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격전지에 걸렸던 여왕즉위 축하행사 현수막, 왕립포병박물관에 기증

런던타임즈 | 입력 : 2014/05/14 [11:37]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진룡)는 한국전쟁 당시, 참전 영국군의 여왕 즉위행사에 쓰였던 현수막(배너)을 런던 울위치(Woolwich)에 있는 왕립포병박물관(Royal Artillery Museum)에 기증한다.

이 현수막은 영국 포병연대 통신병으로 참전 중이던 덕 레이랜드(Doug Leyland)씨가 엘리자베스2세 여왕 즉위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전투 중 틈틈이 시간을 내어 그린 것으로 1953년 6월 2일에 기념행사 때 포병연대(연천군 삼화리)에 걸렸던 것이다. 이후 영국으로 가져갔다가 2013년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려던 것을 고미술수집가 김영준(시간여행 대표)씨가 구입해 문화체육관광부에 기증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영국군의 희생과 영국민들의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현수막을 영국 왕립포병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왕실포병박물관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 하나로 1820년도에 지어졌으며, 크진 않지만 한국전쟁 전시공간을 가지고 있다. 박물관 측은 이번 현수막 기증을 계기로, 그동안 냉전(Cold War) 전시 공간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던 한국 전시공간을 확대 개편해 현수막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상영하는 장소를 새로 마련하고, 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확대한다고 밝혔다. 냉전 전시공간의 이름도 한국전쟁(Korean War)으로 바뀐다.

기증행사는 2014년 5월13일 오전 11시부터 왕실포병박물관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임성남 주영대사가 한국을 대표해 왕실포병대를 대표하는 티모시 그랜빌 채프만(Sir Timothy John Granville-Chapman GBE) 장군에게 전달한다. 채프만 장군은 왕실 포병대 최고책임자(Master Gunner)이자 왕실포병대의 여왕 대리인으로 현역 4성 장군이다.

그 외 당시 현수막이 걸렸던 부대의 실무 지휘관이자 한국전쟁 역사가인 브라이언 패릿(Brigadier Brian Parritt) 장군, 현수막을 그린 덕 레이랜드(Doug Leyland)씨, 행사 당일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한 Harris 소령(뒤의 스토리 참고)의 가족들, 김갑수 주영한국문화원장 등이 참석한다.

현수막을 구입해 기증한 김영준 대표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해외에서 하는 행사에 초청받을 만큼 큰일을 하지 않았다”며 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내왔다.

1953년 6월 전쟁터에서의 여왕 즉위식 축하행사 이야기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2일, 영국군은 영연방 소속 부대 본부가 있는 마전리(경기도 포천)에서 여왕(현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즉위 축하 행사를 갖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왕립포병대의 20연대(20th Field Regiment of the Royal Artillery)는 격전지인 최전방에 배치되어 적과 대치되어 있기 때문에 마전리까지 갈 수 없어 그들만의 행사를 기획하게 된다.

5월부터 진행된 행사준비는 후크고지 전투(The Third Battle of the Hook)라고 불리는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후크라고 불리는 지역은 휴전선 근처의 사미천 계곡 인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서울까지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중국은 휴전협정 전에 이 지역을 차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왕립포병대는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하룻밤에 무려 37,000개의 포탄을 쏘아대며 그들을 저지했으며, 몇몇 포는 하루에 2,000개나 되는 포탄을 쏘아대 포신이 빨갛게 달구어질 정도였다. 5월28일까지 계속된 격전 탓에 행사를 준비하는 포병들은 하루 사이에 포신을 모두 청소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이 지역은 현재 모두 대한민국 영토로 남아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행사준비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6월1일에는 전부대원이 모이게 되고, 6월2일 역사적인 즉위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축하행사는 오전 10시에 영국 국기(유니언 잭)를 상징하는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의 연기를 중공군과의 접경인 사미천 계곡에 쏘아대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항공모함 HMS Ocean호에서 이룩한 전투기들이 엘리자베스2세 여왕을 상징하는 “EⅡR” 모양을 하늘에 그리며 여왕즉위를 축하했다. 전선에 있던 보병들은 오전 10시를 기해 일제히 일어나 환호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앞줄에 있던 몇몇 보병들은 적들의 저격이 두려워 일어나마마자 서둘러 앉기도 하였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전해지지만, 사미천 계곡의 모든 영연방 군사들의 함성소리는 여왕의 즉위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진행된 축하행사는 지극히 영국적인 방식이었다. 막사주변은 현수막과 색색의 깃발들로 꾸며졌으며, 군인들은 각종 스포츠 행사와 게임을 즐겼고, 상품과 맥주가 제공되었다. 왕실포병연대의 전쟁 기록일지에는 적군들과 대치하고 있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매우 영국적인 행사들을 준비한 이들의 훌륭한 독창성에 대한 칭찬이 남아있다.

행사일에 벌어진 비극 : 비행정찰단 장교의 죽음

기념행사에 즐거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주둔한 왕립포병대의 공중정찰비행단인 1903 편대 공중 정찰 감시초소(Flight Independent Air Observation Post)의 지휘관이었던 Will Harris 소령(Major W.G. Harris MC)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Harris 소령은 이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프를 타고 활주로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급작스런 엔진 결함으로 인해 비상착륙을 시도하던 미군 비행기(84 Thunder Jet)가 그가 타고 있던 지프를 들이받았고, 그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현수막 기증의 뒷 이야기

현수막을 그렸던 덕 레이랜드(Doug Leyland)씨는 정전 협정이 이루어진 후에 영국으로 현수막을 가져 왔다. 그로부터 무려 60년이 지난 작년(2013년), 그는 집안 정리 과정에서 현수막을 판매하게 되었고, 현수막은 경매를 통한 판매와 인터넷을 통한 재판매 과정 속에서 한국인 고미술수집가 김영준씨(시간여행 대표)에게 발견되었다. 현수막의 역사적인 가치를 알아본 김영준씨는 좋은 일에 써달라며 문화체육관광부에 기증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런던에 주재한 한국문화원을 통해 상세 조사에 들어갔으며, 인터넷 경매사이트를 역추척해 덕 레이랜드씨를 찾아낸 것이다.

이후 많은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결국 왕립포병박물관이 전시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렇게 이 현수막은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현수막은 한국전쟁 전시실에 상설 전시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1953년 최전방 전투지에서 벌어진 기념행사와 흥미로운 주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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