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과 대륙을 지배경영한 백제와 로마

국제해상 무역국가 백제의 수도문제와 세계주역 한반도의 중요성
윤복현 기자 | 입력 : 2008/04/25 [11:34]

고대 동아시아 해상제국 백제

1.비류백제와 온조백제문제, 그리고 백제의 수도문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탄탄한 제국을 건설하기위해서는 기반을 다져야 하기 때문에 비젼과 전문성을 가진 뛰어난 인재들을 기반으로 시스템과 제도의 구축, 그리고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는, 구축된 시스템과 제도의 실현과정에서 오는 시행착오, 그리고 비로소 정착되며 발전하는 차원을 의미한다 하겠다.




그리스제국과 패권을 다투다 결국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전술로 멸망했던 트로이 제국의 왕손들이 세운 로마는 무궁화를 신성시했는데, 로마인들의 조상들이 되는 트로이 제국은 고대 우리 동이족과도 크게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로마인들도 단군조선처럼 [아사달 백성들]에 비유되는 차원에서 로마시민들에 국한되었지만, 민주 공화정을 기반으로 시스템과 제도구축을 통하여  로마의 번영은 물론이고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공익사업들을 펼친 결과 고구려의 역사와 버금가는1천 여년에 가까운 생명을 유지하였으며, 로마의 법과 제도는 현대 서양인들의 법과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왕정-공화정이 조화된 시스템과 제도를 통하여 유럽과 아프리카대륙을 경영한 로마제국도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는데, 왜 해상제국 백제가 한반도에서 출발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역사와 사건에 있어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객관성를 지향하고자 하는 필자의 관점에서 만주대륙의 비류백제와 한반도의 온조백제와의 관계성과 관련하여 백제 또한 한반도의 서울에서 출발한 동아시아 해상제국임을 문헌들의 비교분석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하여 증명해 보기로 한다.  

호모의 대서사시"일리어드"에서 묘사된 bc13-bc12c의 트로이 제국은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유적을 발굴하면서 하나의 신화가 아니라, 역사의 실재임이 증명되었다.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렇게 문헌적 내용과 고고학적인 유적유물의 일치성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증명해 내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학의 원칙이어야하며, 역사학도의 연구자세여야 한다.

▲ 백제의 웅진(곰나루). 지형도
 
고국천황을 백제와의 전쟁에서 죽게 만든 원한관계와 더불어 서해와 중국대륙 진출의 교두보인 한강을 차단하려는 차원에서 마침내 백제의 한성까지 침략하여 백제의 개로황제를 죽인 고구려 장수황제 군대의 침략으로 한성(서울)을 상실하고 웅진(공주)로 수도를 이전한 이후 해양제국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다.
 

▲  ▲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 계묘년(523) 5월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 이로써 무령왕의 계보와 웅진시대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관계에 대한 단서가 잡히게 되었다. 또한 무령왕이 523년에 죽자 3년상을 치르기 위해 2년3개월간 가매장했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墓誌와 買地券을 만들었고,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안치할 때(529년) 무령왕의 買地券 반대쪽에 왕비의 墓誌를 새겼음도 밝혀졌다. 무령왕이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것은 그의 출생연도가 462년이며 즉위연도인 501년에 그의 나이가 40세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천자나 황제의 죽음을 의미하는 崩御가 표기되어 백제황제의 무덤임을 증명해 주었다.
<수서>에서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백제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백제의 중이 중인도로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했다』(조선불교통사) 『 백제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일본서기)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구축한 교역망의 범위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범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는 「탑등(tapen,tapeten)」이 보이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었는데,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관(불-부여-을 상징한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남해안 지역과 동남아시아와 일본열도를 바다를 통해 종횡무진하며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제국 백제는 고대 아시아의 로마제국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다 바람의 방향과 해로에 전문가들인 백제인들은 선박을 통하여 한반도와 중국대륙, 그리고 동남 아시아와 일본열도를 충분히 아우르는 지역의 초월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는 고고학적 유물들도 증명하고 있듯이, 한반도에만 백제를 가두어 버리려는 식민사관세력도 문제지만, 백제가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고 중국대륙에만 존재했을 것이라는 일부 민족사학자들의 편협한 인식 또한 고대인들의 폭넓은 활동범주를 이해하지 못한 편협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개마무사가 상징하듯이 기마민족국가로서, 단군의 후예들로서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제하고 아우르는  국가였던 고구려는 만주와 아시아 대륙을 기마부대를 통해 종횡무진하면서 지배했다. 만주에서 몽골까지 말로 달리면 1주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기마민족 고구려인들에게 거리적 제한은 허용되지 않았다. 만주에서 하북성까지, 만주에서 몽골까지, 하북성에서 한반도까지, 하북성에서 티벳까지 얼마든지 단 시간내에 이동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의 후예들로서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했던 징기스칸의 몽골제국만 보아도 얼마든지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제본국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한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해상을 장악하고 국제무역에 능했던 백제라는 나라는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로로 부여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왕위에 오른 고두막한에게 쫒겨난 해모수계 동부여 해부루의 서손이자 소서노의 남편이던 구태(우태=부여와 고구려 관직명)의 아들인 비류백제세력이 소서노와 고추모가 함께 건국한 고구려의 왕권이 고추모의 아들인 유리에게 계승되자, 부여의 적통임을 내세우면서 대륙에서 고구려에 저항한 기록들이 나오기도 하는 이유다. 예컨대,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 기사는 우연찮게 만주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꼽힌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의 비류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한『백제국은 본디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송서> 백제 조)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백제(비류백제)와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후한서> 건광 원년 조). 두 기록 역시 식민사관적 인식으로 보면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다. 




▲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 위덕왕의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새겨진 명문 기록 .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 "百濟王  昌"이란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다.
 
즉,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어떻게 중국 대륙 요동의 동쪽 땅에 있게 되는지, 또 백제군사가 어떻게 만주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예맥의 군사와 함께 움직일 수 있냐고 말이다. 이러한 중국문헌들의 기록들은 모두 한반도 온조백제와 합류하기 전 중국 만주 땅에서 고구려 왕권을 유리에게 빼앗긴 나머지 고구려에 저항했던 백제(비류백제)를 반증하는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사학자들이 이러한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의 구분없이 마구잡이로 해석하면 오류와 혼란을 줄 수 밖에 없다고 본다.중국 대륙의 백제가 중국 역사가들의 눈에 띄게 된 것은 4세기 중반의 일이다. <자치통감>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대륙의 비류백제는 지금의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부여를 서쪽의 전연(前燕) 근처로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 요동지역의 강자인 전연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기원후 343년 경으로 짐작되는 전연과의 전투에서 대륙 백제는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거니와, 바로 이 때문에 비류백제가 동아시아의 역사 무대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또한『광개토왕릉비문에 「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비류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된다. 당시 한반도 온조백제국과 고구려 사이에는 낙랑국이 버티고 있어서 서로 교류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4세기에 접어들어 북중국은 5호16국 시대의 대혼란이 개막되었고, 그 파장은 고구려에도 미치게 된다. 고구려가 서쪽지역에 국력을 집중하는 틈을 타 만주의 백제는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력을 확보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이후 중국측의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비류백제가 구태백제로 중국문헌에 기록되기도 하는 사유는 바로 구태가 비류 아버지의 실명이기 때문이다. 비류의 또 다른 이름인 우태는 부여와 고구려의 관직명이기 때문에 비류의 아버지 실명은 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와의 관계성은 무엇인가?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못박듯이 말한다. 이것은 당시 만주대륙에 존재하고 있던 비류백제의 실존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주서> 백제조)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수서> 백제 조)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한원> 백제조)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형제는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으며, 비류의 아버지로 볼 수 있는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또한 온조백제보다 군사력이 강성한 비류백제가 온조백제와 합류하면서 비중면에서 온조백제의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결국 비류백제계와 온조백제계와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고 추정할 수 있고,  부여계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백제 왕족들의 성씨도 ‘부여’씨로 변경했다고 볼 수 있으며, 부예계의 적통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고구려와 치열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벌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한 근거로는 사실 백제 왕들은 한결같이 부여씨(扶餘氏)를 씨성으로 삼고 있다는 점과 <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간 백제 왕실은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뉘며, 모두 부여계 출신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와 백제 왕들이 참혹하게 죽이면서까지 동명성왕을 시조로 삼는 고구려와 백제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이유는 바로 부여계의 적통임을 내세운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글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백제가 나중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으며, 백제의 역대 왕들이 해모수의 부여왕조를 계승하여 민중의 지도자로 왕위에 올랐던 소서노의 할아버지이고 비류와 온조의 고조 할아버지 되는 고두막한 동명성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점 등 때문이다.


1천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고두막한(동명성왕) 사당인 「동명묘」는 하남 위례성인 몽촌토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숭산(현재 이름은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소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황제들은 황성인 몽촌토성에서 검단산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의식을 집전하였으리라. 그리고 또한 중국대륙에 진출한 백제가 중국 황하강 남쪽 하남성 지역에 숭산을 세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다같이 부여의 후예인 비류계와 온조계가 후에 어떻게 결합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가 같고 부여계라는 동일한 혈통과 동명성왕이라는 동일한 시조의식때문이였을 것으로 본다. 또한 전연에 대패한 비류백제는 정착지가 필요했고, 마한지역에서 세력이 미약했던 온조백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비류백제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이도학씨의 견해또한『만주지역의 비류계 백제는 강성한 전연의 계속되는 압박과 고구려의 강한 구속 정책에 의해 거점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한반도로 남하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결과 동일한 계통인 양 지배층은 대결을 피한 채 더욱 강화된 국가체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백제 건국설화상 형(兄)으로 전해진 데서 짐작되는 종가격인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황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와 함께 마한 진왕의 승인을 받아 풍납.몽촌토성 등 백제초기의 궁궐터임을 증명하는 유적지와 당시 동진과 교류했던 증거들로써의 많은 동진시대 유물들이 출토된 사실이 증명하고 있듯이, 마한(한반도)지역의 한강변에 터를 잡고 있던 온조백제와 비류백제는 합류하게 되면서 갑자기 강성해진 백제는 근초고 황제부터 마한지역을 병합하며 명실상부한 한반도지역의 지배권을 갖게 된다. 이후 백제는 비류백제의 통한과도 관련된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단군조선의 번조선에 속했던 산동반도 등은 본래 동이족의 터전으로 백제가 진출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고 본다.

 
바다지역인 산동반도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 상나라는 무역에 뛰어났기 상나라고 한 것이며, 백제 또한 무역에 뛰어난 국가였다. 요서지역의 홍산문명을 계승한 우리 동이족은 남하하여 산동반도에 상(은)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그 유명한 공자가 바로 상나라 후손이다. 이 상나라 사람들이 또한 중국인들이 문자로 사용하는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를 개발했는데, 사실 산동지역의 갑골문자보다 오래된 갑골문자가 만주지역에서도 발굴되는데, 갑골문자는 바로 신시배달국 시대 동이족인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 배달국의 신지문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는 고대 산동반도의 동이나라 상나라의 왕족들은 거북의 뼈로 점을 쳤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등의 기록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소를 비롯한 육축을 사육하고 이를 관명으로 사용하였고, 군사가 있을...잡아 하늘에 제를 지내고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점을 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물(丘勿)단제때 단군조선의 국호가 되는 부여와 상나라의 친연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즉, 상나라는 단군조선의 나라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북상하여 중국의 시조가 되는 남방계 ‘하족’이 중원에 정착하기 전에는 본래 중국대륙 전역이 동이족의 활동지역이였고, 몽골.시베리아.만주.연해주.산동반도.한반도 등 북방지역은 동이족의 터전이였다. 단군조선(부여)의 적통을 계승한 고구려의 다물정신과 부여를 자처하는 백제의 집중적인 중국대륙 진출의 목적은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고토회복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백제의 정복군주 근초고 황제가 태자 근구수를 통하여 마한정벌에 군대를 파견한 왜왕에게 감사의 표시로 하사한 칠지도(왜왕의 위치=백제 태자의 위치에 불과한 백제 위성 국가에 불과했음을 칠지도에 기록된 내용이 증명하고 있다) .백제 근초고왕시대와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신공황후가 왜군을 한반도를 침략하여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과 신라를 정벌하고 점령한 한반도 남부지역을 백제에 선물로 주었다.”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인데, 이러한 내용은 연대도 360년이나 앞선 내용으로 온조백제초기인 온조왕 시대의 내용으로 연대적으로 벌써 모순이며, 당시 문화적으로나 정치.군사적으로도 미약했던 <왜>가 백제의 상국인양 기록된 것도 모순인 것이다.
 
일본 신공왕후와 관련된 임나일본부설의 역사적 사실은 근초고왕이 마한(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정벌할 때, 마치 미국이 이라크 파병을 한국에 요청한 것처럼, 백제가 왜에 요청한 왜군이 백제의 마한정벌에 참여한 내용이며,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적 유물은 근초고왕이 참여한 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왜왕에 하사한 ‘칠지도’다. 즉, ‘칠지도’에 표기된 핵심내용은 “제후왕에게 하사한다”는 ‘공공후왕’(功公) 이다. 칠지도를 하사한 존재도 근초고왕이 아니고, 근초고왕의 아들인 태자다. 즉, 당시 왜왕은 레벨상 백제 태자와 맞먹을 만큼 백제보다 국력이 낮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당시 왜는 백제의 왕족들이 파견되어 왜문명을 발전시킨 백제의 분국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또한 일본천황이 꽃을 바치는 것을 공화(功花)라고 하는데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 서기668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 땅의 백제 사람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써 끊어 졌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다 말인가?"하고 탄식했다. 일본의 백제사람들에게 백제는 본국이였다. 서기 670년 일본열도에서 백제인들은 일본이란 국호로 새로 태어난다. [일본서기] 등의 역사서 또한 대륙과 한반도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일본열도 중심의 역사관으로 수정편집한 나머지, 후대 일본 역사가들에게 혼란을 주고 [임나 일본부]설을 주장하는 등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한전(韓傳)]에는 마한 50여국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백제(온조백제)도 그 중의 1나라로 적혀 있다. [삼국지전-위지]에서 [韓]이란 마한을 총칭한 말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온조왕이 북쪽의 말갈과 동쪽의 낙랑 때문에 나랏일을 살필수 없어 한수 남쪽 하남 위례성으로 내려갔다... 온조의 신하가 한산 부아악으로 올라 갔을때 북으로는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큰 산이 막혀있고 서로는 대해가 닿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이 버이니, 이보다 좋은 천험의 요새는 없는듯 합니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위치상 명확히 “서로는 대해가 닿아있는”(중국대륙으로 해석하면 서쪽으로는 바다가 없음)서울의 한강를 나타내는 문헌내용 중 동쪽의 낙랑은 한반도 동북쪽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제후국 최씨 낙랑국을 의미한다. 자 그럼 온조백제가 터를 잡은 마한지역의 ‘하남 위례성’이 왜 한강변인지를 또한 고대 문헌내용을 통해서 검증해 보자.


[후한서 동이전조]에 “처음에 조선왕(하북성 창려에 수도를 두었던 번조선)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그 무리 수천인을 이끌고 해로로 달아나 마한을 쳐 이를 이기고 자립하여 한왕이라 하였다. 그 후 준왕의 후사는 끊기고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이며, 우리 나라 고서인 삼국유사 마한조에도 기록하기를 “위지에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이 궁인과 좌우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마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라 하였는데 이 여러 고문헌은 다 준왕이 쥐나인 위만에게 쫓기어 남쪽의 한(마한)의 땅에 와서 한왕이 되었다는 기사를 말하고 있다.  


단군3조선

번조선 준왕이 바다 건너 마한으로 도피




다만 [삼국지- 위지]에는 준왕이 남래하여 처음으로 마한국을 세웠다고 하였고 후한서에는 준왕이 남래하기 이전에 그 곳에는 이미 마한이 있었다고 한 점이 약 간 다른 점이다. 내용 중[해로를 따라, 바다를 건너]는 중국대륙에서 바다를 건넜다는 의미로 본래 단군의 3조선 중 ‘마한’에 해당하는 한반도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군3조선 중 한반도 지역에 속하는 ‘마한’에 대한 고대 중국문헌의 기록들을 가지고 중국대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오류를 민족사학자들이 간혹 보이고 있다.
 
중국대륙에도 한성과 위례성이 있다.
그것은 한반도 백제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여 지배한 지역에 지명을 정했다고 보아야 맞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지역명을 이동하거나 진출한 지역에 정했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여라는 지명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전통성을 지키기위해 백제인들이 떠나온 터전과 조상들을 의미하는 부여을 오래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주기위함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고대문헌들을 비교분석하면 온조백제가 터를 잡은 지역은 한반도 지역(수도는 한강이남 위례성)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도 서울 한강지역인 풍납동의 백제 풍납토성은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부]라는 한자가 기록된 유물을 비롯하여 다량으로 출토되는 3세기 중반 이후 백제초기 교류했던 서진(西晉)∼동진(東晋)대의 도자기류 등은 3세기 중국화폐인 오수전을 바탕으로 도안하여 새긴 오수전문(五銖錢文)도기들과 함께 궁성터와 연못 등 한신대 국사학과팀의 발굴작업을 통하여 초기 백제왕궁임이 명백한 유물들이 발굴된 바 있고, 흙으로 지은 토성이다.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했다.…(한)강 따라 둑을 쌓아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 당시 흙으로 쌓은 풍납토성은 본래 백제인들이 쌓은 성이라기 보다는 한반도 마한인들의 성을 비류백제가 온조백제와 합류하면서 강성해진 백제가 서해와 중국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인 한강을 수도로 정하면서 마한인들의 성을 초기
백제성으로 삼았거나, 당시 다수계층에 속한 마한인들의 축성법으로 쌓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들은 내용에 있어 초기 백제인들과 마한인들의 문화가 혼합된 상태였다고 추정된다.
 
또한, 황제가 승하할 때 표현하는 ‘붕어’라는 표지판이 기록된 공주 무녕왕릉 출토유물과 백제왕 ‘창’이라는 이름이 명확히 기록된 위덕왕의 유물이 부여에서 출토된 점이 또한 고고학적으로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출토되리라 확신한다.
 
 
땅속에서 출토되는 고대 유물들은 거짓없이 있는 그대로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유물도 신뢰하지 못하겠다면 역사연구할 자격도 없다 할 것이며, 자신들의 주관적 관념이며 고집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풍납동 토성발굴현장. 2008년 3월부터 그 동안 발굴비용과 지역민들과의 충돌문제로 중지된 발굴작업이 국립 문화재 연구소와 한신대 발굴팀에 의해 재개된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발견당시 국가의  수도성이 아니라, 개인의 성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밝혔으나, 수도성에 버금가는 엄청난 유물들과 유적지들이 발굴됨으로써 초기 온조백제의 수도성임이 드러났다.

풍납동 토성에서 발굴된 초기 백제유물 청동초두. 백제문화의 상징인 백제향로에서 보여주는 여성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청동초두 또한 백제향로처럼 제사용 용기가 아닌가  추정된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수막새-초기 백제시대 유물에는 다수인들이었던 마한문화의 흔적도 혼합되어 출토된 유물들고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역사적 인식를 전제로 해야 백제가 중국의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중원 깊숙이 진출했으며, 동아시아 해상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과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적통임을 내세우며 중국대륙의 패권을 두고 벌이는 고구려와 백제와의 치열한 전쟁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백제의 중원진출과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의 동성황제 편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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