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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9.2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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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무덤과 청룡언월도가 주는 역사적 암시 (2/2부)
관우의 무덤위치는 위나라(조조)와 오나라(손권)의 도읍 근처
 
성훈 컬럼니스트
 

 
지난 (1/2부)에서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에 천하무적의 장수로 묘사된 관우의 출신에 대해 알아보았다. 관우는 산서성 남부 운성시가 고향으로 원래 고구려 출신이었으나 죽을죄를 짓고 관헌의 추격을 받자 한나라로 망명해 유비와 장비를 만나 촉한(蜀漢)의 장수로 활약하다 오나라 장수 여몽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손권은 관우의 목을 베어 낙양에 있는 조조에게 보낸다. 조조는 관우의 목을 보고는 후히 장사지내라 명한다. 

이렇게 죽은 패장을 소설 <삼국연의>의 과장된 내용을 근거로 관왕신앙을 만들어 관제(關帝)로 모시며 천하무적의 군신(軍神)으로 조작한 명나라의 행위는 그야말로 역사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의 관우상을 진정한 동방의 군신인 치우천왕으로 교체해야 옳을 것이다. 

▲ 소설 <삼국연의>를 근거로 부풀려진 위.오.촉 삼국의 영토. 과연 이게 옳을까?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은 어디인가? 

관우의 묘에 대한 <중국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관우묘 : 삼국의 저명한 장령인 관우의 서열은 촉한 오호상장의 으뜸으로 서기 220년에 죽었다. 죽은 후 관우의 머리는 하남성 낙양에 장사지냈으며, 몸은 호북성 당양에 묻혔다. 현재 낙양과 당양에 각각 관우의 무덤이 있다. 민간에 전래되기를 “머리는 낙양을 베게 삼았고, 몸은 당양에 누워있으며, 혼은 산서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원문) 关羽墓 : 关羽是三国著名将领,位列蜀汉“五虎上将”之首,逝世于公元220年。关羽死后头葬在河南洛阳,身子葬在湖北当阳。现在洛阳、当阳各有一处关羽墓,民间盛传,关羽“头枕洛阳,身卧当阳,魂归山西。”
(주:관우의 혼이 산서성 해현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는 고구리로 돌아왔다는 의미)

그래서 관우의 무덤은 하남성 낙양에 있는 관우의 목 무덤인 관림(關林)과 호북성 당양에 있는 몸 무덤인 관릉(關陵)의 두 군데가 있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낙양은 당시 조조가 있던 곳으로 위나라의 도읍이고, 호북성 당양 부근에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建業)이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관림은 위 동영상 참조)
▲ 호북성 당양에 있는 관우의 몸 무덤인 관릉.  멀지 않은 곳에 적벽이 있어 오나라 도읍이 어디인지 알려주고 있다.

필자는 오나라 도읍인 건업을 호북성의 성도 무한(武漢) 또는 함령(咸寧)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조조가 유비와 손을 잡은 손권을 치기 위해 한수(漢水)를 타고 내려와 전투를 하려던 유명한 적벽(赤壁)이 있는데, 적벽 또한 당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사 <삼국지> 기록에는 오나라의 호구가 52만호 (약 230만명)라 했으므로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인구로 오나라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을 양자강 하류에 있는 지금의 남경(南京)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낙양에서 저 멀리 동남쪽 남경에 있는 손권을 치기 위해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호북성 적벽으로 올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지>를 읽다보면 위.오.촉이 서로 상당히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적벽전 전후의 상황을 보면 촉과 오나라가 서로 이웃집 드나들듯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호북성 부근에 도읍이 있던 오나라의 동쪽인 안휘성과 절강성 부근에 신라, 낙양에 있던 위나라의 동쪽 하남성과 산동성 부근에 백제, 그리고 황하 북쪽 산서성과 하북성 부근에 단군조선의 적장자인 고구리가 버티고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리사 초.략>에 기록에 따르면,
* 11대 동양대제(동천왕) 7년(233) 9월 손권이 사신을 보내어 “바치려(獻) 했던 금보전대를 공손연에게 빼앗겼으니 죽을죄를 면할 길 없다”고 하였다. 이에 제(帝)는 멀리에서 왔음을 보아 흡족해 하며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고, 손권에게는 초피와 갈계피 등을 내리면서(賜) “공손연은 사람됨이 뒤집기를 잘 하여 믿을 자 못된다.”고 일렀다. 나중에 들으니 공손연이 손권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위나라로 보냈다. (이하생략)
(삼국사기에는 고구리가 손권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위로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8년(234) 4월, 조예(조조의 손자)가 사신을 보내어 병서.보검.옥침대 등을 바치며(獻) 함께 공손연을 멸하고 오나라를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 10년(236) 2월에 “오나라 손권의 사신이 찾아와 배알하며 화친을 청하였는데 그 언사가 심히 방자하고 그 예물 또한 야박하여 사신을 옥에 가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외국의 사신을 함부로 옥에 가둘 수 있는 고구리의 위상을 어찌 보아야 하는가?
* 12년(238) “위나라의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와서는 함께 공손연을 멸하자고 청하여 5천 군사를 보내 8월에 공손연을 멸했는데, 8월에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 방자해져 임금이 노하여 교통을 끊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나라의 최고실권자에게 임의대로 절교를 선언할 수 있는 고구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6년(242) 5월 임금이 직접 10만 군사를 이끌고 서안평(西安平)을 쳐 빼앗았다. 이것이 안평대전(安平大戰)이다.”는 기록이 있다. 서안평은 위나라와 고구려가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18년(244) 위나라 관구검이 현토에 침입하여 노략질하기에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나가 크게 이기고 3천여 수급을 베었고 이를 비수대전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19년(245년)에는 위나라 관구검에게 환도성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당하지만, 헌상(獻) 하사(賜) 등의 사용용어나 사신을 가두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고구리는 위.오.촉보다 우월적 위치에서 하대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고구리.백제.신라의 역사강역을 대륙에서 지우기 위해 명나라 때 각색된 것이 바로 나관중의 과대망상소설인 <삼국연의>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이 소설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역사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역사의 진실을 바로 찾아 일제의 식민사관을 과감히 떨쳐내고 중국의 동북공정을 극복하여 새롭게 우리민족의 웅대했던 대륙역사를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 대륙 동쪽에 있던 고구리.백제.신라를 지우기 위해 각색된 소설 <삼국연의>. 아이러니하게도 그 주인공인 관우가 역사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관우의 두 무덤이 있는 곳이 각각 위나라와 오나라의 도읍 근처이다.     

관우의 청룡언월도에 숨어있는 암시  

소설 <삼국연의>에 나오는 관우의 심벌(상징)은 긴 수염과 82근이나 나가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이다. 실제로 관우는 그 무기를 사용했을까? 
정사 <삼국지>나 다른 사서에 관우가 사용한 무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정사 <삼국지>에 2군데 간단한 언급이 있다.
첫째 관우가 안량을 죽일 때 찔러 죽였다는 기록이고,
둘째 노숙과의 만남에서 칼(刀)을 들고 일어섰다는 대목이다.
또한 남조 양나라의 도홍경이 저술한 <고금도금록>에는 “관우가 몸소 도산의 철을 캐서 칼(刀) 두 자루를 만들고 "만인적(萬人敵)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전투에 패하여 그는 칼(刀)을 아끼는 마음에 물속에 던졌다."라는 기록이 있어 관우의 주 무기는 청룡언월도가 아니라 칼(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병기사고>에 "한나라 때는 극(戟)의 제작이 성행하였고, 모(矛)가 그 다음 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연의>에서 여포가 썼다는 방천화극(方天畵戟)과 장비가 썼다는 장팔사모(丈八蛇矛)가 유명하다. <후한서>나 <삼국지>에도 긴 자루가 달린 대도(大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한나라 유적지에서도 대도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다.  

중국에서 언월도(偃月刀)가 등장하는 것은 송나라 때부터이며, 북방민족의 무기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관중이 소설 <삼국연의>를 쓰면서 관우에게 청룡언월도를 쥐어준 것은 그가 북방민족 즉 고구리 출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언월도뿐만 아니라 청룡(靑龍)은 동쪽의 수호신으로 동이(東夷) 즉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방천화극을 든 여포가 쌍칼을 든 유비, 장팔사모를 든 장비,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 3명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무용 자체로만 본다면 관우는 여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역사복원신문
▲ 관우의 청룡언월도는 당시에는 없던 무기이고, 송나라 때부터 북방민족의 무기로 소개되고 있다. 나관중이 관우는 북방민족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2/03/07 [14:03]  최종편집: ⓒ 런던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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