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고인돌은 서양 문명사의 열쇠!

고인돌을 추적하면 서양문명의 원류가 나온다!
변광현 화가 | 입력 : 2008/01/18 [00:32]
▲  세계 고인돌 분포도(노란색이 고인돌 지역)-한반도는 세계 고인돌의 70%을 점유하고 있다
 
현재까지 일반에게 알려져 있고 학교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있는 기원전의 선사시대와 고대의 역사는 그 대부분 유럽의 역사학계에서 제기한 학설을 기초로 한 것들입니다.
특히 방사성 탄소(放射性炭素) 등 고고학적 유물과 흔적을 통하여 그 대강의 연대를 측정하였다는 절대 연대는 사실 그 어느 누구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검증(檢證)할 수 없는 가장 불확실한 연대이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부정할 수도 없는 연대로서, 그저 각 나라에서 주장하는 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현재 우리가 알고 배우고있는 고대와 선사시대의 연대들은 가장 분명한 절대연대(絶對年代)라고 하지만, 오히려 가장 부 정확한 추정연대(推定年代)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연대가 나오게 된 동기는 사실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 산재한 고인돌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언제 이러한 고인돌을 만들었는지 매우 궁금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집트에 있는 거대한 초대형 피라미드가 유럽 학계에 알려지면서 영국과 프랑스 학자들은 우선 이집트 고대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당연히 고인돌의 연대는 그 이전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중해를 비롯한 유럽의 고대와 선사시대의 연대가 성립되었으며, 이 이집트 왕조의 연대에 맞추어 다른 지역의 연대들이 차츰차츰 정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지요. 물론 이 연대를 성립하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은 당연히 조상 대대로 고인돌을 숭배하였던 영국의 학자들이었습니다.    

▲  동방족(한반도 사람들)의 문자인 갑골문자 [토]는 고인돌의 모양을 본 뜬 문자이다
 
그래서 현재 알려져 있는 고인돌의 연대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주장되었으며, 그 연대를 대략 기원전 2000년에서 3000년 정도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스페인의 어느 거석 묘지에서 기원전 4000년경이라는 엄청난 측정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데, 물론 이 연대를 가장 반겼던 이들은 영국 학자들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시기를 기원전 2000년에서 4000년경으로 확립시키고 이를 보급시켰지요. 그런데 이렇게 억지로 때려 맞추다 보니 프랑스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프랑스 서해안의 브르따뉴(bretagne) 지방에 널려진 고인돌을 비롯한 초대형 거석유적들이 전설에서는 그저 기원 전후의 골(gauls)족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영국과 보조를 맞추어 이제는 골족이 아닌 그 한참 이전인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고대 선사시대 역사에서 무려 2000년이라는 가공할 시간적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또한 여기에 맞추다 보니 유럽의 고인돌이 외계인(外界人)이 만든 유적이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는데
, 더욱 가관인 것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엉터리 작가들이 여기에 상상으로 완벽하게 포장하여 그러한 거석 유적들이 1만년전 또는 2만년전에 만들어졌다는 등, 아예 선사의 역사를 상상과 허구로 멋지게 꾸며 놓았지요.
 
▲  한반도의 남방식 고인돌(만주의 홍산문명의 무덤양식과 서인.티벳.이집트 등의 피라미드 무덤양식 원형)
 
그나마 양심있는 유럽 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인돌이 흑해(黑海) 연안의 코카사스(caucasus, kavkaz) 지방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즉 유럽의 백인종(白人種)의 근본(根本)과 유럽 역사의 출발을 카프카즈(코카사스) 지방에서 찾고 있는 것이지요.
아주 오래된 전설과 기록에 의하면 지구는 아시아 대륙에만 해가 떠 있었고, 나머지 시베리아, 유럽, 아프리카 지역에는 해가 뜨지 않아 밤만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의 형질에 벰파이어, 늑대인간 등의 선천적인 음기가 잠재하게 되었으며, 그후 유럽이 지금처럼 해가 뜨면서 주로 카프카즈 지역에서 온 인류와 아시아의 극동과 이란 지역에서 온 우수 혈통의 인종이 합쳐져 현재의 유럽인종과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내용에서 빛이 있는 낮은 문명을 의미하고 무지를 상징하는 캄캄한 밤은 문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  독일 히틀러 시대 독일장교 옷카라에 달린 게르만족 제일주의를 상징한 마크의 원형인성인[무]자. 참고로 독일의 조상들인 게르만족은 고대에 서진한 동방족들과 백인족과의 혼혈족이다. 성인[무]자와 황제[제]자는 피라미드와 관계있습니다. 즉 , 왕.성인.지도자 등을 의미하는 뜻으로 피라미드속에 묻힌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피라미드 위에서 보면 모양을 본 뜬 갑골문자인 [무][제][전]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줄기차게 코카사스 지방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유럽 왕족의 전통 속에는 항상 동쪽과 동방(東方), 동양(東洋)이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자신들의 조상과 그 뿌리 또한 동양이었다는 오래된 전설과 믿음 때문입니다.
제3제국을 꿈꾸었던 히틀러와 그의 측근 히물러가 추구하였던 새로운 원동력은 우스꽝스럽게도 선사시대부터 전해지는 신비스러운 절대 왕권유지의 비결과 도구이었으며, 그 혈통을 아리안족(arians, aras)으로 보았고, 그 흔적을 찾느라고 인도의 곳곳을 헤집고 다녔지요. 나찌(nazis)의 상징인 네 개의 갈고리(swastica)는 십자가(cross)의 원형(原型)이며, 절대 왕권의 상징이었는데, 한국과 일본, 중국, 인도 등지의 동양에서는 이를 주로 卍자로 표현하였지요. 이 卍자는 사실 태극(太極)의 또 다른 상징적 무늬입니다. 즉 사방(四方)으로 굽이쳐 뻗어가는 사태극(四太極)이라고나 할까요. 실상 사태극(四太極)이란 말은 없으며, 그 대신 윷무늬(柶板文)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십자환주형(十字環周形)의 윷 무늬 자체는 옛 하도(舊 河圖) 이전의 것으로서, 환역(桓易, 易)을 말하는 것이어서, 卍자 무늬는 음양(陰陽) 태극(太極)의 변화(易)를 사시사방(四時四方)에 맞추어 좀더 세분(細分)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  독일 히틀러의  왼쪽 상단 주머니와 어깨에 부착한 [무]자 -불교의 상징문양과 인디언들의 문양과 동일한 게르만족 제일주의를 상징하는 마크. 2차 대전당시 독일은 세계 최고의 두뇌를 소유한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면서까지 독일민족이 우수하다는 무의식적인 의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상의 기원지를 찾아 시베리아와 동북 아시아까지 고고학자들을 파견, 연구하게 했다
 
아무튼 히물러를 비롯하여 유럽의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성궤(聖櫃) 또한 돌로 짜여진 빛나는 석관(石棺)을 말합니다. 아마도 빛나는 벽옥(碧玉)으로 만든 석관(石棺)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러한 벽옥제(碧玉製) 석관(石棺)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지만, 한(漢)나라 시대에는 석관 대신에 주검을 감싸는 옥의(玉衣)를 만들었는데, 이 옥의는 주검을 감싸는 형태만 남아있고 그 안의 시신은 건드리는 즉시 먼지로 변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옥의를 두고 서양인들이 성궤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돌로 만든 관을 사용하였던 종족은 오로지 동이족(東夷族)으로서, 요동(遼東)과 길림(吉林), 산동(山東), 남북한의 한반도(韓半島), 쿠슈(九州), 오끼나와(沖繩)에서만 발견되는데, 그 중심되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입니다. 즉, 오끼나와(沖繩)는 유구(琉球)와 나패(那覇)가 합쳐진 말로, 유구(琉球)의 현지발음은 유쿠, 오끼로서 옥(玉)을 말하고, 나패(那覇)의 현지 발음은 나하, 나와로서 곧 나라(國)를 말한 것으로, 오끼나와의 원래 발음은 한글의 옥나라(玉國)라고 할 수 있다. 오끼나와 주둔 미군들에 의하여 시작하여 미국인들에게 아주 좋다는 뜻의 속어로 쓰이는 오키도키(okidoki)는 한글의 옥도끼(玉斧, okdoki)를 말한 것으로, 오끼나와의 원주민들 가운데 한반도 이주민들이 많아 한글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끼나와에서는 무덤을 거북이라는 뜻으로 부르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고인돌(支石)을 거북바위, 즉 구암(龜岩)이라 말하는 것과 상통하며, 괌(guam)섬도 원래 구암(龜岩)에서 비롯한 말로 볼 수 있습니다. 
 


▲  영국의 고인돌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최고의 전설인 아서(arthur) 왕과 마법사 멀린(merlin) 이야기는 스토운 헨지(stonehenge)와 고인돌(dolmen)에 관련된 전설이며, 영국에서의 절대적인 왕권 유지의 도구는 단순한 돌덩어리와 검(劍)이었습니다.
영국의 국회 의사당과 유명한 교회 안에는 이와 비슷한 돌이나 직검(直劍)에 관한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직검의 원형(原型)인 돌단검(石短劍, 磨製石劍)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또한 진시황(秦始皇)의 무덤에서 출토된 보검(寶劍)도 직인검(直刃劍)이 아닌 곡인검(曲刃劍)으로서, 한반도와 요동지역에서만 출토되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또한 이 비파형동검도 요동(遼東)지역이 아닌 남한에서 출토되는 돌단검에서 변형된 것으로, 돌단검의 검날(劍身)과 검자루(劍把)가 함께 이어지고 여기에 다시 또 다른 검자루가 덧붙여지면서 만들어진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요동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단검은 바로 남한의 남해안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에 요동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카사스와 그리이스에서 출토된 청동검들은 남해안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단검의 변형으로, 입사귀와 비슷한 엽인검(葉刃劍)이며, 영국과 유럽에서 출토되는 직인검은 남한에서 만들어진 돌단검과 형태가 비슷합니다. 이를 보고 일제시대에 일본의 어느 유명한 고고학자(考古學者)는 유럽의 검을 모방해서 우리나라의 돌단검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였는데, 남한의 고인돌에서 돌단검들이 엄청나게 출토되면서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고인돌과 그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하여 보면 유럽의 고인돌과 그 유물들은 우리의 한반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 학자들, 그 가운데 특히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이 거창하게 세워놓은 절대연대(絶對年代)와 그 연대기(年代記)를 나열하면서 오히려 거꾸로 유럽에서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즉 자신들이 만든 연대에서는 분명 20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 차이가 있거든요. 그들의 말 대로라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는 과거에 갑자기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이동(時間移動)이 생겨서 그 모두들 타임머신(timemachine)을 타고 왔다갔다 했다는 말이지요. 이러자 북한에서는 근간에 이같은 유럽식 절대연대 측정 붐이 조성되어 영국이 만든 절대연대와 비슷하게 맞추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북한과 남한에서는 고인돌 제작연대가 서로 20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 동아시아 고인돌 분포(한반도를 중심으로 만주와 산동,그리고 일본의 큐슈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의 차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분명 어딘가에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은 분명합니다. 근 200년간 계속 이렇게 단추를 잘못 끼우다가 지금와서는 그걸 도저히 어찌 고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영국인들이 자랑삼아왔던 전 세계의 역사(歷史) 연대기(年代記) 편년(編年)이 몽땅 잘못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과 잘못이 드러난 이상 한시빨리 시정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오류를 안다 하더라도 영국인들 스스로 그 오류를 자인(自認)해야 되는데, 지금까지 쌓아놓은 공든 탑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마당에 그저 앉아서 자신들의 치욕을 반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역사에는 엄청난 오류(誤謬)가 있으며, 그 속에는 고의적으로 꾸며놓는 엄청난 음모(陰謀)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 한반도 북방식 고인돌(상)과 아스터섬의 석상
그럼 고인돌 문명의 주역인 고대 한반도 사람들의 활동반경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반도에는 세계 세계인들의 70%을 점유할 정도로 고인돌이 참으로 많고 많습니다. 남북한 할것없이 나즈막한 언덕과 평지에는 크고 작은 고인돌이 수없이 산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인돌이 바로 역사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북한의 한반도와 현재 중국 땅에 속해있는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의 동북삼성(東北三省)은 원래 한반도와 같은 종족인 동이족(東夷族)들의 근거지이었으며, 고인돌이 바로 동이족들이 만들었던 돌무덤입니다.

 
원래 동이족 출신인 진시황(秦始皇)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우선 동이족(夫餘族, 현재 길림성 지역)의 한자(漢字)를 차용하여 나라의 글로 삼았으며, 책력(冊曆) 또한 동이족에게서 차용하여 수없이 교정하면서, 그들의 책력으로 바꾸었지요. 그리고는 동이족들의 모든 역사와 증거물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과거의 책들을 보지못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산동반도(山東半島) 또한 동이족 지역이었는데, 진시황에게 가장 처참하게 당한 곳이 이 산동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산동지역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산동성 태산(太山) 근처의 제(齊) 나라 지역에는 과거에 여러 기의 탁자식 고인돌들이 남아있었다고 전하는데, 모택동 시절에 문화혁명(文化革命)을 치르면서 모택동의 홍위병들에 의하여 모조리 파괴되어, 현재 산동반도에 남아 있는 고인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증거들로써 역사유적이나 유물들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자들은 용서할 수 없는 자들로 천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요동반도를 비롯하여 길림성 지역에는 아직도 수많은 고인돌들이 남아있습니다.

우습지요. 이런 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는 동이족은 사실 처음에는 그런 진시황을 우습게 알았지요. 오로지 과거의 명성에만 매달리기 바쁜 처지라 새롭게 등장하는 새 물결을 미쳐 눈치채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엄청난 사실이 숨어있었습니다. 바로 천지개벽(天地開闢)이지요. 바다가 땅으로 바뀌고 땅이 바다로 바뀌는 엄청난 변혁(變革)을 겪고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방랑생활(放浪生活)을 시작한 때가 천지개벽 이후의 일입니다. 그 때가 바로 중국대륙에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이지요. 이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주로 만리장성(萬里長城) 동쪽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서부터 점차 새로운 청동기(靑銅器)가 들여오면서 고인돌을 만들던 동이족들도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지요. 그 전까지는 거꾸로 모든 것이 동이족에서 비롯하였지만, 천지개벽 이후에는 오히려 야만족으로 강등되고 뿔뿔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유랑생활을 시작하였지요.

▲  동남아 고인돌 분포지와 한반도(해로가 한반도로 일방 통행하며, 해로는 계속해서 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 열도를 걸쳐 동남아로 다시 돌아 오는 순환 해로이다. 칠레 아스터섬의 석상과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도 중 회색지역은 난생설화 지역이다. 한반도는 난생설화와 천손설화가 겹치는 지역으로 난생설화와 천손설화의 원형지역이 한반도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동이족은 동남아까지 담로를 설치한 백제와 장보고의 동아시아 제해 해상권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원래 해양족(海洋族)이었습니다.
천지개벽 이전에도 동이족들은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베트남(vietnam)을 거쳐 인도(india) 북부, 그리고 팔레스타인(palestine) 지역, 그 다음에 이디오피아(ethiopia), 그리고는 지중해(地中海)에서 위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israel)을 비롯하여 요르단(jordan), 그리고 터어키(turkey) 중부, 러시아(russia) 남부의 흑해(黑海) 연안 까프까즈 지방까지 배를 통하여 그들의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중해 연안의 유럽인(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동부)들의 원조들은 이 동이족의 고인돌에서부터 영향을 받아 점차 더욱 커다란 고인돌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곧이어 대규모의 거석 건축물들을 만들기 시작하였지요. 그러나 지중해로 이주한 일부 동이족들은 알프스(alps) 계곡을 지나 독일(germany) 남부로 들어가 또 다른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가 현재의 영국(scotland)과 아일랜드(ireland)로 건너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지요. 그러니 브리튼(britain) 섬에서의 둘레돌(環狀列石, stone circle)은 우선 이베리아(iberia) 반도인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다시 동이족의 영향권에 들어갔습니다 

▲ 영국 등 유럽의 고인돌은 한반도 고인돌보다 시대가 뒤지며, 인도의 고인돌은 유럽의 영향을 받은 고인돌이다. 고대 한반도 사람들은 해양족으로서 배를 통한 해로와 말을 통하여 일찍부터 개척된 유라시아 비단길을 통하여 한반도 문명을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보라색 지역은 고인돌 분포지역)


경남 창녕군에서 발굴 8천여 년전의 배로 세계 최고 선박-고대 한국인들이 해양족이였음을 증명함
 
이렇듯이 최소한 지금부터 2500년 이전에는 우리의 한반도(韓半島)와 만주(滿洲)지역은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의 고인돌과 거석문화가 사실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황해도(黃海道) 황주(黃州) 일대는 이 고인돌 시대에 가장 중심되는 지역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고인돌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곳이지요.
평양일대는 주로 천지개벽 이후에 확산되었지요. 사실 한강일대는 이 고인돌 시대에 가장 애매모호한 곳입니다. 분명 황주에서 고인돌 문화가 일어날 때 한강(漢江) 유역에서는 또 다른 기존의 나라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고인돌 문화에 밀려 고령(高靈)을 거쳐 김해(金海)와 부산(釜山)으로 이주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고인돌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봉토분(封土墳) 문화를 개척하였지요. 그러니 고령을 비롯한 김해 지방은 전세계 봉토분의 출발지인 셈이지요. 그러나 황주에서 비롯한 고인돌이 요동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중국 내륙의 문화와 충돌하여 규모가 커졌으며, 여기에서 김해를 비롯한 남해안 세력과 함께 발길을 해외로 돌린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러한 봉토분조차 고인돌과 돌무지 무덤과 함께 지중해를 거쳐 서쪽으로 서쪽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프랑스 브르따뉴(bretagne) 지방입니다. 비록 나중에는 브리튼 섬에서 쫓겨간 브리튼족들이 더욱 거석문화를 확대시키고 성장시켰지만, 원래에는 프랑스 동남부의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 세계의 고인돌과 거석문화가 몽땅 한반도와 요동반도에서 비롯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곳이 있었지요. 이 한반도와 요동반도의 고인돌로서는 전세계의 모든 거석문화가 일목요연하게 해명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얼어붙은 북극(北極) 근처의 카라해(kara) 어디쯤에 있는 빙판(氷板) 속에 그 열쇠를 풀어줄 흔적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반도 고인돌과 관련하여 영국(英國), 즉 잉글랜드(england), 웨일즈(wales), 스코트랜드(scotland), 그리고 아일랜드(ireland)와 영국의 식민지(植民地)인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는 지금부터 4000년 전 이상되는 과거에 아시아인(asians)들이 서쪽의 죽음의 땅을 찾으러 갔다가 살게 된 곳입니다. 선사시대(先史時代)에는 죽음이 또 하나의 저세상(the other world)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많은 아시아인들이 브리티쉬(british) 제도(諸島)로 이주(移住)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이 남긴 언어(言語)는 아직도 웨일즈 지방에 방언(方言)으로 남아있으며, 스코트랜드와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가장 분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즉 문장(文章) 마지막에 동사(動詞)가 따르는 우리 한글의 문법(文法)이 이들 웨일즈와 아일랜드 고어(古語)에 남아있으며, 또한 수많은 고인돌(dolmens)과 거석유적(megaliths)들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이주한 비이커족(beaker people)들이 만들었지요. 스토운헨지(stonehenge)와 애브버리 둘레돌(avebury circle) 등 수많은 영국과 아일랜드 유적들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이주한 비이커족이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비이커(beaker)라는 것은 바로 신의주(新義州)에서 평양(平壤) 사이에서 많이 출토되는 미송리형 단지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한반도(韓半島)의 많은 고인돌들은 이스라엘(israel)과 요르단(jordan), 러시아(russia) 코카사스(caucasas) 지방에서 발견된 고인돌들의 원형(元型)이며, 지중해(地中海)의 코르시카(corsica, corse) 섬에서는 돌널무덤(cists)과 함께 우리나라의 개석식(蓋石式) 고인돌과 탁자식(卓子式) 고인돌이 발견됩니다. 또한 이같은 고인돌들은 피레네(pyrenees) 산맥에서도 발견되면서, 프랑스와 그리고 브리티쉬 제도로 연결되지요.
 
그런데 유럽의 모든 대형 거석유적들은 모두 우리 한반도의 고인돌에서 파생(派生)된 것들입니다. 인도(india)의 고인돌은 한참 늦은 시기에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브리티쉬 제도의 둘레돌(環狀列石, stone circle)은 원래 스페인(spain)과 포르투갈(portugal)에서 건너간 한반도 고인돌 종족의 후손(後孫)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말로 뫼라고 부르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에서 비롯된 구조입니다. 그러니 영국에서의 둘레돌이 얼마나 늦게 만들어졌는지 알만 하지요. 이 뫼라는 말은 영국에서 무어(moor)라는 말로 남아있으며, 이 무어인(moors)들이 바로 웨일즈 지방과 잉글랜드 서남쪽의 콘월(cornwall) 지방, 그리고 아일랜드에 살던 아시아인들의 후손(後孫)입니다.

무어(moor)는 보드민 무어(bodmin moor), 다트 무어(dart moor), 엑스 무어(exmoor), 노스욬 무어(north york moor) 등 영국 중남부 지역의 황무지 고원지대를 일컫는 말인데, 그 원래의 뜻은 개활지(open land)로서, 평원에 솟은 언덕 정도로 여기면 적당합니다. 이 고원지대에 크고 작은 거석문화 유적지들이 지천으로 산재하고 있는데, 현재는 일년 내내 거센 비바람을 맞아 기후가 최악으로서 아무도 살지못하는 지역이지만 청동기와 철기시대에는 나무와 꽃이 피고 샘이 솟는 기후 좋은 지역이었다는 점이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특히 원시 고원족(일명 하이랜더, highlander)이 거주하였던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지금의 무어인의 명칭 자체는 고아시아족 계통이지만 대개의 잉글리쉬인들이 그렇듯이 영국을 점령한 침략자들은 기존의 거주민들의 문화를 통째로 훔쳐 자신의 것으로 도용하였다는 역사적인 증거들이 많습니다. 영국해안에는 해안 단구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원래 잉글랜드는 바다 지역으로서, 영국제도 전체가 지반이 떠오르면서 바다가 육지로 바뀐 지역이어서 처음부터 주인이 없던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지층변동을 수만 년 전 또는 수억 년 전이라 말한 것은 전혀 근거없이 말한 것으로 완전히 엉터리 학설입니다. 영국 고고학을 보면 거석문화를 전후하여 이 같은 엉터리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는데, 지금으로서 이것들을 제대로 증명하라 하면 제대로 증명될 것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은 절대 아닙니다. 이처럼 필자가 보기에 기원 전후의 영국역사는 엄청난 오류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국 역사는 그 근간을 로마의 기록에서 찾고 나머지는 아일랜드 수사들의 기록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는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의 철기 문화 이후인데, 이것이 뒤죽박죽된 경우들이 많아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즉 숨기는 것이 많다는 말인데, 영국이 말하는 자신들의 역사에서는 로마가 물러간 이후에 색슨족이 침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필자의 잘못 판단도 물론 있지만 실상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기원전후 영국은 한마디로 개판이어서, 제멋대로 조작하여도 그것을 입증 또는 반박할 만한 근거자료가 희박합니다. 워낙 아일랜드는 북유럽 문화의 전통있는 근원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에 반해 영국은 일자 무식한 해적들이 사는 곳으로, 살인강도와 도둑질을 본업으로 삼는 부족들이 많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영국의 재력은 오로지 정보원을 많이 두어 국민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식민통치에서 나오는데, 과거 영국에서 중국 도자기의 보유는 곧 부유한 재력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 도자기의 밀무역과 아시아에서의 해적질에서 근대 초기 영국의 자본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색슨족(saxon)은 대개 독일의 작센(sachsen) 지방에서 건너온 종족으로, 영국에서 거석문화 이후에 영국으로 들어온 종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센은 곧 우랄산맥 주변에 퍼져있던 용맹한 무사 코작(kozak)인들과 인도 북부를 점령했던 무사귀족 사카(saka)인들과 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코작과 사카는 터어키(색륜-탁륜-튜르크-토이기)족과 함께 근본이 아시아족으로서, 그 근간이 동아시아의 색륜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색륜은 곧 한반도 북방 동이족으로서, 색에서 작 또는 탁으로 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잉글랜드의 이주민이었던 앵글로 색슨족은 단군시대에 만주일대에서 서로 앙숙이었던 앙골(앙骨, angol)과 숙신(肅愼, sukshin, jushen)과 발음이 통하여 색슨족의 어원이 숙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라이프찌히(leipzig) 근처의 할(halle, 또는 쌀, saale)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엘베(elbe)강 유역의 작센 지방 또한 그 대부분 지역이 원래 바다였습니다.

글/변광현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로서 웹페이지 작성을 통하여 작품을 하고있다. 1982년에서부터 현재까지 50여회의 단체전과 6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1회 개인전에서는 드로잉으로 그리고 2회에서 부터는 유화로 제작하여 전시하였다. 주로 추상적인 작품을 해오다가 근래에는 구상적인 작품을 하였으며, 현재는 주로 고인돌과 상고시대에 대한 연구 및 저서 집필을 하고있다.
 
사진.그림자료/윤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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