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섬진강!

장병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03/11 [14:01]



▲     ©플러스코리아
고려 말엽 우왕 때 왜구들이 하동 쪽에서 강을 건너려고 하자, 진상면 섬거에 살던 수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 나루터로 몰려 와 진을 치고 울부짖어 왜구들이 돌아갔다고 해서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 섬진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 플러스코리아
봄은 어디에서나 오지만 우리는 늘 섬진강의 봄소식에 더 가슴이 설렌다. 왠지 섬진강하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지리산이 엄한 아버지라면 섬진강은 한없이 자애롭고 편안한 할머니 같은 느낌이 든다.

역사적으로도 섬진강 유역은 그 어느 지역보다 고난의 질곡(桎梏)이 깊은 곳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서 영토싸움이 치열한 곳이었으며, 고려 때에는 해로를 통한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     © 플러스코리아
근대사에서도 섬진강은 늘 격변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삼일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섬진강 유역은 분단으로 인한 좌우의 갈등이 격심했는데,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사건에서 극에 이른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섬진강은 또 다시 심한 몸살을 앓게 된다. 남한 빨치산의 조직인 남부군(南部軍)의 총사령관으로 이현상이 임명되면서, 지리산을 본거지로 한 남부군은 섬진강 유역을 격렬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섬진강 유역을 피로 물들인 전투는, 이현상이 1953년 군경합동으로 실시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때 사살되면서 막을 내린다.
이현상은 화개장 섬진강가 백사장에서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졌고, 섬진강은 말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섬진강은 오늘도 말이 없고 유유하다. 공자는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면서 “흐르는 것은 저러하구나.”라고 했다. 배움이 일천한 나는 그 말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지만, 그 말에서 가슴은 떨린다.  

▲     © 플러스코리아
지금 섬진강은 바쁘다. 온갖 봄꽃을 피워내며, 겨우내 품속에서 고이 키운 재첩을 나누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

▲     © 플러스코리아






 

원본 기사 보기:pluskorea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