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 통일한국의 미래 찾는다!

윤명철 교수 | 입력 : 2008/05/04 [14:20]
▲ 유목민족 고구려 수렵도
고구려는 21세기에 당면한 민족문제의 대응방법론을 모색하고 설정하는데 참고해야할 모델이다. 고구려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동아시아 역학관계의 기본틀을 이해할 수가 있다. 현재 세계의 각국들은 군사동맹 외에도 나름대로 ec(유럽공동체) eu(유럽연합) nafta(북미자유협정) asean 등 국가간의 결합을 매개로 광범위한 블록화를 추진하고 있다. 소위 유사한 문명권, 종족, 지역을 중심으로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自集團主義를 실현하고 한다. ghassan salame는 地域化는 새로운 영향권 형성을 위한 완곡한 위장술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최근에는 미국이 초강대국을 선언하고 있고, 유럽은 eu(유럽연합)를 넘어서 합중국을 지향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동아시아 지역 역시 자국의 이익을 최고목적으로 삼고 각국 간의 역학관계와 위치조정을 숨가쁘게 조정하고 있다. 아시아는 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을 필두로 해서 급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제 성년이 된 아시아는 세계최고라는 꿈을 꾸고 있다."라는 마이클 블라오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말레이지아 국제전략연구소장인 noordin sopiee는 동아시아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서기 2000년이 되면 동아시아의 gnp가 북미나 서유럽보다 커질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계가 황인종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도록 세계를 설득해야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곳에서 말하는 동아시아는 현재 동남아를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소위 동아시아의 핵, 동아지중해 국가들은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군사적인 역할과 영향력, 경제력의 향상과 체제의 개편, 정치적인 영향력의 확대 등 많은 면에서 서로 간에 경쟁을 하거나 갈등을 빚고 있다.

▲   하북성을 통과하며 산서성 태원까지 쳐 들어가는 고구려-북방 유목민족들의 맹주였던 고구려에게 중국대륙과 한반도라는 지역은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는 공간이였다. 그리고 중국대륙과 한반도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쉬운 위치로써 고구려의 중심지역은 소서노세력과 함께 고추모의 초기 수도로 삼았던 만주 집안 골본성이후 고토회복차원과 함께 이전한 고구려의 발원지에 해당하는 하북성 난하(고구려의 조상들인 고리국의 발원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고리국의 왕손 출신이다)지역으로  추정된다.[편집자 주]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근의 사태에서 보듯이 세계 여타의 강력한 블록에 대응하기 위해
서도 협력체 내지 내지 블록을 결성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즉 갈등과 경쟁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는 협력과 동맹의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갈등을 계속해온 각 나라들은 물리지 않은 의심과 긴장의 시선으로 상대국을 바라보았다. 특히 한국전쟁의 군사적인 충돌 이후에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아직은 정치적인 것 보다는 경제나 교역, 문화교류 등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보다 실질적인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조심스레 협력체의 결성과 파트너쉽의 가능성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좀더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협력체제로 갖추기 위해서는 각국들은 서로간의 역사적 경험을 이해하고, 어떠한 역할분담이 가장 바람직한가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주변국들에 비하여 정치 군사 경제 문화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 속에 있다. 그러므로 역학관계의 본질을 신속하고 정확히 파악해서 능동적으로 질서재편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러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고구려가 발전했던 당시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地政學的 要因에 큰 변화가 없으므로 북방의 유목종족, 중국, 우리와 일본이라는 4각의 기본적인 구도와 정치적인 역학관계에는 거의 변함이 없다. 다만 일본이 7세기 이전까지는 우리의 영향을 받는 종속적인 존재였고, 고구려의 발전기에 중국은 南北朝로 분단되어 있었던 반면 현재는 우리가 분단된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중국은 동아시아의 강력한 중심부였고, 패권을 오랫동안 장악해왔다.

▲ 아시아의 강국 - 고구려
이러한 기본구도 속에서 고구려는 자기의 대응방식을 갖고 발전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이 되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중국세력과 대등하게 관계를 맺고, 때로는 외교적으로 주도권을 쥐었으며, 상당기간 동안 전면전을 치룬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는 고구려의 정치체제와 외교전략, 경제체제 및 주변국에 대한 문화정책, 군사전략 등에 대한 기본패턴을 이해하므로써 현재는 물론 향후 전개될 질서재편의 방향과 내용을 예측할수 있다. 또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교훈을 얻을수 있다.

필자는 좀더 구체적으로 고구려가 추진한 정책을 東亞地中海 中核調整論이라고 설정하고 그것을 모델로 하여 동아시아의 기본구도와 함께 향후 우리민족의 위치와 역할을 모색하고자 한다.  

< 동아지중해론>

먼저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자.

주목하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동아시아의 각국들은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여러 군도들에 둘러싸인 황해 남해 동해 동중국해 등을 포함하고 있어 지중해적 형태와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소위 역동적인 동북아경제권(dynamic north-east asian economies)은 동아시아에서도 중심부인 동아지중해 지역이 된다. 따라서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동아지중해(eastasian-mediterrean-sea)라고 명명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모델로 삼은 것이다.

지중해는 나름대로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데 해양문화의 성격을 구비하
고 있는 만큼 이동성(mobility)이 강하다. 각 나라들이 내해(inland-sea)를 공유하고, 긴 연안이 여러나라로 갈라져 있으므로 국경이 불분명하고 변화가 심하다. 때문에 해역지배권(海域支配權)의 대립을 둘러싸고 국가간의 다툼이 벌어지며, 해양력(sea-power)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또한 지중해는 정치 군사적인 것 보다는 교역 문화 등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는 완전한 의미의 지중해는 아니지만 바로 多國間地中海(multinational-mediterrean-sea)의 형태로서 모든 나라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동아시아는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공존하며 협력해야할 단계에 이르렀다. 동아시아가 협력체 내지 연합체, 불록, 혹은 그 이상을 구성한다면 해양을 매개로한 지중해적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유럽지중해와 카리브 및 걸프지중해, 동남아지중해 등과 경쟁하고 대결하는 동아지중해의 형성이 절실한 것이다. 최근에 일본의 학계에서 지중해이론을 제기하며 21세기 일본의 앞날을 조망하고자하는 시도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면 이러한 지중해적 질서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떻게 설정하며,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까? 남북통일은 불투명하며, 주변국의 방해로 인하여 民族力의 결집 또한 매우 어렵다. 남북통일이 이루진다해도 향후에 경제 정치 군사력이 주변강국들에 비해 열세를 면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회의적인 처지이다. 그러나 신질서가 편성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하나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 고구려 최대 전성기 시대인 광개토태왕시절를 비롯하여 고구려가 점유한 영역은 토곡혼(티벳)과 양자강 등 중국 동남부 지역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지배했던 고구려는 고추모 시절 소서노 세력이 존재한 만주 집안의 골본성에 잠시 터를 잡았다가 이후 고구려의 조상들의 터전인 하북성 난하지역(고구려의 발원지=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이 위치)으로 수도를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한단고기]에 "요동성은 오늘의 창려성"으로 주해하고 있다.  북한 덕흥리 고분 (고구려 유주자사 진 묘비=유주자사 진의 고향이 평안도로 보인다)에서 발견된 위 그림은 중국 하북성과 산서성 등 13개 지역을 통치하는 태수들을 관리했던 유주자사 진의 관할지역을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가 통치한 영역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하겠다. 아마도 아시아 전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단군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고추모의 다물정신을 실현한 고구려인들의 의지와 강인성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편집자 주]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동아지중해의 中核(core)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분단시대, 냉

전시대에는 적대적인 양대 힘이 격돌할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요인으로서, 스스로 풀
어버릴 수 없는 굴레가 씌워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연결과 협력의 시대이다. 남북이 긍정적으로 통일될 경우,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공히 활용하며,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 전체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특히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연결하는 해양 네트워크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다. 우리 바다를 통해서만이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안심하고 본격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 이러한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와 한반도의 중핵 조정지로서의 바람직한 역할과 가능성을 우리는 지나간 고구려의 역사를 통해서 가늠할 수 있다. 고구려가 진정으로 발전한 이유는 강력한 군사력을 뒷받침할 경제력 문화력은 물론 국제정치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바로 해양활동이 활발하였고, 해양을 장악하므로써 주변국들간의 외교망을 통제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국제정치에 해양력(sea-power)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해양전략은 이미 3세기 전반부터 위(魏)와 오(吳)의 갈등을 이용하면서 사용하였으나, 4세기를 거쳐 5세기경에 이르러 광개토대왕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국제전략으로 채택하고, 지중해적 국가로서 발돋움 하였다. 즉 대륙의 동 서 북으로 팽창하여 만주지방을 완전히 석권하고, 남으로 과감하게 진출하여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지역까지 국가전략수립의 영향권하에 두었다. 뿐만 아니라 동해는 물론이지만 해양력을 바탕으로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장수왕 시대에는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중부지방은 소백산맥의 이남, 동으로는 포항 근처의 흥해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 해양을 한 틀속에 넣고 조정할수 있는 동아시아의 완전한 中核자리를 확보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질서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그 전 시대처럼 몇 개의 線이 중간국가를 경유하여 평면적으로 연결되는 외교형태가 아니라 다수의 선이 동시에 연결되는 다중 방사상(多重放射狀) 혹은 다핵방사상(多核放射狀)형태로 되었다. 즉 분단된 南北朝(상해와 북경), 북방의 柔然(러시아,몽골), 그리고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동등한 中心核이 되고, 백제 신라 가야 왜 거란 말갈 등 주변국들은 서로간에 교섭을 갖게되었다. 지금의 구도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과거에는 중국이 분단되었고, 지금은 우리가 분단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면서 각국들의 교섭을 관리(管理)하고, 통제(統制)하고, 조정(調整)했다. 백제 신라 가야,왜 등이 북중국정권(현 북경)과 교섭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때로는 남조정권과의 교섭마져 막았다. 뿐만 아니라 해양통로(海洋通路)의 확보(確保)를 잇점으로 분단된 중국세력들(북경, 상해)간의 복합적인 갈등을 등거리 해양외교(等距離 海洋外交)로서 적절히 이용했다. 통일된 나라가 분단국가를 대상으로 등거리 외교를 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 후에 고구려는 경기만을 상실하는 등 해양력이 약화되므로써 정치군사력은 물론 교력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중핵조정 역할을 상실하였다. 그 후 7세기에 벌어진 소위 東亞地中海 國際大戰의 결과로 인하여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실패하였다. 결국은 고립된 채 주변국들의 협공을 받아 역사의 무대에서 탈락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흥망은 동아지중해의 성격과 유용성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알려주고 있다.

한편 동아시아의 입장에서도 고구려의 역할은 향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효한 모델 이 된다. 21세기의 신질서 속에서 동아시아는 협력이든 동맹, 혹은 그 보다 더 강고한 형태로의 결속이 필요하다. 다른 지역에 대응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내부간의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연적이다. 이때 그 동안의 역사적 경험이나 地政學的 조건, 地經學的 조건, 地文化的 조건, 그리고 현실적인 필요로 보아 그 결속의 공통분모로서는 해양을 매개로한 동아지중해적 형태가 가장 유효하다.

그런데 이 결속은 국가들의 단순한 지리적, 물리적 연합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일정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국가들 간에는 철저한 힘의 균형(均衡-balance of power)이 필요하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국력이 현저히 약하면 종속되거나 주변부화될 우려가 있다. 반대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 힘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면 패권국가를 지향하거나 맹주(盟主)로서의 유혹을 느낀다. 동일한 민족 내부에서도 지역 간의 갈등, 계급간의 차별과 모순이 있게 마련이므로, 신 협력체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일어날 가능성은 다분하다. 그러므로 구성되는 첫 단계에서부터 내부 소단위인 기존의 국가들은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큰 단위인 동아시아의 안녕과 존속,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앙금과 균열이 있는 단위가 다른 단위와 효율적으로 경쟁할 수는 없다.

고구려가 중핵조정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그 시대에 동아시아에 평화구도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다른 2개의 힘, 즉 중국세력과 북방세력에 비하여 힘이나 문화 경제 등에서 대등하였기 때문이다. 중간에 있는 힘이 약할 경우에는 조정역할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향후 신동아시아 질서에서 중핵조정역할을 해야만 하는 우리는 남북통일이 되어야 능력을 갖추고 균형축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동아시아는 견제와 균형속에서 평화와 협력구도를 연출할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주변국가들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하면서 실제로 우리의 통일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도와 주도록 설득해야한다.

둘째, 신 질서는 각 국가들간의 역할분담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협력체의 결성은 자연환경에 걸맞게 역사적 경험과 문화, 구성원들의 능력과 지향성, 군사적인 능력과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형태를 고려하여 갈등이나 경쟁 등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하고, 분업과 상호협조로서 시너지(相生)효과를 창출시킬수 있도록 해야한다. 다행하게도 현대의 동아지중해 삼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문화 지리 군사력 정치체제 경제체제 등이 차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랜 역사속에서 형성된 공질성(共質性)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필요충분조건(必要充分條件)을 서로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호보완성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는 발전단계와 양식이 다르므로 결합하면 강력한 힘을 지닌 하나의 단일경제공동체가 완성될 수 있다. 중국이 주장했던 d-n-u (d는 선진일본, n은 신흥 한국,u는 중국 북한) 즉 횡향연합(橫向聯合)은 한반도의 그러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그러한 단계를 뛰어넘은 것 같다. 아시아의 거인인 중국은 경제규모가 현재의 보통 추세대로 한다면 21세기 중반에는 7배나 확대되어 규모면에서 미국과 겨루게 될 것이며, 만약 낙관적인 고도성장을 할 경우에는 현재의 11배로 확대되어 세계최대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고구려는 매우 독특한 자연환경 속에서 중국세력, 북방세력과는 다른 체제를 유지하며, 동이시아 역사형성에 역할분담을 하여 왔다. 경제적으로는 말 초피(貂皮) 등 북방의 산물을 중국지역이나 남방에 수출하고 반대로 남방의 물품들을 북방으로 수출하는 중계무역 등을 하였다. 해양로와 육상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물류체계(物流體系)를 원(circle)으로서 연결시켰다. 문화적으로는 영역 내부에 농경문화 해양문화 초원유목문화 수렵삼림문화 등을 공유하고 발전시켰으므로 서로 다른 문화들을 수용하여 충격을 흡수하면서 발전시키거나 전달할수 있었다. 동이시아 문화가 생동감있고, 정체성(停滯性)을 띄지않고, 환류(環流)시스템과 균형감(均衡感)을 유지한 것은 고구려문화의 역할이 크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핵에서 균형과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동아의 평화구도를 만들었고, 물류체계(物流體系)와 文化體系의 거점 내지 중계로 역할을 하였다.

21세기의 신질서 속에서 통일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동아시아 각국은 이해가 잘 조정된 협력체 내지 공동체를 구성하여 세계사속에서 東亞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입지는 더욱 중요해진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열세에 놓여있는 한반도는 통일을 한 후에 고구려처럼 지리적으로 중핵에 있는 조건을 잘 활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문화 군사적으로 조정역할을 하면서 정당한 자기 위치를 확보해야만 한다. 더욱이 정치 문화 경제 사상 등 모든 면에서 극단적인, 20세기 구질서(냉전질서)의 양극단인 남과 북이 만나 이루어졌으므로 적지않은 차별과 충격을 흡수하고, 대립과 갈등 등을 조정하면서 역할분담을 유효하게 할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살아있는 역사로서 21세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절박한 메세지를 전달해준다. 통일한국이 활발한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적 인식을 토대로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을 유리하게 주도하고, 동아지중해의 중핵조정 역할을 수행한다면 우리 민족은 21세기를 보다 긍정적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더불어 동아시아도 지구라는 거대한 단위 속에서 영향력있는 중간단위가 될 수 있다.

민족통일의 모델과 고구려  

고구려는 그 밖에도 우리에게 닥친 여러가지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임새있는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통일에 대한 고구려적인 접근방식과 그것이 실패한 과정, 멸망과 그것이 가져온 결과와 역사적의의 등은 21세기를 맞이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난 현시기에 민족모두가 지향하고 있고, 당위의 문제로서 접근하고 있는 통일에 대하여 매우 쓰임새 있는 교훈을 제공해준다.

한단고기 등 각 종 문헌들과 고고학적 근거를 통해 본 고구려의 직간접적인 지배권이 미친 광역도[편집자]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고구려는 끝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멸망한 나라이다. 물론 실패한 역사는 아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이 정치하던 무렵인 5세기의 고구려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북방과 서방으로 영토를 확장하였고, 주변 종족들에 대한 통제력도 지니고 있었으며, 自國內의 신민으로 편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으며, 신라는 강력한 정치적인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이 시대는 북방전선에서 긴장이 완화되었던 만치 군사력을 남으로 전면배치하여 공격을 하였다면 통일의 가능성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적어도 사료를 보면 고구려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은 별로 없다. 왜 그랬을까?

통일의식이 없었을까? 한 민족 아니면 한 종족이라는 인식이 없었을까?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 등은 一統三韓 三韓一家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정당성이 결여된 행위가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치장하기 위하여 후에 명분으로 선택한 용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사료를 그대로 신뢰한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은 하나의 종족 내지 文化共同體라는 의식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인식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唐 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周以封箕子爲朝鮮,漢分置三國, 謂玄 樂浪帶方(北帶方)라고 하였으며, 帝王韻紀 권 下에는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皆檀君之壽也. 또 같은책 [漢四郡及列國紀]에는 --三韓各有幾州縣---數餘七十何足徵,於中何者是大國,先以扶餘沸流稱,次有尸羅與高禮 南北沃沮穢貊부---世系亦自檀君承라고 하였다.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濊傳에는 濊及沃沮 句驪本皆朝鮮之地也.라하여 중국인들이 인식도 대체로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사서에는 열전 동이전에 삼국을 다 같이 언급하고 있어 적어도 그들에게는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인식되었음이 확실하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동일한 조상에서 출발했고, 동명신앙이라는 공동의 시조를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 {魏書}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北史}에서도 백제는 색이국(索離國)의 東明으로부터 나왔다고 하고 있다. 결국 三國 내지 四國은 서로를 동아시아의 다른 종족들과는 다른 관계라고 구성원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를 분점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결국은 신라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증명하는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 관련 유물-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제후국이라는 의미의 동이매금(충북 중원 고구려비 기록)으로 고구려에 의해 칭해질 만큼 고구려의 속국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왜 전성기에 四國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당시 고구려의 지배방식이나 통치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가한 것일 수도 있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는 달리 삶의 터전도 농토만이 아니고, 삶의 양식도 농경문화의 그것이 아니다. 국가의 성립과정과 발전과정에서 많이 나타나지만 영토와 주민을 지배하는 방식도 백제 신라 같은 농경위주의 나라들과는 다르다. 정복국가와 유목종족들의 지배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고구려 역시 직접통치(直接統治) 외에 간접통치(間接統治)나 영향력(影響力)을 확대(擴大)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종족내부의 질서를 느슨한 형태의 간접지배나 영향력확대라는 수준에서 접근한 것은 아닐까하는 가능성도 고려해본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서 보이는 용어와 그 곳에 담겨진 인식들은 나름대로 천하의식을 지니고, 역사공동체의 대표자라는 인식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그러한 시도마져 하지 않았다면 당시 고구려인들은 민족의 시대적 책무를 게을리 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가 통일하지 못했고, 민족간의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신라가 자구책으로 추진한 외세의 참여로 인하여 강제적 통일(强制的統一)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고, 오늘날까지 답습해 내려온 불행의 씨를 잉태하였다. 고구려로서는 전성기에 북방 종족들과의 대결구도보다는 같은 종족의 통일을 이루는데 비중을 두었어야 했다. 지배방식이나 통일방식 또한 현실과 지역에 걸맞는 방식을 취했어야 했다. 결국 한 집단의 운명은 동일한 역사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시기를 잘 선택하는데서 결정되는 것이다.

▲  고구려의 한반도 지배을 상징하는 충북 중원 고구려비
고구려는 멸망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의미있는 모델이 될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원인을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세력과 무모한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패망했다는 의식(이러한 의식은 발해의 高王인 大祚榮의 작은 아들, 즉 武王의 동생인 大文藝가 발해와 갈등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을 바탕으로한 비판이 있다. 또 고구려의 내부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독재정치를 해서 내부의 균열이 생기고, 그가 죽은 후에는 형제들 간에 권력쟁탈전이 일어나 결국은 패망했다는 비판이다. 위만조선이 한나라와의 전쟁을 1년간 계속하다가 패배한 것도 그렇게 돌리고 있다. 물론 내부분열때문이라는 이러한 주장은 패망의 한 원인이 될 수있으나 중요한 인자(因子)가 되지는 않는다.

▲ 고구려 살수개첩도
고구려와 중국세력간의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동아시아의 서쪽에서 수백년 만에 분단된 중국을 통일한 수.당(隋.唐)과 동아시아의 동쪽에서 이미 600여년이상을 발전해온 고구려가 대결한 것은 국제환경과 역학관계의 피할수 없는 산물이었다. 東아시아의 종주권(宗主權)과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의 교역권(交易圈)을 둘러싸고 양 세력은 전면전을 벌였으며, 주변의 국가와 종족들이 참여하는 국제대전으로 확대되었다. 고구려 내부의 세력들은 다양한 대응정책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고,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고구려는 통일된 중국세력과 598년부터 659년까지 전면전과 국지전을 벌이면서 국제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660년에 백제가 급습당하면서 멸망하자, 신라와 당의 협공(挾攻)을 받으면서 다시 8년을 버텼다. 이러한 전쟁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고려한다면 고구려의 멸망은 정권내부의 분열 때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국력의 약화와 국토의 황폐화, 인민의 희생 등은 일반적인 전쟁의 기본요인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요인으로서 단기적으로는 신라와 당의 협공이었고, 장기적으로는 당시의 국제질서(國際秩序)를 인식(認識)하고, 활용(活用)하는 전략(戰略)에서 문제점(問題點)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 전쟁은 분명히 배경이나 전개과정, 결과 등을 놓고볼 때 분명히 동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역시 국제질서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중국세력의 잠재적(潛在的)인 가상적국(假想敵國)이지만,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는 우군(友軍)으로 변신하여 고구려에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북방세력을 동맹국으로 삼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국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작업을 소홀히 하였으며, 실패했다.  

* 윤명철(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해양문화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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