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안개에 덮인 유럽의 앞날

김지호 발행인 | 입력 : 2017/10/02 [16:45]
영국이 브렉시트를 EU에 공식통보한지 6개월이 지났음에도 브렉시트 이후의 청사진은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4차에 걸친 협상은 양측의 팽팽한 입장차이만 확인했을 뿐이다. 지난달 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영국의 메이 총리가 돌파구를 위해 브렉시트 이후 EU와 깊고 특별한 파트너십을 원한다고 밝혔으나, EU측의 주목할만한 태도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브렉시트 협상은 그 결과 뿐만 아니라 진행과정까지도 메이 총리의 정치적 운명이 민감하게 걸려 있는 특급 과제다. 특히 지난 6월 조기총선 배팅이 과반의석 상실이라는 대실패로 나타나 입지가 크게 약화된 메이 총리에게는 협상이 반전의 기회가 될수도 조기 퇴장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이 총리는 지난 8월말 일본을 방문시 기자회견과 귀국후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장기 집권의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녀는 2019년 3월 EU 탈퇴를 완료한 후 8월을 전후하여 사퇴를 할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을 정면 부인하면서 2022년 총선도 자신이 이끌겠다고 주장했으나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카메론 총리내각시 재무부장관을 맡았다가 메이총리에게 경질된 죠지 오스본 의원은 조기총선 실패 후 메이총리를 가리켜 ‘사형대로 걸어가는 산송장’이라고 비꼬았다. 차기 총리감으로는 보리스 죤슨 외무부 장관을 비롯해 데이비드 데이비스 브렉시트 장관, 필립 해먼드 재부장관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브렉시트 협상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리스크를 질 필요가 없고,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섣부른 당내 분열은 노동당에 정권을 넘겨줄 위험이 있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한편 캐머런 전총리가 이끌던 반브렉시트 진영에도 대항마를 키울 시간을 벌면서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적어도 유럽 탈퇴까지 메이 총리의 잔류에 대해서는 당내에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메이 총리가 브렉시트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면 리더십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다. 

 

영국의 프로포즈와 일본의 퇴짜  

 

유럽과 같은 거대 경제 동맹에서의 이탈은 경제적 고립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국으로서는 제3의 경제와 새로운 동맹관계 구축이 절실한 상황으로서 미국, 일본, 호주 등이 최우선 대상이다. 메이 총리의 일본방문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대중국 견제를 위한 안보협력과 양국간 경제협력이지만, 실질적인 주목적은 유럽을 탈퇴하는 영국이 일본과 상호 FTA를 체결하자는 것이다. 이는 마치 20세기 벽두인 1901년 일본의 총리 이또 히로부미가 한쪽 안주머니에는 러시아로부터의 동맹제의서를 지닌 채 영국을 전격 방문하여 영일 동맹을 제의했던 일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당시 대영제국은 다소 무모해 보였던 일본의 제의를 받아들여 1902년 동맹을 체결했고, 일본은 영국에서 제공한 두척의 최신예함으로 무장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21세기의 일본은 영국의 절실한 요구를 에둘러 거절했다. 일본 측의 입장은 EU와 진행중인 FTA 협상의 마무리가 우선이고 영국과 EU가 관계를 분명히 설정한 후에야 영국과의 FTA 협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메이 총리를 특별 안전보장회의(NSC)에 초청해 위신을 세워 주었으나 메이 총리는 국제 이해관계에서의 냉혹한 현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보리스 존슨 장관의 돌출 기고문.

 

이런 상황에서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이 정부의 브렉시트 전략을 비판하는 글을 일간지에 기고하면서 “영국정부는 EU가 요구하는 막대한 금액의 브렉시트 청구서를 받아들이면 안되고 EU에 계속 돈을 지불하는 것에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런 돈을 아껴서 영국 의료진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NHS에 매주 3억 5000만 파운드를 더 배정해야 한다”며 브렉시트 찬성 캠패인 때 내걸었던 공약을 거듭 주장했다. 그는 또 “브렉시트 이후 각종 규제를 철폐해 경제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메이 총리를 지지하는 동료의원들이 자신의 정치를 위해 단합을 해치는 행위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엠버 러드 내무 장관은 보리스 장관을 뒷자리에 앉아서 운전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뒷자리 운전수’라고 비꼬면서, 온 국민들이 단합해야 할 런던 지하철 테러 다음날 이런 글을 기고한 행위에 대해서도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반응들이 메이 총리에 대해 진정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메이의 후임으로서 총리직에 대한 야망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부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보리스 장관은 메이 총리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이번 일로 보리스 장관이 경질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총리 측근이 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근래 보수당내에서 인기가 하락한 그가 돌출행동으로 스스로 총리가 될 작은 가능성마저도 차버린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워낙 괴짜인 그의 향후 행보를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보수당에서 포스트 메이 총리를 노리는 주자들의 신경전이 격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메이 총리의 레임덕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단계로 보인다. 다만 브렉시트라는 초유의 프로젝트로 인해 모두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자신감을 회복한 EU의 고압적 자세

 

한편 EU측은 들불처럼 번지던 유럽회의론과 극우주의의 위세가 한풀 꺾이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 지난달 융커 EU 집행위원장이 국정연설에서 “유럽이 다시 순풍을 받고 있다”며 “영국은 EU탈퇴를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최근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의 총선결과 극우 진영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그리스의 경제도 호전되면서 재정위기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감을 배경으로 EU는 협상에 좀더 유연한 대응해 달라는 영국의 요청에도 불구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영국은 탈퇴 조건 협상과 함께 양측간의 교역문제 등에 대한 협상도 병행하자고 요구하지만 EU측은 탈퇴조건에 대해 먼저 충분히 진전이 이루어져야 탈퇴 이후 양측 관계에 대해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고압적인 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협상개시 후 6개월이 지났지만 양측의 입장차이만 확인했을 뿐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답보 상태에서 진전된 협상 성과에 대해 목이 마른 메이 총리가 돌파구를 위한 양보의 시그널을 보이자 대 EU 강경파인 보리스 장관이 이를 차단하고 나선 것이다. EU와 영국이 이혼을 앞두고 벌이는 치킨 게임으로 인해 유럽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아직까지도 윤곽조차 그려지지 못하고 있다.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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