자들은 주먹의 이런 감각적 폭력성을 잘 이해하여 무덕(武德)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학교체육과 체벌은 육체적 고통과 폭력에 대한 간접체험이자 인내와 절제를 기르는 학습이다. 체육이 소외되고 체벌이 금지되면서 학교 폭력은 더 늘어나고 있다. 이 세대들이 사회에 나올 때 폭력에 의한 희생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체벌과 태형, 사형을 반문명적이라고 무턱대고 거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형량을 대폭 늘린다 해서 범죄가 당장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폭력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선험적 학습에 대해 한 번 더 숙고해볼 일이다.

원본 기사 보기: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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