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손가락 없어도 高峯은 절친한 친구

<휴먼 스토리> 김홍빈 산악인! "그는 오늘도 여전히 산사람"
런던타임즈 | 입력 : 2008/03/12 [18:46]
브레이크 뉴스 광주전라 편집국

 
전문 산악인들은 물론 이제 일반 세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김홍빈씨를 기자는 상호 잠시 짬을 내어 이런 저런 대화를 간략하게 나누었다. 김홍빈 산악인은 양손 열 가락을 모두 상실한 불굴의 산악인으로서 모두에게 인생역전 승리의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김홍빈씨는 3월 27일 世界의 高峯 14좌 중의 하나로서 네팔과 중국 국경에 인접하여 있는 ‘마칼루(makalu, 8,463) 등정 일환으로 출국하게 된다.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김홍빈 산악인의 ‘이것이 나의 인생’ 스토리 형식으로 엮어본다.<편집자주> 

 

▲ 고봉의 설산이 그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당신은 진정 불굴의 사나이!


2007년 5월 16일은 한국 산악사에 있어 대경사를 맞았다. 장애인으로서 세계 네 번째,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주인공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그 주인공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50m)에 등정한 2급 장애인 김홍빈(45·에코로바 홍보이사)씨! 그는 1991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봉(6194m) 단독 등정 과정에서 동상으로 손가락 10개 모두를 잃었다.

어찌 쇠뿔을 단숨에 뽑을 수 있을까? 김홍빈씨는 1989년과 2000년 두 차례 도전했다가 실패한 쓰라린 전력이 있었다. 제 아무리 칠전팔기라 하지만 이번에 오르지 못하면 사실상 에베레스트는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한 번 원정하는 데 비용만 무려 5000여만 원. 더 이상 스폰서를 구하기도 힘든 막다른 길목이었다.

각고 끝에 '2007 한국도로공사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해 2007년 4월 28일 네팔 카트만두로 향했다. 에베레스트 17개 루트 가운데 네팔 쪽 남동벽을 공략했다. 빙벽이 60∼70도로 가파르고 순간 초속 20∼30m의 강풍까지 불어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숨이 턱에까지 차는 극한 상황 속에서 10시간이 넘는 도전 끝에 결국 정상에 발을 디뎠다.

 
▲ 2007년 5월 16일은 한국 산악사에 있어 대경사를 맞았다. 장애인으로서 세계 네 번째,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주인공으로 김홍빈 산악인이 등극했기 때문이다. 


▽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홍빈씨는 산악인 체질로는 천부적이다 할 것이다. 1983년 광주 송원대학교 산악회에 들어간 그는 남다른 열정과 노력으로 1984년 광주 전남 암벽대회 2위에 올랐다. 1988년에는 설악산 토왕폭을 등반하면서 등반에 대한 자신감을 넉넉하게 축적하여 갔다.1990년에는 에베레스트(8,848m)와 낭가파르밧(8,125m)을 등반했다.

이제 김홍빈씨의 시야는 북미의 맥킨리봉(6,194m)을 향하고 있었다. 아뿔싸! 그에게 새옹지마의 예고편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맥킨리 등정에서 그는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아픔을 겪었다.

 
▲ 이제 김홍빈씨의 시야는 북미의 맥킨리봉(6,194m)을 향하고 있었다. 아뿔싸! 그에게 새옹지마의 예고편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너무도 충일했던 무모한 자신감! 그는 당시 식량도 단팥죽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극심한 체력 저하 현상 속에 강행한 단독등반이 사고를 불러 일으켰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그는 하루 정도 쉬고 등정하려 했지만 곧바로 합류하게 된 한국원정대 팀과 등반을 강행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다행히 맥킨리는 하루 1000명 정도 산악인이 등정하는 곳이라 쉽게 발견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심한 동상으로 인해 양손 열가락 모두를 절단해야만 했다. 김홍빈씨는 무려 3개월 동안 알래스카의 가톨릭계 프로비던스 병원에 머물렀는데 수차례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자살을 꿈꾸는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한 병원에서 열흘 만에 깨어났을 때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열 손가락이 모두 없어진 거예요. 3개월간 혼자 병원에 있으면서 자살할 생각까지 했지만 한국에 계신 어머니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더군요."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저를 다시 세상에 나오게 만든 계기는 여러 선후배들의 격려였죠. 산에 데리고 가고, 대소변도 가리는 것을 도와주고, 밥 먹는 것과 운전하는 것을 도와주는 등….”

 
▲ "열 손가락이 모두 없어진 거예요. 3개월간 혼자 병원에 있으면서 자살할 생각까지 했지만 한국에 계신 어머니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더군요."

 
▽ 신은 그에게 제2의 삶을 허용

귀국 후 그에게 찾아온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먹을 수도,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가난과 홀대 속에 다시 그에게 빛을 비춘 것은 결국 산사람으로의 회귀였다. 그는 기적적으로 재기한다.

1997년 어느 가을날 그는 홀로 광주 무등산에 올랐다. 한 등산객이 홍빈씨를 가리키며 같이 등산하던 어린 아들에게 "장애를 가진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지 않느냐"라고 격려하는 말이 귓가를 찔렀다. 그는 흩뜨려진 마음을 모질게 추슬렀다. 결국, 홍빈씨의 그랜드 플랜은 7대륙 최고봉 등정 청사진으로 실행의 단계를 밟게 된다.


▲ 귀국 후 그에게 찾아온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먹을 수도,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실의와 아픔 속에 6년이 지난 1997년 선후배들과 함께 워밍업 일환으로 일본 다테야마(3,105m)를 등반했다. 그 이후 자신감을 얻은 김씨는 같은 해인 1997년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스봉(5642m) 정상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1998년 남미 아콩가구아(6,962m), 2002년 북미 맥킨리 (6,194m) 등정, 2007년 호주 대륙의 코지어스코(2228m) 등 세계 7대륙의 최고봉 등정의 꿈이 이제 완결편에 이르렀다. 

2006년에는 世界의 高峯 14좌(단위 m) 중의 하나인 가셔브룸Ⅱ(8,035m)와 티베트의 시샤팡마 남벽(8,027m)을 등정하였다.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으로 이제 남은 고지는 남극의 빈슨매시프(4897m) 단 한곳뿐이다.
 
 
▲ 세계 7대륙의 최고봉 등정의 꿈이 이제 완결편에 이르렀다.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으로 이제 남은 고지는 남극의 빈슨매시프(4897m) 단 한곳뿐이다. 


▽ 최악의 조건에서 산을 타나?

"산에 오르면서 희열감을 느껴요. 처음에는 작은 산에서 시작해 산에 오르는 방법을 터득하면 큰 산에 오르고 싶죠. 그래서 산악인들이 끊임없는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는 것이죠."

"남들은 그러더군요. 정말 대단하다.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저는 아직까지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산을 사랑했기 때문에 계속 찾았던 것뿐입니다. 산은 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인생을 사는데 많은 경험도 축적시켜주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해줍니다.” 

▲ "산은 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인생을 사는데 많은 경험도 축적시켜주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해줍니다.”

 ▽ 후원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사실, 저는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탄 셈입니다. 그럼에도 실상은 매우 열악한 편입니다. 모든 경비와 일정을 제가 직접 꾸리지 않은 한 일의 진척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물론 외부의 조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체계적 조력 시스템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광주 동구 호남동 소재 아이안과의 윤장현 대표원장님께서 물심양면 도움을 아끼질 않고 있으며, 광주신세계와 광주은행에서도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 광주 동구 호남동 소재 아이안과의 윤장현 대표원장님께서 물심양면 도움을 아끼질 않고 있으며, 광주신세계와 광주은행에서도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한번 등정에는 막대한 돈일 들어갑니다. 마지막 코스인 남극의 빈슨매시프(4897m) 까지 정복하게 되면 무려 12년의 시간이 투입된 셈입니다. 재원만 넉넉하였다면 상당 기간을 분명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언론에도 큰 기대를 가졌지만 실망스러운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스포트라이트가 화려하게 비추어지곤 했지만, 생활고나 등반 여정에 있어 매번 크게 나아진 것은 없습니다.


▲ 김홍빈씨 또한 엄연한 하나의 인간이자 자연인이다. 그는 신앙생활에 입문할 의향을 언뜻 내비치기도 했다.

 
김홍빈씨는 현재 홀로 모든 것을 꾸리며 생활하고 있다. 그 또한 반려자의 든든한 성원이 백만 원군이었지만 그는 현재 솔로이다.

 
▽ 그는 결코 철인이 아니다.

기자는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그의 신관에 대해 간략히 물어보았다. 생사의 사선을 넘나들었던 홍빈씨는 죽음에 대해 초연한 듯싶었다. 그러나 그 또한 엄연한 하나의 인간이자 자연인이다. 그는 신앙생활에 입문할 의향을 언뜻 내비치기도 했다.


▲ 김홍빈씨는 현재 홀로 모든 것을 꾸리며 생활하고 있다. 그 또한 반려자의 든든한 성원이 백만 원군이었지만 그는 현재 솔로이다.

기자는 김홍빈 산악인에게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서적을 하나 선물했다. 기자는 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하여 선물하지는 않는다. 직접 집필한 서적 중 상대방에게 적합한 것을 선별하여 넌지시 건네곤 한다.

▲기자가 선물한 졸저
단행본의 타이틀은 ‘노아방주 미스터리’이다. 이 서적은 터키 아라랏산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신빙성을 무척 높여가고 있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방주의 실체에 대해 사이언스(과학)적으로 접근하였다. 기자는 쉽게 입산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이 산을 꼭 등정하여 그 실체를 규명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전하였다. 김홍빈씨는 등정 중에 꼭 시간을 내어 필독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왜 그랬을까! 산은 신성의 압축판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연약함과 불안정성 속에서 홍빈씨는 다시 세찬 희망을 점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홍빈 산악인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
 
그를 후원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도 의무도 그 어느쪽도 아니다. 홍빈씨는 아직 보살핌을 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근거가 너무 과다하다. 그는 여전히 영원히 우리의 보배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취재=소정현기자>

홈피 http://www.kimhongbin.com, ▽ 연락처: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 한신apt 101동 1306호 우: 502-777 ▽후원 광주은행 <김홍빈, 069-121-447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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