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만 넘으면 여자가 아니라고?

[정문순 칼럼] 여성 연예인의 죽음과, 아줌마의 원숙미를 강요하는 사회
정문순 | 입력 : 2008/10/13 [19:27]
 한 연예인의 죽음이 알고 지내던 사람의 불행을 본 것처럼 가슴 아프기는 처음이었다. 고(故) 최진실과 같은 또래인 내게 그녀의 비운은 한 유명 대중스타의 죽음이라는 의미를 넘어 세상 곳곳에서 악전고투하며 살아가고 있을 내 세대 여성 모두의 삶에 울리는 조종처럼 느껴졌다. 

힘들 때면 장년 여성 앞에 도사린 세상의 온갖 구렁텅이를 지나 우뚝 선 자신을 보라며 손을 내밀어줄 것 같았던 자매가 그 손을 영영 거두어버린 것이다. 그녀를 모범으로 삼아 따라가는 길은 끝내 막다른 벼랑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참담한 현실을 부인할 수 없는 마음은 비통하다. 

 그녀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내몬 것이 무엇인지 억측만 난무할 뿐 아직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없다. 어느 한 가지가 원인이라고 섣불리 말하는 건 오히려 고인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다만 측근 중 한 사람이 그녀의 불행을 허망하고 덧없는 인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 고 최진실 씨.     © cbs노컷뉴스

 대중의 관심을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연예인에게 인기란 마약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는 연예인으로서는 대중의 불 같은 환호가 식는다는 건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왕좌에서 밀려나는 게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면 그 고통의 무게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고인이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던 중년 여성의 역할이 나는 맘에 들지 않았다. 남편에게 구타 당해 눈물 쏟는 처참한 모습이나 아무렇게나 볶은 파마머리를 한 채 종종거리고 다니며 초등학생한테마저 “아줌마”라고 쉽게 호명되는 중년 여자가 내 연배의 여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난히 앳되고 해맑았던 그 용모가 ‘망가진’ 아줌마 얼굴로 뒤덮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그녀의 연기를 극찬하는 것도 마뜩지 않았다. 굵어지기 시작한 눈밑 주름에 인생의 애환이 엿보인다고, 삶의 쓰고 단맛을 겪을 대로 겪은 노련미가 연기에서 묻어난다고 사람들은 주저 없이 말했다. 3년 전 <장밋빛 인생>에 출연한 이후 그녀에게 쏟아진 단골 찬사는 영락없는 아줌마 같다는 것이었다. 그건 한 배우의 연기력에 대한 칭찬일 수 있지만 예쁜 여자도 늙으면 어쩔 수 없다는 속설에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원숙한 중년이 푸른 젊음보다 좋다고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정작 자신에게만은 그런 판단을 쉽게 적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젊지 않으면 여자로 인정하지도 않는 세상의 횡포에 가까운 편견을 생각할 때 중년의 노숙함을 무작정 추켜올리는 말은 천사의 가면을 쓴 기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석양 아래 단풍이 아무리 고운들 그건 죽음과 쇠락 직전에 잠깐 허용된 마지막 화려함일 뿐, 오월의 햇살 아래 빛나는 풋풋한 신록을 능가할 수는 없다. 가만히 있어도 뭇 남성의 시선을 받고, 화장하지 않아도 맨 얼굴 그대로가 꽃과 같은 20대의 현란함을 누가 이기겠는가.

 난 그녀 스스로가 정말 좋아서 흐트러지고 긴장이 풀린 누추한 역할을 맡았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청순한 그녀의 20대가 아직 내 눈에도 선명히 떠오르는데 그녀인들 우아하지 못한 배역을 아무 서운함 없이 수락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녀가, 나이 들어 보일까봐 외출할 때 안경을 벗을까 말까 거울 앞에서 한참 고민하고, 10대의 옷을 사 입기도 하는 나 같은 사람의 배역을 고집했다면 십중팔구 드라마에 출연하는 기회조차 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주책 없는’ 배역은 현실 드라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물 건너가기 시작한 인기를 다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지 않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중년 역할을 해낸다고 한들 아줌마 연기에 대한 대중의 환호조차 머지않아 짚불처럼 잦아들 것이란 사실은 장년의 여자 연예인에게 이미 예고돼 있었다. 세상은 아줌마 연예인에게 국민적 스타의 위상을 다시 탈환할 자격을 주지는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고인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20대만의 몫이다. 

나이 든 연기자가 노숙한 역할만 맡아야 한다는 법이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있는 세상이 그녀의 불운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인생에 달통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생물학의 법칙은 육체에나 작용할 뿐 영혼마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중년이 되어도 남성의 주목을 받고 싶고 흐트러짐 없고 우아한 여성이 없을 리 없고, 젊어도 조숙하고 늙어도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단순한 진리는 여성 연기자에게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 

수년 전 결혼을 앞두고 찍은 광고에서 그녀는 웨딩드레스 입고 애인을 향해 날아갈 듯 달려가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더 올라 갈 데 없는 인기 절정기였던 그의 20대는 사랑을 포함하여 세상 모든 게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질주를 언제까지나 허락하지 않았다. 세월을 거스르는 듯 여전히 앳되고 아름다운 여성일지라도 만인의 연인 역할은 나이 먹는 순간 이미 시효가 지난 것이었다. 

20대에 잘 나갔던 어떤 여자 연예인은 서른 살이 넘는 순간 미혼의 배역 의뢰는 자취를 감추고 아기 엄마 역할만 가끔 들어오더라고 한다. 20대에는 세상의 꽃인 양 환호하다가도 서른 문턱만 넘어도 퇴물 취급하면서 노련미니 성숙미니 쉽게 말하는 세상의 변덕과 기만을 쉽게 수용해내는 여성은 없다. 억척 여성이니 ‘줌마렐라’니 하는 호칭을 조소하듯 고인의 얼굴에서는 자신은 여전히 싱싱하고 풋풋하다고 말하는 항변이 읽힌다. 

여성을 외모에 따라 위계화하고 서로 분열시켜 놓은 세상은 ‘나잇값’을 못하고 여자로 살겠다고 나서는 주름 진 아줌마를 견뎌내지 못한다. 자신의 방식대로 여성을 소비하고 싶은 세상의 욕망에 응하지 않는 여자 배우에게 미래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왕년의 화려함을 잊은 듯 평범한 아줌마 역할을 기꺼이 수용하고 자세를 낮추는 것 같은 톱스타에게 세상이 안심하고 보낸 환호의 목소리 역시 그녀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이끌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베테랑 여자 배우를 만만한 아줌마의 틀에 가둬놓고 여자는 나이 들면 별 수 없다는 생각을 그녀를 통해 합리화하고 싶었던 세상의 횡포가 한 배우의 ‘장밋빛 인생’을 앗아갔다고 말한다면 고인에게 무례가 될까. 삶이 곧 전쟁이기를 강요한 세상과의 처절한 혈투를 내려놓은 자매의 편안한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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