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만에 공개되는 3·1운동 관련 판결문과 선언서 원본

기록으로 본 그 날의 함성 독립기념관 겨레의함성관(제4관)에서
장병영기자 | 입력 : 2009/02/27 [12:18]
▲  플러스코리아 © 국가기록원
90년 만에 공개되는 3·1운동 관련 판결문과 선언서 원본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원장 박상덕)과 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은 3·1운동 90주년을 맞아, 국가기록 특별전을 공동개최한다고 밝혔다.

국가기록 특별전은 <기록으로 본 그 날의 함성>이라는 주제로 3월 1일(일)부터 3월 6일(금)까지 독립기념관 겨레의함성관(제4관)에서 열린다.

이번 특별전은 3·1운동 90주년의 의미를 국민과 함께 기리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3·1운동 관련 판결문 원본과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각종 선언서 원본이 일반에 최초로 공개되어 관심을 끈다.

이번에 전시되는 판결문은 민족대표 33인, 유관순 열사, 기생 및 각 지방의 만세시위에 관한 판결문 원본 등이다.

‘민족대표 33인 관련 판결문’(1919)은 손병희, 한용운 등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준비과정과 만세시위에 참여한 지도부의 활동 전반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유관순 판결문에는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아우내장터’ 만세시위 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시위도중 유관순 부친이 사망한 사실과 유관순이 헌병주재소에서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찌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강변한 사실 등이 담겨있다.

또한 3·1운동 관련 선언서로는 3·1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대한 독립여자선언서, 파리 평화회의 독립요구서 등이 전시된다.

3·1독립선언서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것으로, 당시 인쇄된 2만 1,000장의 독립선언서 가운데 한 장이다. 선언서에는 우리나라가 독립국이고 우리민족이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비폭력적·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8독립선언서는 당시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의 명의로 발표한 것이다.

이외에도 파리평화회의 독립요구서를 비롯하여 영문 독립선언서, 자주독립선언서 등 다양한 종류의 선언서 원본을 볼 수 있다.

박상덕 국가기록원장은 “3·1운동 90주년을 맞아 흔히 접할 수 없는 원본기록을 전시한 만큼, 국민과 함께 3·1운동 90주년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  플러스코리아  © 국가기록원
유관순 열사, 손병희선생 외 판결문

*이름/별명 : 유관순(柳寬順) *당시나이 : 18세(12월 17일생)

*본적/주소 :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 *판결기관 : 경성복심법원

*죄명 : 소요 보안법위반 *생산년도 : 1919년

*주문 : 원판결 중 피고관련 부분 취소, 징역 3년 *관리번호 : cja0000139

*판결날짜 : 1919.06.30 *m/f번호 : 00930586

*사건개요 :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자 그 취지에 찬성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관리번호 : cja0000139 *문서번호 : 771433 *성명 : 조인원 외 10인 쪽번호 : 324-344

판결주문 내용보기 : 第一. 피고 유관순(柳寬順)은 경성에 있는 이화학당 생도로서 대정 8년(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자 무리를 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고 계속하여 독립시위운동을 하기 위해 동월 13일 귀향하여 동년 4월 1일 충남 천안군 갈전면 병천시장의 개시를 이용하여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기로 하고 자택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이를 가지고 동일 오후 1시경 동 시장에 가서 동소에서 수천 명의 군중의 무리에 참가해 태극기를 휘두르며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독립시위 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하였고 피고 유중무(柳重武), 김용이(金用伊), 백정운(白正云), 박제석(朴濟奭), 조만형(趙萬衡), 김상훈(金相訓), 조인원(趙仁元), 조병호(趙炳鎬), 박봉래(朴鳳來)는 동년 3월 1일 이후 조선각지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며 독립시위운동을 하는 것의 취지에 찬동하여 그와 동일한 행동을 하기로 하고 동년 4월 1일 오후 1시경 병천 시장으로 건너가 동소에서 운집한 군중단체에 참가하여 이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독립시위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








원본 기사 보기:pluskorea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