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거물급 리더의 비상

김지호 | 입력 : 2013/11/07 [03:33]

지난 9월 독일 총선에서 기민-기사당(CDU-CSU)연합은, 비록 과반에서 5석이 모자라지만, 311석이라는 기록적인 의석을 획득했다. 이는 독일 국민들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에 대해 압도적인 지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메르켈 총리는 연정을 통해야 하지만 3선 연임을 무난히 달성하면서, 전후 초대총리 아데나워와 독일의 통일을 달성한 콜 총리에 버금가는 거물 정치인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경제력(2012년 국내총생산-GDP 3조4천억달러, 일인당 국민소득 4만4천달러)이 그 어느 때보다 유럽에서 가장 막강해진 독일에 강력한 거물급 리더가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로존의 국가들은 내심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이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하게 긴축을 강요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유력 일간지 타 네아(TA NEA)지는 왕관을 쓴 합성사진과 함께 ‘긴축 여왕의 승리’ 라는 제목으로 공포감을 드러냈다. 스페인의 엘 문도(El Mundo)지는 나치시대에 부르던 국가 ‘그 누구보다 최고인 독일 (Deutschland über alles)’를 빗대 ‘메르켈, 메르켈, 위버 알레스’ 라는 헤드라인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이는 독일인들의 메르켈 총리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가 “독일인들의 세금을 다른 나라에 마구 퍼 줄 수는 없다”며 자국의 이해를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선시 해 온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그 결과 독일은 유로존 금융 위기 중에도 실업률은 6%대를 유지해오고 있고 경상수지 흑자가 불어나면서 재정도 점점 더 탄탄해지고 있다.

 

독일판 철의 여인

 

2000년 초반만해도 독일의 경제는 통일의 후유증으로 실업이 증가하면서 경기침체를 겪었다. 당시 사회민주당(SPD)의 슈뢰더 총리는 ‘하르츠 개혁’으로 알려진 ‘아젠다 2010’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노동시장의 규제를 완화하고 과다한 사회복지 시스템을 정비하고자 했지만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각했다. 이어서 2005년 기민당(CDU) 의장으로서 메리켈이 최초로 여성총리가 된 이 후 독일은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이유로 종종 그녀는 ‘독일판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영국의 경제를 살린 대처 수상과 비교되기도 한다. 메르켈 자신은 이러한 비교를 몹시 싫어하지만, 실제로 여러 정치적 행적들도 대처 수상과 흡사하다. 시골 출신의 경계인으로서 정계 거물에 의해 구색을 맞추기 위해 발탁되어 최단 기간에 중심부로 진입한 후, 정치적 대부에게 가차없이 칼을 꽂고 정상을 차지한 정치행보가 대처 수상과 닮은 꼴이다. 메르켈은 서독이었던 함부르그에서 태어났지만 몇 주 후에 동독으로 이주한 아버지에 의해 템프린(Templin)이라는 베를린 인근 시골 마을에서 자란 그녀는 양자화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1989년 동독 민주화운동 단체인 ‘민주개혁’에 참여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통독 이후인 1990년 민주개혁이 기민당에 통합되면서 메르켈은 기민당원이 된다. 당시 콜 수상은 첫 통일내각에 통합의 상징으로 기용할 조용한 동독출신 여성 정치인을 찾고 있었고, 메르켈은 동독 기민당 출신으로서 동독의 마지막 총리를 지낸 마이지애르의 추천으로 발탁되어 여성부 장관이 된다. 이후 콜 총리는 그녀를 ‘나의 소녀’이라고 부르며 총애했고 그녀는 콜 총리의 정치적 양녀가 되어 승승장구한다. 1999년 콜총리가 기부금의 비자금 유용 스캔들에 휩싸이자 얌전했던 그녀는 유력 일간지 1면에 ‘콜이 기민당에 큰 피해를 주다’라는 제목으로 콜 총리를 비난하면서 사임을 요구하는 글을 게재하여 동료들을 충격에 빠트린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부각시킨 메르켈은 이듬해인 2000년 기민당 의장이 되고 5년 후인 2005년 첫 여성 총리가 된다. 대처 총리도 자신을 발탁해서 키워준 히스 총리가 총선 실패로 곤경에 처하자, 도전장을 내밀고 당권을 장악한 후 4년 후 첫 여성 총리가 되었었다.

 

메르켈 리더십의 두 얼굴

 

대다수 독일인들에게 그녀는 소신은 강하지만 겸손하고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각인되어 ‘무티(엄마)’라는 애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 수상의 수석 참모를 지내면서 메르켈 총리를 잘 알게 되었었다는 조나단 파월씨는 온화한 이미지 속에 가려진 그녀의 실체는 무자비한 정치 공작가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기민당 내의 정적들을 마키아벨리적으로 단칼에 제거해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그녀에 대한 안팍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특히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남부 유로존 국가들에게는 가혹한 긴축을 요구하며 무관용으로 대처하는 그녀가 ‘노! 라고만 하는 여자’로 불리며, 경제력을 앞세워 유럽을 지배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월가의 큰손인 조지 소로스는 지난 날 전후의 독일이 미국의 유럽 부흥 계획인 마셜플랜에서 혜택을 입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독일이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면 EU는 해체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실 유로의 단일 통화 체계로 가장 큰 혜택을 본 나라는 독일이다. 단일 통화체계로 독일의 수출시장은 자연스레 대륙에서 확대되었다. 또한 독일은 높은 신용을 바탕으로 저금리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 신용이 경색된 유로존 국가들은 통화정책을 자국의 사정에 맞춰 마음대로 운용할 수도 없어 고금리로 필요자금을 차입할 수 밖에 없고 이는 부채의 증가로 이어졌다. 독일이 단일 통화의 과실은 대부분 가져 갔는데 비해 고통의 분담에는 인색하다는 것이다.

 

좌우 대연정으로 일부 정책 수정 불가피  

 

메르켈 총리의 기민-기사당의 압승에 최대의 피해자는 연합정권을 구성했던 자유민주당(FDP)이라고 할 수 있다. 연정 파트너였던 기민-기사당에게 대부분의 지지층을 흡수당하고 5%의 최소 지지율 확보에 실패해 의석 없는 정당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파트너 당의 성공이 오히려 자신에겐 독배가 된 셈이다. 이는 메르켈 자신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자민당과의 보수 연합이 무너지고 정책의 차이가 확연한 사회민주당(SPD)이나 녹색당 등 좌파정당과의 연정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정당들이 연정의 조건으로 정책과 각료인선에 많은 양보를 요구하고 있어 협상이 쉽게 타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기민-기사당 연합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부 정책은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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