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바꾼 뉴라이트 역사학계

당시는 침략해온 왜적일 뿐, 일본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다.
역사복원신문 | 입력 : 2012/01/02 [10:30]
2012년 임진년의 밝은 해가 밝았다. 올해는 60년 만에 찾아온 검은 흑룡(黑龍)의 해이다. 임(壬)자가 검은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임진은 60 갑자의 하나로 그동안 임진년에 일어난 수많은 여러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곱 갑자(420년) 이전인 1592년 조선 선조임금 때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일 것이다.
 
이 사건을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썼다.
선조 25년(1592 임진) 4월 13일(임인) 1번째 기사
(제목) 왜구가 쳐들어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왜구(倭寇)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중국이 조공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리나라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평행장(平行長)·평청정(平淸正)·평의지(平義智)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밀양 등 부(府)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00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오직 밀양 부사 박진(朴晉)과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적을 진주에서 맞아 싸웠다. 성일이 아장(牙將) 이종인(李宗仁)을 시켜 백마를 탄 적의 두목을 쏘아 죽이니 드디어 적이 조금 물러났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21책 483면 【분류】외교-왜(倭)/ 군사(軍事) 
온통 적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올해부터 고교 국사교과서에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임진전쟁(壬辰戰爭)으로 고쳐 가르치겠다고 한다. 이는 현재 기득권층인 친일세력들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또한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기념관에서는 왜구(倭寇) 또는 왜적(倭賊)라는 단어 대신에 일본군(日本軍)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일본 관광객을 위해서란다.
(관련기사)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614&section=sc2&section2=
 
어떻게 이런 망발을 할 수 있는지 대한민국 공직자들의 역사인식이 정말로 큰 문제라 하겠다. 이는 일본 출신이 현직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보니 그런 것 같아 보인다. 소수의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나라의 역사용어까지 바꾸려는 발상은 일제식민지배에 대해 무한한 동경과 향수를 느끼고 있는 뉴라이트 계열에서나 나올 법한 한심한 발상인 것이다. 
 
▲  충무공기념관에서 어린 학생들이 열심히 뭐가를 적고 있다. 그들은 임진왜란이 왜구가 침략한 전쟁인지 모르고 당시 왜(일본)가 적인지도 모를 것이다.


“역사는 나(我)와 나 아닌 자(非我)와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단재 신채호선생은 정의를 내렸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 기록은 우리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해야 함에도, 지금 대한민국은 우리의 관점이 아닌 상대방 입장에서의 역사용어를 쓰고 있다. 즉 지금은 1592년 당시의 적을 적이라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역사 기술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로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하겟다.

위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은 왜구(倭寇) 또는 왜적(倭賊)으로 불렸다. 전체 <조선왕조실록>에서 왜구로 기록된 것이 1,392 건이며, 왜적으로 표현된 것이 5,195 건이며, 일본(日本)으로 기록된 건이 10,826 건이다. 평상시 이웃국가로서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할 때는 일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적이 되어 조선을 침략했을 때는 일본이라는 용어보다는 왜구 또는 왜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선조실록에서 왜적이라는 표현이 2,264 건, 왜구라는 기록이 114 건인 반면 일본이란 표현은 685 건에 불과하며, 그나마 일본이란 용어는 명나라와 주고받는 문서 또는 대화 내용에서만 쓰고 있다. 즉 당시 일본은 제 3자인 명나라와 대화할 때의 국호 호칭일 뿐, 침략을 받아 전쟁 중인 조선에게는 왜구 또는 왜적일 뿐이지 일본이 아닌 것이다. 

역사기록이 이러하거늘 어찌 당시 왜적을 일본군이라 부를 수 있으며,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이라는 제3자의 관점에서 본 역사용어를 쓰는지 모르겠다. 당시 조선이 명나라가 아니지 않은가!!! 명성황후께서 처참하게 시해당한 사건을 아직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부르고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바꾸려는 친일식민사학계 정말로 문제 많은 집단이다.  

아래는 중앙일보 관련기사이다.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고교에서 가르친다.
검정 통과한 ‘동아시아사’ 교과서 

내년부터 고등학교에서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가르치게 된다. 내년 고교 정규 과목으로 신설되는 ‘동아시아사’ 과목에서다. ‘조선과 일본, 명(明)이 7년간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명이 쇠망하고 청(淸)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등 동아시아의 판도 변화를 일으킨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는 학술 용어로 왜란(倭亂)이란 용어는 부적절하다는 역사학계의 문제제기가 반영된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동아시아사’ 교과서는 교학사와 천재교육 출판사가 제작한 2종류다. 2종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의 교과서 검정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 두 교과서는 병자호란·정묘호란도 각각 병자전쟁·정묘전쟁으로 용어를 바꿔 기술했다. 

‘임진왜란이란 명칭을 임진전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학계에서 제기됐다. 왜란이란 표현은 ‘왜인(일본인)이 일으킨 난동’이란 의미로 ‘동아시아 3국이 싸운 국제전쟁의 성격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컸던 전쟁이란 점을 강조해 ‘7년전쟁’이란 용어를 함께 써 온 학자도 있다. 그럼에도 교과서에 어떻게 기술할지는 본격 논의되지 않고 있던 것을 이번 교과서 집필진들이 임진전쟁으로 기술한 것이다. 일부 필자는 “동아시아 대전이란 용어가 타당하다”는 주장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학사가 만든 교과서의 대표 저자인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란 용어는 피해자의 적대감이 깃든 용어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렇게 기술한 게 굳어져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임진왜란은 우리 입장이 강하게 담긴 용어인데 한국사가 아닌 동아시아사를 편찬하면서 자국중심적 용어를 고집할 수는 없었다”며 “학술적 견지에서 임진전쟁이라 바꿔 부른다고 해서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천재교육 출판본의 대표저자인 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왜구들이 개항장에서 난동을 일으킨 사건을 뜻하는 삼포왜란에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나, 7년 임진전쟁에도 왜란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두 교과서는 ‘17세기 전후 동아시아의 전쟁’이란 단원에 8∼10쪽씩 할애하며 이 같은 표현을 썼다. 천재교육 교과서에서는 본문 맨 처음에 임진전쟁(임진왜란)이라 병기한 뒤 반복되는 부분에서는 ‘임진전쟁’이란 표기만 사용했다. 교학사 교과서는 본문과 별도로 ‘임진전쟁을 부르는 이름의 차이’란 항목을 따로 만들어 ‘임진전쟁을 부르는 다양한 명칭에 나타난 삼국의 역사인식 차이를 생각해 보자’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제시했다. 일본에선 당시 연호를 따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祿·慶長の役)’, 중국에서는 ‘항왜원조(抗倭援朝)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내년부터 고교 필수 과목이 되는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임진왜란으로 기술돼 일선 교육현장에서 용어의 혼란이 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손 교수와 안 교수는 “앞으로 학계 논의를 거쳐 이런 문제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여태까지 사용해 오던 용어를 변경하는 데 따른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사 교과서의 저자인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실체에 보다 근접해진 표현이라 생각해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다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보수단체 등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교과목 신설은 역사교육을 강화하자는 교육과학기술부의 방침에 따라 2006년 결정된 것으로 내년부터 일선 고교에선 세계사와 동아시아사 가운데 한 과목을 선택해 가르쳐야 한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표본 조사 결과 동아시아사 과목 선택에 관한 반응이 호의적”이라며 “전국 50만 명 고교생 가운데 20만 명이 동아시아사를 배우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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