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어디로 가는가?

선진과 통일로 이끌 당찬 지도자를 길러야
신성대 논설위원 | 입력 : 2012/01/23 [18:29]
거침없이 달려온 한국이 드디어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여 세계9위의 무역대국에 진입했다고 한다. 고도성장 속에 나름의 성공을 획득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제 한국사회의 안정과 성숙을 얘기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파이조각에 대한 분노와 갈망으로 들끓고 있다. 성장의 온기가 골고루 퍼지지 못한 탓이다.
 
그들은 이미 신분적 경제적 ‘상승의 종말’을 눈앞에 확인하고서도 잠시전의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한 개인조차도 한편으로는 변화를 갈망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을 부르짖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과 자식들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해서 진보를 가장한 극단적 이기주의 집단에 맹목적으로 몰려들어 내달리는 배를 뒤로 잡아당기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국민이 원하는 건 진통제가 아니다
 
▲ 대한민국 상징 태극기와 무궁화     © 한국무예신문
당장의 한국 사회는 초고속 초압축 성장으로 인한 후유증, 그동안 꾹 참아왔던 성장통을 한꺼번에 앓고 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한국인의 기질이 지나치게 저돌적이고 공격적이며 불안정해졌다. 이제 압축파일을 조금씩 풀 때가 된 것이다. 당연히 진통이 따르겠지만 지혜를 모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헌데 불행히도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지금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해버렸다. 그리고선 다급하게 SNS를 더듬거려 내놓은 처방전이 고작 복지정책이다.
 
게다가 하필 정권 교체 시기와 맞물려버렸다.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산타클로스 역할을 하며 자본주의 최후의 마약을 마구잡이로 뿌려댐으로써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를 덮기에 급급하다. 더욱이 이를 견제해야 할 야당정치인까지 오히려 자신들이 만든 진통제가 더 뛰어나다고 선동질을 해대며 대한민국을 우민정치의 낭떠러지로 몰아가고 있다. 기실 국민들이 원하는 건 진통제가 아니라 더 강한 성장촉진제인데도 말이다.
 
사실 어떤 복지정책이든 간에 그 혜택의 대부분은 노인층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지금 이 땅에는 일자리가 없어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가지지 못한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것조차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하지 못하는 노인층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이대로 10년 후면 나라꼴이 어찌될지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예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계속 성장을 원한다. 그래야만 할 더 큰 이유도 있다. 바로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때로는 진통제도 필요하다. 하지만 최소한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문화 창조의 역동성을 잃지 않으면서 용기와 끈기의 민족성을 되살려낼 수 있다. 작금의 몸부림이 성장통으로 끝날지, 아니면 완치 불가능한 류머티즘으로 진행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지금 당장 국민들에게 진통제를 줄이고 이 고통을 함께 감내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진정 우리가 바라는 리더가 아니겠는가?
 
전복을 꿈꾸는 한국 정치
 
세계는 급속하게 변하고 있고 우리 사회 역시 더없는 역동성으로 출렁대고 있지만, 정치지도자는 물론 지식인들도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측정하고 새로운 전망을 그려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거부, 공적인 것에 대한 여론의 무관심, 기성 엘리트에 대한 회의가 이미 전복의 수준에 도달해버렸다. 개인주의적 집단의 역동성이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힘(SNS)의 등장에 당황한 정치인들은 가까운 미래에도 자신이 게임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으로 그들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감각을 상실한 채 몇 안 되는 구명조끼를 두고 멱살잡이를 하고 있다.
 
선택을 받은 권력자일수록 오히려 더 고압적이며, 기만적이고, 조작적이며, 착취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빈곤한 상상력으로 미래에 대한 청사진 하나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지난 시대의 무능했던 한물간 정치인들을 끌어 모아 일단 정권부터 차지하고 보자는 야당들의 담합. 더 이상 문화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어떤 확신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부패한 집권당 정치인들. 이제 그들의 전문적인 노하우까지 의심 받고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변화들을 도무지 예견할 줄도 설명할 줄도 몰랐다. 결국 무능한 권력일수록 더 쉬이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한 번 더 증명한 것 외에는 그다지 한 일이 없다. 국민들은 더 이상 현실과 단절된 기성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권위의 모든 형태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그동안 우리사회를 지탱해온 전통적인 정당정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다시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서지 말고, 그냥 사라져 최소한의 양심이나마 지켰으면 싶다.
 
흔히들 정치란 사랑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사람들을 사랑할 때, 어떤 지역을 사랑할 때,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기를 기대하고 그 지역이 아름다워지기를 기대할 때 우리는 정치로 향한다. 정치를 한다는 것, 권력을 지닌다는 것은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인들은 그동안 이 지극히 단순한 이치를 깜빡 잊었거나 그 반대로 알고 있었던 게다.
 
여성적 정치인들의 등장
 
박근혜와 한명숙, 그리고 갓 쓴 여인네같은 안철수의 등장.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의 남성적 가치의 모델이 붕괴되면서 그 대안으로 ‘여성적’이라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떠오르고 있다. 더욱이 그(녀)들은 지난날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던 ‘남자 같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다운 여성이거나 중성적 모습을 지닌 남성이다. 그동안의 남성 위주의 정치체계가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것에 대한 반발로 경청, 대화, 인내, 양보, 배려, 이해심 등 모성적 미덕으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리라.
 
한국사회는 이제 더 이상 공격적이고, 너그럽지 못하고, 논쟁적이며, 고집스레 대립적인 재능을 지닌 ‘똑똑하기만 한’ 리더를 원하지 않는다는 거다. 대신 자제심, 갈등 상황을 조화시키려는 의지력, 경청과 대화를 통해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비(非) 권위적인 리더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측면에서는 유리하지만 적극적인 열정이나 실제 정치력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한 ‘대안적 인기인’에게 국가경영을 맡기는 모험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정치는 또한 현실을 신화 속으로 접목시키는 기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분야에 정통해야 하고, 그 분야를 느끼고 사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 있게 결정을 해야 하며 그 결과를 감당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여 국민들의 납득을 얻어내야 한다. 제발이지 진통제를 들고 만병통치약인양 선전하거나 옛주인에 대한 복수 어쩌구 하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길 바란다. 초등학생도 그런 걸 두고 정치라 하지는 않는다.
 
통일이 눈앞에 다가 왔다
 
▲ 통일전망대     © 한국무예신문
이미 개방의 기회를 놓쳐버린 북한에 대한 주변 4강국의 인식이 이제는 예전 같지가 않다. 러시아는 북한을 포기한 상태이고, 일본 역시 북한을 이 상태로 방치하는 것보다 개방 혹은 통일시키는 것이 오히려 자국에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중국조차 이 애물단지에 대한 피로감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자본들은 북한을 동북아의 마지막 노른자위로 점찍어 놓고 보따리 싸들고 학수고대 하고 있다. 세계가 이 동북아 번영의 걸림돌을 어떻게 해서든 제거해야 한다는 점에 이견이 없다는 말이다.
 
설사 김정은 체재가 안정적으로 구축된다 해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만의 하나 정권 내부의 결속이 흔들릴 때 외부, 즉 남한에 대한 국지적 도발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이때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북한 정권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휴전 후 지금까지 북한은 단 한 번도 남한의 응징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예상외의 반격에 대한 충격을 감내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때가 통일을 위한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비폭력과 무폭력을 구분 못하는 종북 좌파들
 
바야흐로 한반도에 긴장과 통일의 기운의 응축이 극에 달했다.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주변 4강국에 휘둘리기만 하던 약소국이 아니다. 이미 한국은 선진국이다. 스스로 통일을 이뤄낼 만한 힘과 지혜를 갖추었다. 다시는 천안함이나 연평도 피격과 같은 수치스런 굴욕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응징해서 도발이 곧 북한정권의 종말임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통수권자는 머뭇거리거나 애매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그건 자격상실이다. 대한민국 국민과 국군의 수치이고, 무엇보다 목숨을 바친 젊은 혼령들에 대한 모멸이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이 영광된 일이지 어찌 부끄럽고 한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가? 왜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자신의 국민들로부터 냉소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침략을 당하고도 분노는커녕 제나라 군대부터 의심을 하고, 그 괴수의 죽음에 문상을 못 가게 한다고 떼를 쓰는 종북 좌파들이 그렇게도 무서운가?
 
군이든 경찰이든 사법이든 국회든 공권력이라면 무조건 짓밟아야 한다며 갖은 폭력을 다 동원하여 훼방을 놓는 진보단체들.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은 얻어터지고도 비폭력, 아니 무폭력을 주장하니 이게 상식인가? 변태인가? 그토록 비굴해서라도 정권을 잡고 싶은가? 그게 용기라면 차라리 북한을 민주화시켜 권력을 잡을 궁리는 왜 못하는가?
 
어떤 식으로의 통일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우리의 통일 의지를 국제사회에 당당하게 밝혀야 한다. 4강국더러 분단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나서서 통일에 공을 세우도록 경쟁을 유도해야 한다. 우리에겐 그럴만한 힘이 축적되었고, 다시없을 기회가 도래하고 있다. 이는 순전히 이번에 우리가 어떤 정치인, 어떤 지도자를 뽑느냐에 달려 있다. 분단이든 통일이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다시 외세가 주도할 통일이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
 
반쪽 나라, 반쪽짜리 지도자에 신물 났다
 
지난 날 민주화도 젊은이들이 이뤄냈지만 선진 문턱에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급격하게 문약해져 가고 있다. 무력 없는 평화가 있을 수 없듯 야성을 상실한 민주주의는 몰락하고 만다. 이념, 환경, 노동, 인권, 복지!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더 큰 미래가 있지 않은가? 국가라는 공동체의 건강성을 위해서도 남북의 통일은 절실한 일이다. 통일민국을 그려보자.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야성이 합쳐지면 적어도 한 세기는 이 민족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우뚝 설 것이다.
 
아직도 한국인들은 지난날의 카리스마적이고 자신감에 찬 고독한 결정권자로서의 리더에 대한 향수를 지닌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비록 그런 시대, 그런 리더가 다시 올 수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허나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함과 결단력, 즉 무혼(武魂)을 지닌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다. 국가의 에너지를 수렴하는 촉매 역할을 하면서도 때로는 국민에게 과감한 희생과 동원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의지주의자를 기다린다. 설사 여성이라 해도 그렇다.
 
흑룡의 해다. 흙룡, 대지(大地)의 용이다. 곤도(坤道)의 시대가 도래 했음이다. 상식과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격랑이 한반도로 밀려오고 있다. 태극이 쪼개지고 대지가 진동할 것이다. 겁먹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앞장 서 통일의 문고리를 잡아당길 수 있는 지도자를 생산해내야 한다. 콩가루처럼 흩어진 국민의 열망을 규합하여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어 선진시대를 열어갈, 반쪽짜리가 아닌 온쪽짜리 지도자여야 한다. 기다리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다음, 다음, 다음. 열정과 끈기로 길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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