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왕의 진짜 무덤을 찾았다! (18-1부)

황제헌원을 굴복시킨 치우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환웅
성훈컬럼니스트 | 입력 : 2012/01/06 [16:38]

(원문) 6세 달문단군 재위 36년
임자 35년(B.C2049) 모든 한(汗)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九月山)에 제사지내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도록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 “(전략) 아침 해를 먼저 받는 동녘의 땅에 삼신께서 밝은 세상에 임하셨네. 환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뭇신들이 환웅을 보내고자 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치우는 청구(靑邱)에 우뚝 서 만고에 무용으로 명성을 떨치니, 회대(淮岱) 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 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환(九桓)을 움직이더라. 어수(魚水)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德化)는 새롭기만 하더라. (중략)

진한(眞韓)은 나라 가운데 자리잡고 길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유신되더라. 모한(慕韓)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새로운 도읍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와 저울그릇과 같음이라. 저울그릇은 백아강(白牙岡)이요, 저울대는 소밀랑(蘇密郞)이라. 저울추는 안덕향(安德鄕)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형을 이루어 나란히 있고,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리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리라. 왕업은 일어났다가도 망하는 법. 흥망성세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어다. 정성으로 오로지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고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는 일을 없앴다. 국경을 지키고 화백(和白)회의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됨이 여기에서 시작한 듯하였다.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 곳이었다.

본 해설은 장문이라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편의상 치우천왕에 관련된 내용 이외의 것을 먼저 해설합니다. 

어수(魚水)는 어디인가? 

먼저 위에 언급된 어수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오는데, 어수가 지금의 하북성 만성현 서남이라는 것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번역) 어수 : <수경주> 북평현 서남에 있는 어산 아래에서 나와 동류해 포수로 흐른다. (鱼水 : 在河北省满城县西南,《水经注》鱼水出北平县西南鱼山,水发其下,东流注于蒲水) 

다시 포수(蒲水)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하북성 완현으로 나오는데 역시 지명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아래 포수의 흐름에서 언급된 영화현, 습현, 대녕현과 포현(蒲縣) 등은 산서성 남부 임분시의 서쪽 황하변에 있는 현재의 지명들이다.
(번역) 포수 : <한서지리지> 포양산은 포수가 나오는 곳이다. 동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간다. 원래 산서성 영화현 길북산에서 나오는데 포천이라고도 하며 습천하가 만들어진다. 동남류해 습현 서남쪽 자천하와 포곡하에 합쳐진다. 또 서남류해 대녕현 경계에 있는 명흔천으로 흘러갔다가 서류해 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이하 생략)
(원문) 蒲水 : 在河北省完县北,《汉书地理志》蒲阳山,蒲水所出,东入濡。源出山西永和县佶北山,亦名蒲川,又作隰川河,东南流至隰县西南合紫川河及蒲峪河,又西南流入大宁县界名昕川,又名曰斤川,西流入黄河,《清一统志》、《水经注》及《元和志》,皆以川北者为蒲水,而县志则以自隰州来者为紫川河,自蒲县来者为蒲河,盖以州南有紫川入蒲水,遂并上流亦称紫川,而蒲县之蒲峪河,独擅蒲水之名矣。

그러나 사서에 등장하는 고대 포(蒲) 지역은 포판(蒲板)으로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首陽山)이 있던 곳으로 고대 유주(幽州)에 속한 요서군(遼西郡)의 땅이다. 수양산이 어디인지 가장 확실하게 밝힌 사서는 <사기 집해>로 “마융이 말하길: 수양산은 하동지방의 포판에 있는 화산의 북쪽에 있고, 그곳은 황하가 꺾여 흐르는 곳이다. (集解馬融曰: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하동(河東)은 황하의 동쪽으로 지금의 산서성을 말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황하가 꺾이는 곳이란 설명이다. 아래 고지도에 포판과 백이.숙제의 묘가 그려져 있다. 
 
▲ 산서성 서남단 황하 굴곡지점에 백이.숙제의 묘와 포판과 포주가 그려져 있다.  이곳이 요서군의 땅이여, 여기서 멀지않은 산서성 남단에 있는 영락현이 북평군의 치소였다.  지도의 윗 부분에 영화, 대녕, 습주, 포현 등이 그려져 있다.  

거기서 멀지않은 곳에 요서군에 속했다가 분리되었다는 북평현(=영락현=창려)이 있었던 것이다. <수경주>에서 말하는 북평현(北平縣)은 바로 영락현(永樂縣)을 말하는 것으로 산서성 최서남단 황하변에 있는 지금의 영락진이라는 지명이다. 영락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싸이트를 참조하기 바란다.
(제목) 중국대륙 한복판에 있는 광개토태왕의 지명 영락진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47&section=sc7&section2=

참고로 아래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북평현에 대한 설명은 별로 중요치 않고, 북평현이 후위 때 영락현으로 설치되었다는 것만 아시면 된다.
北平县(북평현) : 1) 汉置,后汉世祖追铜马五幡贼于北平,破之,即此,故城在今北京市满城县北,后魏于此置永乐县,唐改为满城。
2) 后魏置北平郡,北齐郡废,省蒲阴置北平县,隋唐因之,故城在今北京市完县东北,五代唐改曰燕平,宋复矿,置北平军,金改曰永平,即今完县治。
3) 后魏置,隋改真昌,唐初省,故城在今河南方城县东南。

따라서 어수는 산서성 서남단 북평군(=영락현)을 흐르다가 황하로 들어가는 강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곳이 배달국과 조선의 영토로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환웅과 단군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환(九桓)을 움직이더라. 어수(魚水)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라는 기록이 남게 된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상춘(常春), 구월산(九月山), 저울그릇인 백아강(白牙岡), 저울대인 소밀랑(蘇密郞)이 어디인지는 현재 알 수가 없고, 저울추인 안덕향(安德鄕)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이 찾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인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탕지(湯池)는 옛날의 안덕향이다.”라는 설명이 있으며, “저울의 추가 오덕지(五德地)라 함은 번한의 옛 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가 그것이다.”라고 했는데 그곳은 바로 태조대왕이 쌓은 안시성이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사>를 인용하여 백아강이 마한의 옛 도읍지로 지금의 대동강이라는 이맥선생의 설명은 잘못 비정된 것이거나, 옛 대동강이 산서성 남부를 흐르는 강이었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번역) 안덕현 : 1) 한. 후위 때 안덕군을 설치. 수나라 때 폐지. 지금의 산동성 능현
2) 남제 때 설치. 지금의 궐. 당시 호북성 북쪽 경내에 있었다.
3) 후위 때 설치. 지금의 궐. 당시 산동성 구청주부 경내에 있다.
4) 요나라 때 설치. 지금의 요녕성 금현 서북. 일설에는 하북성 조양현 동남쪽.
(원문) 安德县 : 1) 汉置,后魏置安德郡于此,隋郡废,明初县废,今山东陵县治。
2) 南齐置,今阙,当在湖北境。
3) 后魏置,今阙,当在山东旧青州府境。
4) 辽置,寻置安德州化平军于此,金废州,改县曰永德,元废,故治在今辽宁省锦县西北,一说在今河北省朝阳县东南。
 
▲ 안덕향 = 탕지보는 개평 동북 70리로 태조대왕 때 쌓은 요서 10성의 하나인 안시성이다.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그 위치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형제도와 보증제도를 없앤 조선은 정말로 살기 좋은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까지 화백(和白)회의는 신라에서 처음 시행했던 제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조선에서 최초 시행한 제도라니 그저 놀랄 뿐이다. 아마 신라의 화백제도는 단군신화를 조작해 조선이라는 나라까지 없애버린 일제식민시학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탁록과 공상과 유웅은 과연 어디일까?

<삼성기전 상>에 “후에 환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최초 배달국이 신시(神市)에 개천한 곳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곳은 바로 산서성 태원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근거는 아래 싸이트를 참조바랍니다.
(제목) 우리 민족의 백두산과 천지는 원래 어디일까?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60&section=sc6&section2

배달국이 개천된 지 약 1,200년이 지나 14대 자오지환웅이 등극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동방의 군신(軍神)이며 무신(武神)인 치우천왕이다. 치우천왕은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 재위기간이 109년이며 151세까지 살았다고 <삼성기전 하>에 기록되어 있다. 치우천왕이 도읍을 옮긴 청구국 일명 구리(九黎)국은 과연 어디일까? 그 단서는 치우천왕의 행적과 무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치우천왕의 행적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다음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기록된 치우천왕의 행적이다.
“치우천왕은 안으로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유망의 정권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 정벌하였다. 탁록(涿鹿)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구혼(九渾)에 올랐다.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洋水)를 건너 출전하여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陣留)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유망은 소호(少戶)로 하여금 마주 싸우게 하였으나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고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공손헌원(公孫軒轅)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토착민들의 우두머리였다.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되려하기에 탁록으로 쳐들어가 이를 전멸시켰다. 그래도 굴복치 않고 싸움을 걸어오는지라 탁록과 유웅(有熊)의 벌판에서 사방에서 포위해 압박해 들어가 참살하니 그 숫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

1) 탁록은 어디인가?
▲ 운성시정부에서 발표한 탁록 유적지 
중국에서는 북경 서북쪽에 탁록현이라는 지명을 만들어놓고 이곳이 황제헌원이 치우를 잡아 죽인 탁록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일 뿐이다. 원래 탁록은 유주(幽州)에 속한 상곡군(上谷郡)에 속한 일개 현으로, 유주가 산서성 남부와 황하변 하남성 일대의 지역이므로 이 부근을 벗어날 수 없다.
(上谷郡 상곡군) 秦置。莽曰朔调。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三万六千八,口十一万七千七百六十二。县十五:沮阳,莽曰沮阴。泉上,莽曰塞泉。潘,莽曰树武。军都,温馀水东至路,南入沽。居庸,有关。雊瞀,夷舆,莽曰朔调亭。宁,西部都尉治。莽曰博康。昌平,莽曰长昌。广宁,莽曰广康。涿鹿(탁록현),莽曰抪陆。且居,阳乐水出东,南入沽。莽曰久居。茹,莽曰穀武。女祁,东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또한 중국 운성시 정부에서는 탁록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중요 부분만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대규모 전투인 “탁록의 전쟁”은 중화민족의 발생지라 일컬어지는 황하 중류의 산서성 운성(運城)시 일대에서 발생했다. 그 전장에서 황제헌원과 전쟁했던 치우는 중국 최초의 병기 발명인이었다. <공자삼조기> <태평환우기> <위토지지> <해현지>와 당나라 때 저명한 시인인 왕유의 해주 <염지요망> 등 사료로 인증된다. 산서성 최남부에 있는 지금의 운성시 해주(解州)는 고대의 탁록(涿鹿)이다."
 
▲ 산서성 남부 운성시정부에서 "탁록은 운성시에 있다"라는 공식 공지창     ©역사복원신문

2) 공상과 유웅은 어디인가?
고대 공상과 유웅이 어디인지는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을 수 있다.
* 공상 : 하남성 진류현 남쪽에 있다. <환우기>에 이윤이 태어난 곳이다.
(空桑 : 在河南陈留县南,《寰宇记》伊尹于空桑,即此。)
* 유웅 : 황제헌원의 도읍으로 하남성 신정현이다. <통전> 신정은 축융의 옛터이다.
황제가 유웅에서 도읍했기에 황제를 유웅씨라고도 한다.
有熊 : 黄帝之都,即今河南新郑县,《通典》“新郑祝融之墟,黄帝都于有熊,亦在此也,” 故黄帝亦曰有熊氏
 
▲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인 치우천왕의 전쟁지명은 하남성 황하변 정주와 개봉 근처에 있다.  이 안에 치우천왕의 진짜 무덤이 있다. 과연 어디일까? 

3) 양수는 어디인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설명하는 양수(洋水)는 다음과 같다.
(번역) 양수 : 양천이라고도 한다. 섬서성 서향현 남쪽 경계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파현이 다스리는 요진으로 흐른다. 동북쪽으로 꺾이고 세로방향으로 돌아 서향에서 목마하와 만나고 한수로 들어간다. <수경주> 양수는 원래 파산에서 인도되어 동북류해 평양성을 경유한다. 양천이라고도 하는데 한나라 척부인이 태어난 곳이라 한 고조(유방)가 옛 현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원문) 洋水 : 亦曰洋川,源出陕西西乡县南境,西南流绕镇巴县治,折而东北,复经西乡会牧马河,入于汉,《水经注》洋水导源巴山,东北流迳平阳城,洋川者,汉戚夫人所生之处也,高祖更名曰县,又目其地为洋川,洋水又东北流入汉。

요임금과 관련 있는 요진과 평양성이란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산서성 남부 임분시를 흐르는 물길로 보이는데, 위 설명에 섬서성을 흐르다 한수로 들어간다고 하니 확실치는 않다. 여하튼 두 군데 다 하남성 진류에 있는 공상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전쟁을 치룬 치우천왕의 무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곧 2부에 이어집니다.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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