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민중학살과 60년전 제주 4.3

제주 4.3과 제노사이드, 이스라엘의 민중학살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굴렁쇠 | 입력 : 2009/01/19 [04:36]
굴렁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중학살을 지켜보면서 60년 전 발생한 제주 4.3의 아픔을 다시 더듬게 됐다. 큰 물줄기에서 보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민중이나 제주 4.3 민중이나 그 처지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오늘날까지도 이토록 잔인하게 무시된다면 '인간'에 씌워진 이름은 그야말로 '천형'의 대명사다. 자유와 인권과 평등과 평화를 이어주는 관계대명사가 아니라 억압과 모욕과 차별과 증오를 이어주는 '절망의 관계대명사'가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라산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 섬아이들. 초토화작전 기간에는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도 제노사이드의 표적이 됐다.(1948. 5)     © 굴렁쇠
 
이스라엘의 반인륜적 민중학살 행위는 분명히 제노사이드(genocide : 집단학살) 범죄이다. 제주 4.3이 발발하여 대량학살이 이루어지던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는 모두 19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92개국의 찬성으로 체결했다.
 
협약 제2조에서 제노사이드는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임을 명시하고 있다. 소극적인 정의이지만, 이른바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서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분명히 했다. 이스라엘은 이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19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기도 했다. 이 협정은 전시에서도 민간인에 대해서 고의적인 살인, 고문 등 비인간적 행위, 고의적인 괴롭힘이나 신체 상해, 군사적 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대량 파괴와 약탈 등을 금지하고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재판상의 보장을 부여하는 재판에 의하지 않은 판결 및 형의 집행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죽음의 땅으로 내모는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행위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학살만행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
 
지난 보름여 동안, 세계가 이스라엘을 관대하게 바라보는 사이 벌써 1천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중이 차가운 주검이 됐다. 오만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만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총부리는 팔레스타인을 넘어, 중동을 넘어, 국제사회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 팔레스타인을 가둔 '숙명의 트라이앵글'이 울리는 세기의 진혼곡, 정말 끝낼 수 없는가.
 
죽음의 숫자를 제외하면 1948년 전후의 제주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냉전의 최대 희생지로 남아 있는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 화산섬이 알베르 까뮈가 말한대로 '20세기 학살의 시대'에 공포의 섬, 죽음의 섬이 됐다.
 
60년 전 제주섬에도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 군경토벌대가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죽음의 덫을 씌웠고, 어린이와 여성, 노인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주 4.3은 제노사이드 범죄를 구성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최소 3만 이상의 제주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미군정과 국가공권력은 초토화작전으로 제주섬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육지부에서 증파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이 합세하여 제주도민을 모두 좌익폭도로 내몰아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급기야 제주섬은 죽음의 섬으로 변했다. 제주의 역사는 다시 '피의 목욕통'(월리엄 제임스)에서 알몸을 드러내고 말았다.
 

제주 4.3민중이 미국에 분노하는 이유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미국은 왜 제주도민을 집단학살했을까. '제주도민=빨갱이'이라는 등식을 내걸고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저지른 4.3 민중학살은 불행하게도 미국이 직접 개입했다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1945년 이후의 세계질서는 냉전체제로 재편되고 있었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근거한 대한반도 정책은 사실상 동북아를 겨냥한 기조 위에서 펼쳐졌다.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한반도를 건너 뛸 이유가 없었다.
 
소련이 동북아와 태평양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발판이 한반도이고 보면, 미국이 견제하고 봉쇄해야 할 곳도 한반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해방공간에서 '자국에게 유리하고 소련에 반대하는' 친미반공국가를 수립하고자 파란눈에 빨간불을 켰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제주도는 미군정의 경계 대상 1호였다. 사실 해방 정국 초기 인민위원회를 앞세운 제주도 좌파세력은 치안 및 자치교육활동 등 모범을 보여 주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제주도민 스스로가 공동체 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은 미군정도 인정했던 사실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그러나 1946년 후반 이후 사정은 크게 바뀌었다. 인민위원회가 주민에게 뿌리를 깊게 내릴수록 미군정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사실을 경계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제주도민과 인민위원회를 갈라놓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분열과 회유 공작이 잇따랐다. 게다가 본토에서의 대규모 9월 파업투쟁과 이어진 10월 항쟁의 불길은 미군정의 대한반도 정책을 뒤흔들었다.
 
1947년 초부터 제주도민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은 한층 강화되었다. 6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3.1절 시위와 이어진 총파업 투쟁을 강경 진압함으로써 미군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은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사상이 불순한 섬'으로 몰아붙였고, 이후 1948년 4.3과 5.10 총선거의 보이코트를 거치면서 갈등이 극에 달했다.
 
제주도에서 대량학살이 개시되던 1948년 11월 중순은 남북에 각각 적대 정권이 수립되어 분단이 고착화되던 시기였다.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쥐고 있었다. 그 권한은 1949년 6월 30일까지였다.
 
이 시기 미국 내에서는 '과연 남한 정부가 공산주의의 방벽이 될 만큼 자생력을 갖췄느냐'는 문제를 놓고 이승만 정권의 자생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남한의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민족운동과 그 연장선상의 사회혁명운동을 부정하고 저지하기 위한 반공 제방을 튼튼히 쌓을 수 있는지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미군이 여순항쟁 진압과 숙군작업에 앞장서고, 경찰과 국방경비대에 서북청년단을 투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제주도 초토화작전은 바로 이 시점에 이루어졌다. 이미 미군은 사전에 초토화작전(대량살육작전 : a program of mass slaughter)을 계획했으며, 1948년 5월 김익렬 9연대장에게 작전을 전개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미군 보고서는 1948년 11월부터 초토화작전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9연대의 작전을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대량학살의 일등공신인 송요찬 9연대장의 눈부신 작전을 대통령 성명 등으로 크게 알려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국정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미군은 초토화작전 직전까지 '괴잠수함 출현설' 등을 흘리며 살육작전의 당위성을 사전에 조작했다. 초토화작전이 전개되는 동안에는 정찰기를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들에게 무기와 장비도 공급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의 국가폭력기구를 동원하여 좌익을 '청소'하는 작업을 박수치며 응원했다. 조사자료에 의하면, 초토화작전 당시 제주도에는 최소한 임시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5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제주 4.3민중학살의 직접 책임이 있다. 제주를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몰고 갔고, 제주 4.3에서 국가공권력의 민간인 대량학살을 직접 또는 간접 지휘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주 4.3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 또한 제주 4.3민중이 미국에 분노하는 이유이다.
 
제주 4.3민중학살, 왜 제노사이드 범죄인가
 
제주 4.3은 제노사이드 범죄로 성립이 가능한가.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제주섬에 법적 근거가 없는 계엄령을 내렸다.
 
이것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학살이 결정되고 감독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명백한 근거라 할 수 있다. '군이 주도하고 경찰이 도우며 서북청년단이 보조하는 식'의 역할분담 속에서 주도면밀하게 대량학살이 이루어졌다.
 
제주의 학살이 명실상부한 내전이나 국가 간의 전면전 중에 일어난 것도 아니다. 19세기 초반 식민지 개척기에 호주에서 원주민과 영국인들이 충돌했을 당시 무장대와 토벌대간 사망자 비율이 10대 1 정도였던 반면.
 
제주 4.3은 150 대 1에 이른다는 의 내용도 4.3이 치열한 교전의 결과 발생한 불가피한 희생이 아니라 의도된 학살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절대 다수의 희생자가 비무장 민간인이었다는 사실도 제노사이드 범죄임을 뒷받침해준다.
 
학살·파괴의 방법과 결과를 보더라도 명백해진다. 제주는 4.3을 겪으면서 개인의 삶이 위협받고, 삶의 토대가 파괴되었으며, 공동체가 붕괴되고, 공동체 의식마저 심각하게 훼손당했다.
 
주민을 총살하면서 가족에게 박수치게 하고, 한 동네 사람에게 그 마을 사람을 찔러 죽이도록 강요한 그 살 떨리는 경험과 기억은 생존자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었다.
 
몇 세대가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과 불신감이 제주 사회를 짓눌렀다. 반세기 가까이 무고한 제주도민의 삶에 빨갱이 족쇄를 채워왔던 '연좌제'의 악몽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4.3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겪게 된 물리적·정신적·경제적 파괴와 죽임의 사례는 이미 제노사이드로 공인된 다른 사례들과 차이가 없다.
 
이런 악의 씨앗은 당대에는 복수를 낳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제주의 정체성과 삶의 공동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엘리트 집단의 희생도 컸다. '몰명한(똘똘하거나 다부지지 않은) 사람만 살아남았다', '똑똑한 사람은 다 죽었다'는 절규가 회자될 정도였다.
 
엘리트 제거는 절멸의 의도와 계획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 된다. 그 비율이 전체 구성원의 1% 밖에 안 되는 경우에도 이런 죽음은 국제법상 제노사이드 범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4.3 당시 가해자를 결속시키고 희생자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데올로기는 '빨갱이' 논리였다.  미군정과 국가공권력이 내세웠던 학살의 명분이었다. 이것은 학살자로 하여금 법과 도덕을 지켜야 하는 부담을 사전에 덜어주었다.
 
이 논리의 뿌리를 더듬으면 르완다의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해 갖고 있던 종족주의 감정이나, 터키인이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갖고 있던 인종주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제주 4.3은 제노사이드 범죄이다.
 
제주 4.3의 진실캐기는 이제 역사왜곡에 맛들인 한국 정부에만 맡길 수 없는 세계사 차원의 숙제라고 본다. 나는 이 기회에 제주 4.3에 대한 진실규명과 무고한 인명을 대량학살한 책임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유엔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수호할 의지가 있다면 제주 4.3에 대해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떳떳하게 피맺힌 제주 역사의 광장으로 달려와야 한다. 왜 제주섬이 모반의 섬, 반란의 섬, 죽음의 섬이 됐는가를 유엔도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또 오늘 이 순간까지 광란의 춤을 추고 있는 이스라엘의 민중학살극도 마찬가지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제노사이드 범죄에 대한 국제사회의 단죄를 기대한다. 침묵과 방관으로 야만국가의 공범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Ø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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