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해체 ‘진단과 해법’ 선각자적 통찰

<스페셜 리포트> 基督敎에서 바라본 ‘離婚’ 집중조망
소정현기자 | 입력 : 2009/06/05 [00:37]
브레이크뉴스에서는 우리 한국사회의 가파른 이혼폭증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그 추이들을 다각도로 상세 투시하고 있습니다. 이혼의 파국은 교통사고 줄이기 캠페인처럼, 어떤 접점을 치열하게 모색한다면 분명 그 대소망의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우리의 가족이 건강해야 이웃사촌이 웃음꽃 피울 수 있습니다. 경제한파나 환경위기만이 우리를 드세게 압박하고 있다면 이는 큰 낭패를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가정의 희생과 헌신의 전력하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역기능의 후폭풍이 매우 격렬하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가정의 해체라는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 제반의 전 구성원들은 가정복원에 사활을 걸고 뼈를 깎는 노력에 연신 식은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사랑스런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복된 소망을 안고 살아가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응당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브레이크뉴스 스페셜 특집으로는 바이블에 예시된 결혼과 이혼의 규범들을 미시적으로 중점 고찰 규명하여 보았습니다. 특히 본 특집기사는 관련주제 성경연구가들의 통찰에 큰 도움을 받았음에 진정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독자 제현들의 이신전심 공감대 구축을 더욱 요망합니다.<편집자주> 

 
■ 21세기 한국인들, 결혼생활 ‘험난한 고지’

< 에필로그 > 사회 구성의 기초단위이자 든든한 반석이 되는 결혼생활의 요체는 두말 할 것 없이 행복한 부부관계 구축으로 귀결된다. 가정의 중심에 서 있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온갖 어려움 속에서 여러 우여곡절에 직면하며  고통 속에 좌절하거나 또는 현명하게 통과한다. 

굳이 교과서적으로 말할 때, 성격도 엄연히 다르며. 선호하는 것도 상이하기 그지없는 한 남녀가 살아온 과정이 너무 극적으로 판이하기에 진정 하나의 합일체로 녹아들어가기에는 매우 험난한 난코스로 간주된다.

하지만, 하나는 화성에서 또 하나는 금성에서 온 것처럼, 마치 딴 세상의 두 사람이 동거동락의 생활을 힘차게 영위할 때, 놀랍게도 서로 닮았으며 하나처럼 보인다는 말들을 접하곤 한다. 이제는 분명 두 가닥이 아닌  한 가닥의 선을 힘차게 그리며 역동적으로 전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히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지?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지구촌이 치명적 환경오염에 대기가 질식사에 이른 것처럼, 가정의 문제인 부부관계에 있어 파쟁조짐이 절대 예사롭지 않다.

혼인한 남녀 사이에서 인간의 가장 귀중하고 매우 원대한 가치가 지대하게 위협받으면서 결혼생활 및 가족생활이 오늘날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는 관념이나 추상적 대상이 아닌 실제 바로 우리 주변에서 생생하게 목도할 지경에 이르렀는바, 그 적색신호 경고음이 세차게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과서적인 원론적 딜레마의 거듭되는 통찰력 배가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대내외적 환경적 요건에 대해서도 폭넓게 고민하며 심도 깊게 고찰해야만 한다. 먼저, 한국사회에서 부부위기를 초래하는 가정의 외적 요건을 투시할 때, 다음의 부문들을 적극 예의주시해야 한다.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서구의 개인주의 사상이 두드러짐에 따라 가족집단의 중요성 못지않게개인의 존엄성도 매우 긴요하다는 인식이 보편화 추세의 물결을 드세게 타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을 위시 전반적 측면에서 그 참여가 급진전되면서 여성과 남성의 지위 관계, 자기 정체성 등에서 큰 변화와 혼돈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면서 전통적 결혼생활의 토대가 뿌리 체 흔들리고 있다.

특히 우리 한국 사회에서 전통의 가부장적 가족에서 부부중심의 핵가족이 보편화되면서 부부문제가 가족문제의 최대 현안으로서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적극 주시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남성이 가정 밖에서도 가정 의존적이던 요구 해결이 가능해 짐에 따라 이혼율이 급증 가파른 급증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집단 대공범 심리로 간주되듯, 이혼이 수치라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사라졌다. 우려를 더하는 것은 서구 여러 국가들과 비교할 때조차 그 비율은 최상위권에서 그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한층 더 비등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사회 부부관계 대위기 진단에 있어 여성적 측면에서 잠시 그 범주를 좁혀보자면, 여성의 지위 상승, 이혼에 대한 의식과 가치관의 변화, 경제적 능력 향상 등의 원인이 집중 거론된다.

쌍방의 측면에서는 부부관계의 심각한 갈등이 부부위기의 원인이 되며 이혼으로까지 나아가게 됨을 보게 된다. 부부 갈등의 요인은 성장 배경이나 교육수준, 종교, 생활 습관, 성별차이에서 초래되며, 개성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게 되며, 의사소통의 결여와 부부 역할과 성적인 문제와 imf로 인한 경제 문제에서도 비롯됨을 알게 된다.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며 꼬이게 하고 있는 것은 유교적 수직적 인간관계가 지배적인 한국문화에서 대화로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하는데 익숙지 않기에 언어나 신체적 폭력으로 과민반응을 보이거나 문제를 부인하거나 회피하는 등 갈등에 정면 돌파하지 않음으로써 부부관계가 파국으로 내몰리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 결과, 가족 내에서 부부간의 갈등 해소의 접점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될 때, 이혼도 하나의 해결 방법으로써 가능하다는 방향으로 세속적 가치관의 한층 더 팽배해지고 있다.

거듭 주지컨대 가족해체의 대표적 주범인 이혼 문제는 부부의 본질적 위기의 문제이며,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과 친척도 관련된 문제이며, 해체 가족은 청소년 비행, 가출, 미혼모의 사회문제와 불가분 상관성을 유지한다. 특히 그 자녀들에 대해서는 정신적 살인이요,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혼은 한 개인의 문제에만 절대 국한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메가톤급으로 연쇄 파생시키고 있기에 우리 사회는 매머드 홍역을 치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이혼한 당사자가 해결해야 하는 경제적 문제, 이혼으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 이혼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등으로 인해 또 다른 사회문제를 연신 증폭시킨다. 

무엇보다 결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결혼을 계획하시고 실제로 인도하시며 그 주권 가운데 이루신다. 이처럼 결혼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서 알지 못하고 너무 멀리 일탈하여 있기에 자기 임의대로 결혼하고 또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이혼을 쉽게 생각한다.

특히 사회 제반 영역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선도해야할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가정위기의 핵심 요체인 부부위기 문제를 신앙적으로 성경적으로 어떻게 지혜롭게 헤쳐 나갈 것인지 매우 시급하게 그 책임감을 더하도록 압박한다.

냉철하게 말해, 교회공동체에서 선도적 공론화를 회피하고 있어서 그렇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 가운데 최근까지 교회는 결혼과 이혼 및 재혼이라는 영역에 매우 무지한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대다수 목회자들은 가정파국의 조짐이나 현실화에 있어 응당 신속하게 대처해야할 곤혹스런 질문을 매번 당하면서도 정작 어떤 해법을 당차게 제시해야 할지? 무대책으로 미로를 헤매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공동체가 가족, 결혼, 이혼, 재혼에 대해 성경적으로는 문맹인이나 다름없다는 따끔한 질책에 이제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더욱이, 매우 흐트러진 가정위기의 진단과 해법 모색 및 대안 제시를 성경 안에서 엄격하게 재정립해야 하는 문제가 필사적 과제로 냉엄하게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더한다. 현재 기독교인의 가족 공동체 역시 대내적으로는 자유주의 신학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현란한 세속주의의 전면 대공습에 어쩌면 황무지로 급속하게 전락할지 모른다. 

부부위기의 신학적 고찰과 통찰 및 해법강구와 대안제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활을 걸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중차대 문제를 인간적 생각에 수수방관 맡겨 놓은 것을 절대 방치하고 계시지 않다. 신구약의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은 결혼, 이혼과 연관된 문제에 대해 타당한 계시뿐만 아니라 명료하게 단정 짓고 계신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응당 성경적인 원칙과 입장을 갈망해야 하며, 인간의 전통과 흐름에 단호하게 맞서야만 한다. 그 모범 해답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전인류사를 관통해온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생생하게 투시하고 있다. 신구약에는 결혼제도와 이혼제도를 위시 재혼제도까지 일목요연하게 그 요점을 명료하게 적시하고 있다. 이제 성경의 본질에 치밀하게 접근하여 들어가 보도록 한다. 

 
◆ 우리시대 적색경보음 울리는 ‘바이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브리서 13장 4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잠언 2장 17절)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라기 2장 14절)
 
 
바로 이 말씀은 마치 음란의 파고에 실종된 우리 시대를 예견한 것과 같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온다. 21세기 우리 세대들은 얼마나 결혼의 본질적 의미를 훼손시켜 왔는지 통렬함이 더해야만 한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결혼의 본질은 과연 어떻게 정의 내려질까?

결혼은 인격적 경제적 정신적 모든 면에서 자립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 자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결혼을 하면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 한 인격체가 된다. 여기서 몸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포함한다.

자립의 본질성은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바로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결코 다시 나누일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자녀를 생산하는 복을 주시며, 자녀의 출생을 통해 다음 세대에 내려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가정의 골격에 어떻게 치밀하게 조성하셨는지 본격 접근하여 들어가 보도록 한다.

이혼과 재혼 및 결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바이블의 메시지는 신명기 24장 1-4절, 말라기 2장 16절, 마태복음 5장 31-32절, 19장 3-9절, 마가복음 10장 11-12절, 누가복음 16장 18절 등이 대표적이며, 고린도전서 7장 또한 중심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성경은 ‘이혼 ․ 재혼 ․ 결혼’ 이들 3가지 제도에 있어 ‘시대적 전통적’ 요건을 심대하게 통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의 결속에 따른 ‘사회적 통합원리’까지 제시하면서, 이 난제들을 엄격하며 명쾌한 논리로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다.

당대에 기록되었던 말씀들이 ‘정통과 보수 및 진보신학’을 뛰어넘어 현대의 우리 세대에게 조차 무변의 원칙으로 적용되어야 할 그 실체의 헤드라인의 요체를 심층해부 하면서 동시에  자발적 공감대를 이끄는 실천적 통합력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다.

 
● 신구약 각 사례의 다양한 규범들 중점 해부


◇ 신약성경 이혼의 규정모델


∇ 마태복음<19장 3절-10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들이 이같이 할찐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니다.

∇ 마태복음 <5장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 줄 것이라 하였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마가복음 <10장 11-12절>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 누가복음 <16장 18절>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성경에서는 이혼할 수 있는 조건이 유일한데 그것은 바로 간음이다.
세계 각국의 법률은 이혼에 대해 여러 규정을 명문화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규정은 무려 스무여 조항에 이른다.

성경 안에 이혼에 대한 규정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성약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조건에 근거한다. 성경에서는 이혼할 수 있는 조건이 유일한데 그것은 바로 간음이다. 세상법과 비교하여서는 매우 혹독한 철칙이다.

우선 마태복음 19장을 시발로 그 근거들을 가열차게 성찰하여 본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무리가 다시 모여 들었을 때이다. 이 때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던진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무례하게도 예수님을 테스트한 것이다. 즉답 대신 예수님은 이렇게 되묻는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그러자 그들이 기세등등 이렇게 답변한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이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절)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정당한 이유도 없이, 다른 여자와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이혼증서를 써서 내쫓는 일이 적자 않았다. 이혼 증서를 써주었다는 그 한가지만을 명분삼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이러한 일들이 빈번했을 뿐 아니라 당연시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누구든지 버린 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하신다. 얼마나 엄격한 말씀이신가! 여기에서 이중 책임을 묻고 계신 것이다. 전 남편과 후의 남편 모두에게 엄중하게 질책하고 있다. 더욱 상세하게 접근하여 들어가 보도록 하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6절)

본인들끼리 어떤 형태로든, 제 아무리 부부관계를 말소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부 관계가 해소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간음을 행하지 않은 여인에게 장가드는 것이 언뜻 타탕하며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과 한 몸이기 때문에 비록 사람이 임의적으로 나누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한 몸 되게 했기 때문에 여전히 실제로는 한 몸이다. 여기에서 결혼의 주권은 남자 여자가 아닌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설령 세상의 재판관이 둘 사이를 나누게 했을지언정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를 무효로 간주하신다.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는 이혼! 이는 하나님 입장에서 사실혼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혼한 아내가 나가서 다른 남자와 재혼하면 유부녀로서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삼았으니 간음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혼 당하고 다시 재혼함으로서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가 더욱 크다.

전(前) 남편과 후(後) 남편 모두에게 책임의 소지를 전적으로 동일하게 부여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정의 해체와 파괴의 역기능을 얼마나 심대하게 우려하고 계신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엄중한 메시지인 것이다.

거듭 말해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만의 예외를 제외하고서는 어떤 경우에도 이혼불가를 강력 천명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한 처지에 전락한 여인을 친자녀와 같이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통탄해하시면서 한 몸이 된 아내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며, 위 19장 본문에서 그래도 이혼을 하기를 고집하는 완악한 자들에게는 차라리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게 하여 그 아내로 하여금 보호장치를 강구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후반부에서 구약성경 신명기서를  중점으로 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간음을 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 외에 다른 이와 성관계를 가졌다면 당신은 간음을 범한 것이고 부부의 일체성을 파괴한 것이다. 왜 간음을 범하면 이혼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음행 때문에 이혼을 허용하는 것은 교회 안에 누룩이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이런 사례에서만 쌍방 중 하나는 이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재혼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잠시 후에 세밀히 살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한 한 쪽이 회개와 용서를 적극 구한다면 이를 외면한 는 것 역시 합당치 못한 것으로 간주하신다. 바꾸어 말해  간음은 이혼의 유일한 명분을 예시한 것이며, 무조전적 이행 명령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고 계신 것이다.

살펴보았듯, 예수님의 너무 단호한 말씀에 제자들은 결혼이 그렇게 영속적인 것이라면 잘못된 사람과의 결혼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하지 않은 편이 낫겠다라고 하소연한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결혼은 무엇보다 사려 깊고 신중해야만 한다. 이제 본격적 논지에 치열하게 접근하여 보도록 하자.

 
○ 마가복음의 말씀 <10장 7-9절>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간음을 범하지 않았는데 이혼할 때 그 결과는 쌍방이 모두 간음을 범한 것이다. 가령 남편과 아내가 다 간음을 범한 일이 없는데 서로 사이가 안 좋다 하자. 그럼에도 이런 사이에서 일단 이혼하면 곧 간음을 범한 것이다. 그 하나가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개가하고 재혼하는 것은 모두 간음을 범한 것이다. 하나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바로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사별의 경우에만 재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선도적으로 중시해야 한다. 왜 그럴까? 결혼은 사람이 주관과 의사에 따라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짝지워 "한 몸"되게 하신 관계이다. 사람의 몸을 반으로 나눌 수 없듯이 한 몸이 된 부부를 나눌 수 없다. 하나이기 때문에 자르면 사망한다. 만약 쪼갠다면 그것은 한 몸을 절반으로 자르는 것과 같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다.

심하게 다투고 불화함으로써 너무 뜻이 맞지 않아 이혼을 강행하려 할 때, 세상 사람은 동조하고, 세상 법도 이를 심사숙고 검토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이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절대 교과서적인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있는 위 성경 말씀을  온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급진적 희생적 모토로 아무나 절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사람이 실종된 지 몇 년이 되었든, 정신 이상이든, 정신 학대이든 그의 남편이나 아내가 갈라져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하지마누 이런 경우 역시 보편적이지도 흔하지도 않다.

이는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현실성이 지나치게 결여된 매우 극단적인 사고관으로 치부할 수 있다. 물론 치유와 회복의 과정은 무척 험난하고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내와 연단 속에 최종적 승리와 영광의 환호라는 종착역을 소유하고 있음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고린도전서의 말씀 <7장 1절-16절>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만일 갈릴찌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 신약성경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과 이혼 및 재혼의 규례의 초석을 놓았다.


고린도전서를 쓴 사도 바울! 고린도전서의 배경과 요체를 간략히 살필 필요가 있다. 무려 이 천여년 전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타락해 있던 고린도도시에는 이혼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상황을 익히 파악하고 있는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주지시킬  필요를 절감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이 말씀의 요체는 부부가 각자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니 부부는 얼마나 가까운 사이일까? 나의 마음도 나의 감정도 내가 주장하지 않는다면 부부사이에 불화도 없겠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리스도인 이혼 以後 규범<독신과 재결합>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찌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하나님은 분명 이혼을 역겨워하시지만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서조차 ‘재혼’보다 ‘독신과 재결합’에 우선 순위에 두라고 엄명하신다. 여기에서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님이시라 함으로 그 말씀에 권위를 더해 준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리스도인 부부는 한번 결혼은 영원한 결혼이다 사람이 이혼한다 해서 이혼되는 것이 아니고, 갈릴찌라도 갈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헤어졌거든 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화해하여야 한다."  말씀하신 것이다. 지체하지 않고  화해하고 잘못되게 떠난 남편과 재결합하라고 말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화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울이 진정 추구하는 것은 화해이다.

 
▽ 불신 배우자를 둔 성도<1.상대의 의중을 따르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

이스라엘에서 교회의 대대적 핍박이 가중되자, 교회의 중심 반경이 지중해 지역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이에 그리스와 로마에서 회심자들이 대거 탄생했다. 부득불 상대 배우자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나 어느 한쪽이 구원받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 공동체를 확장시키는 한편,  보존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전개되었는데,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명료한 해답을 제시한다.

원칙적으로 결혼은 믿는 자들 간에 하는 것이지만, 본문은 이미 결혼한 처지에서 한 쪽이 믿은 경우에 대해서 말한다. 신앙의 불일치가 이혼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진수이자 요체는 믿는 자가 사랑을 베풀 때 믿지 않는 자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믿는 한 쪽이 불신 배우자와 헤어진 후 자유함으로 아무리 엄청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결국 상대와 헤어져 수천 수만의 영혼을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에게 주어진 바로 그 배우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보고 계신 것이다.

철두철미 "참고 기다리라"는 의미로서 가능한 한 이혼을 막아 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인 이유를 빌미삼아 불신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극단적인 형편이 되었을 경우가 아니면 끝까지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오늘날 극단적 신앙주의자들이 서로 신앙에 있어서 불일치된다 하여 이혼하는 일이 분명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물론 믿음과 사역에 있어부부 중 한 쪽이 불신자일 경우, 파생되는 어려움들은 절대 간단치 않는 일이다. 서로 맞지 않더라도 기도와 희생, 사랑으로 극복해 나가야만 한다. 궁극적으로는 그것만이 진정 나의 자녀를 위한 길이기도 함을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와 함께 산다면 그 남편도 거룩하게 되고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믿는 자의 평화와 인내를 통하여 계속된 결혼 생활이 불신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고, 믿음의 배우자를 통해서 불신 배우자가 깨끗해 질수 있다. 이것은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서신을 통해 가정을 꾸린 믿지 않은 불신자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희생을 촉구했다.

 

▽ 불신 배우자를 둔 성도<2.상대의 요구를 거부하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성경에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 불신 배우자가 원할 때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영적 자녀들의 신앙의 보존을 매우 값진 것으로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의 사례는, 믿는 자 편에서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 편에서 믿음을 포기하게 하고 핍박을 가하면서 이혼 사유로 들고 나왔을 경우이다. 신자쪽에서는 가정을 고수하고 신앙을 사수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헤어지려고 하면,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이다. 신앙에 대용단이 필요함을 말씀하여 주고 있다.

그렇다 해서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 그 이혼이 무조건적으로 신속하게 수용하라는 말씀이 절대 아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는 말씀 따라, 미봉책이나 임의적 편의가 아닌 기독교 공동체 보존과 확장 입장에서 심사숙고하여 최종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불신자에 연루된 말씀을 종합할 때, 불신자와 적극적 이혼이 아닌 수동적 이혼을 허락한 셈이다.

거듭 강조컨대,  본 절은 이미 불신자와 결혼했거나 혹은 결혼 후에 믿게 된 자를 향한 충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불성설 이 구절을 핑계 삼아 아예 처음부터 불신자와 결혼하여 개종시키려는 헛된 망상에 절대 사로 잡혀서는 안 된다. 구원에 대한 명확한 검증도 없이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은 서로에게 욕구 불만과 불필요한 긴장감만 초래할 뿐이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베드로전서 3장 1-4절>

이 말씀처럼, 믿는 자는 믿지 않는 배우자를 위해 그리스도를 영정할 것을 소망하며, 아이들을 위해 결혼을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 모든 것에 심혈을 기울려야 한다. 전 아내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 전 아내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만나거나 결혼하지 않도록 삼가라. 전 아내가(지금 혹은 나중에) 더 이상 그와 화해하고 재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하지 않는다면,그는 반드시 아내의 회심을 기다렸다가 회심한 이후 재혼하기를 구해야 한다. 

 
◇ 재혼이 허용되는 경우

<고린도전서 7장 8-9절>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7장 39절>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것 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로마서 7장 3절>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사별한 과부들에게 정욕을 절제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이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시면서, 혼인 또한 허용하고 계신다.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시대적 상황에 대한 기초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격렬한 소요에 이들 민족을 식민지를  삼는 로마는 어떻게든 유대인들을 궤멸시키려는 구체적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대비극의 사태를 예견한 사도 바울은 홀로 지내는 것이 고통의 강도를 경감시킬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지 않는 경우, 유혹과 비방을 받으며 참견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과부를 돌보는 것이 교회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재혼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여기거나 문제의 소지로 간주하기는커녕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여 재혼하도록 권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바울은 성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과부에 죄를 범죄치 않도록 하는 해소책의 방편과 수단으로 재혼의 규범을 제시한 것이다. 

 
◇ 구약성경 이혼의 규정모델

말라기 2장 16절과 구약의 신명기 24장 1-4절은 당대 유대인 사회의 이혼규례를 적시하면서 현대의 우리들에게 역시 심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말라기 2장 16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신명기 24장 1-4절>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前夫)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혼증서에 대해 첫 기록을 남겼다. louisglanzman.com

 
먼저, 여기에서 수치의 단어인 ‘에르바스 다바르(erwath dabar)’를 살필 필요가 있다. 성경학자들은 여기에서 간음이나 음행의 구체적 단어를 적시하지 않고 포괄적 추상적 개념을 명시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해 ‘에르바스 다바르’가 간음이나 성적으로 불결한 행위를 언급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데 의견의 일치가 모아진 셈이다.

이에 ‘에르바스 다바르’는 음행(간음)을 제외하고 남편이 불쾌하고 혐오스럽다고 여길만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구약의 율법서에는 하나님이 음행한 연고로 이혼을 허락하셨다는 기록이 없을뿐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아 호세아의 시기까지도 이런 흐름에 대한 설명이 포착되지 않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 이 말씀을 여러 각도에서 심도 깊게 투시하여 보면 결코 이혼을 명령하고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인정하고 있지 않다. 다만 어떤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뿐이다. 굳이 이혼을 강행하겠다면, 이 범주에 들지 않은 한 허용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수치는 당대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바람직스럽지 못한 자체 규약이나 선례들에 해당되는 사안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사실에 적극 주목해야 한다. 한 남편이 그의 아내와 이혼했을 경우, 후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면, 그 처음 남편은 다시 그녀를 데려올 수 없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이렇듯, 성경적으로도 절대 용인될 수 없었던 것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하등의 고려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혼한 아내였던 여인이 재혼했다면 두 번째 남편과 이혼을 했다 해도 前 배우자와 결합할 수 없었다. 즉, 남편들로 하여금 아내와 경솔히 이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규례인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사회질서와 가족규례를 크게 오염시킬 것이었다.

쉽게 실례를 들어본다. 어느 사람이 순이와 이혼한 것이 잘못이라면 다시 순이와 재결합하면 되겠지! 순이가 나와 재결합할 수 있다면 순이가 두 번째 남편을 떠나게 해서 내게 돌아올 수 있게만 한다면 가능하지 않겠어! 이를 테면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신명기서의  이 말씀을 기록한 모세는 이 본문에서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엄명한다. “이혼하기 전에 심사숙고해야지. 메리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전에 재결합을 할 수 없으면 영원히 재결합 할 기회를 잃어버릴 테니까 ”라고 모세가 다가와 말하는 듯하다. 그런 규율 아래에서 이혼할 때는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만 했다. 

이렇듯, 본문에 예시된 이혼 규례는 결코 이혼을 장려하기 위한 율법이 아니다. 그 당시 이혼이 만연한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혼을 결행하려는 어떻게든 제어하기 위한 고민이 깊게 서려 있는 율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혼에 대한 구약성경의 메시지는 이혼의 이상적 규범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구제책을 제시한 것이며, 이교도 문화의 영향으로 쉽게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문화에서 구두로 이혼하는 것을 허용한 것과 비교할 때,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이를 상세하게 파악하여 보기로 하자. 신명기에서 소개되는 ‘이혼증서’의 용어의 본질과 휴머니즘 요소를 고찰하면 이런 고민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이전에 유대 사회에서는 이혼증서라는 것이 존재했다. 남자들이 아내를 자의적으로 내쫓는 일이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첨언하자면, 당대에는 남편이 이혼을 허용할 권리가 주어졌지만, 여성이 먼저 이혼을 청구할 권리는 부재했다. 여성의 의사가 적극 존중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남성의 우월적 지위나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이혼을 강권하는 것을 최대한 차단할뿐더러 여자들의 일방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 하에서  모세의 율법을 통해 증서를 통한 이혼을 허락한 것이다.

강조컨대 여호와께서 이혼 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하신 의도는 적극적으로 이혼을 재촉하는 것이 아닌 약자 되는 여자 보호에 초점 맞추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혼 증서 없이 내쫓긴 경우를 상정하여 보기로 하자.

만일 증서 없이 남편이 내쫓을 조차, 남편이 시비를 걸면, 이런 사실을 입증할 유력한 근거인 이혼 증서의 부재로 유부녀의 간통 이라는 죄에 걸려 사형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유부녀 신분 하에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려 할 때 이는 간음으로 간주되어 곧바로 사형에 처해지는 사인이었으므로(신22:22) 이를 보호하는 장치가 절실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혼 증서는 당시 여성들에게 재혼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 주는 신원보증서 같은 제도였다.

따라서 여자에게 이혼증서는 다시 결혼하려 할 때 간음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는 보증서와 같았다. 그래서 이혼증서에는 “당신은 다른 남자에게 아내로 취함을 받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는 문구가 있었고. 두 사람의 증인이 서명 날인을 하였다. 이혼녀를 위한 안전장치 역할을 했던 셈이다. 다른 문화에서는 단지 ‘너와 이혼하였다.’라고 세 번만 말하면 그 선언만으로 인정받았다.

남편의 입장에서 이혼 증서를 쓰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많은 증인 앞에서 선언하는 일종의 의식으로서, 합법적 이유가 아니라면 함부로 아내를 버리거나 경솔히 이혼하는 것을 막도록 제도화한 규례였던 것이다.

이렇듯, 증서에는 제3자의 증인이 필요했으며, 증서를 소유한 여성들을 거짓 참소와 오해로부터 보호했던 것이다. 또한 이혼 증서는 자체 보관이나 제3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닌 직접 상대방에게 이혼증서를 주어 상시 소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증서를 쓰기 위해서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사람이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구두로 이혼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극히 유감스럽게도 유대인 남성들은 이 법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오히려 이 증서를 이혼의 합리적 도구로 적극 활용하였으니, 이처럼 모세의 법을 빙자하여 자신들이 완악함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는 인간이 얼마나 패역하고 교활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예수님 이전의 구약시대까지는 이혼을 당대의 ‘수치’되는 것에 한정하여 예외적으로 허락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묻는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마태복음 19장 7절) 이 물음에 대해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라고 씁쓸하게 대답하신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을 인간의 타락과 죄에 결부시켜 설명하신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듯이, 다른 율법들과 마찬가지로 이혼에 관한 규례 또한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죄가 가정파괴와 해체의 주범임에 경각심의 날을 한층 더 예리하게 세워야만 한다. 
 
 
◇ 왜 성경은 ‘별거’를 죄악시하나?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7장 5절)

현재 우리 시대에서 이혼과 분리되는 ‘별거(chorizo)’는 비성경적 개념이다. 우리들이 통념적으론 인지하고 있는 별거의 개념은 성경에서는 그 특성을 판이하게 달리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성경에서 별거는 이혼 후의 떨어져 사는 것을 말한다.(마 19:6, 고전 7:10, 11, 15) 다시 말해 성경에서의 이혼과 별거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은 격으로서, 우리 시대에 있어 이혼 전후의 별거와는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치 않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결혼 ․ 이혼 ․ 재혼”의 저자인 제이 아담스(jay e. adams)의 성경적 고견을 집중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별거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은 성경의 본질적 요구에 매우 부적합한 反기독교적 발상이다. 오늘날의 별거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단지 문제에 직면해서 해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하게 휴전상태를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별거가 더 나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별거는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파경에 이른 ‘냉각기간’을 제공할 수 있을까? 거의 그렇질 못한다. 부부를 함께 지내게 하는 것이 헤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담자는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별거 기간에 느끼는 일시적 평안함은 자신을 괴롭게 했던 문제에서 잠시 벗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문제 해결로 잘못 오인하는 것이다. 당사자 한쪽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별거하는 기간만큼 좋았던 경우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은 단지 거짓 평화에 불과하다. 실제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이 일시적 안도감에 빠져 버리면 화해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별거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거는 냉정해야 할 때 오히려 용광로의 불을 뜨겁게 달굴 수 있다. 별거에서는 품어서는 안 될 갈망을 더욱 뜨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식어서는 안 되는 관심을 싸늘하게 식힌다. 이렇듯 별거는 화해를 가로막는 너무 큰 장애물이 되어 나중에는 회복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릴 수도 있다.

두 사람이 같은 집에 살면서 일어났던 문제를 별거를 통해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별거는 단지 두 사람 간격을 더 벌어지게 하고 어려움을 더 깊게 만들뿐이다. 물론 아주 짧은 별거는 당사자 중 한명이 짐을 꾸리질 않고 떠나겠다는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부득불 이런 경우라면, 이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직면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별거는 문제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대신 문제에서 도망치는 수단일 뿐이다. 성경적 가르침에 순종 또는 복종하지 않는 한 세상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상담자가 별거 중인 사람을 대할 때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그들을 다시 함께 지내게 하는 일이다.(물론 다시 돌아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그들이 직면한 환경 속에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 이혼사유(음행) 부재-이혼을 강행할 때

<마태복음 18장 15절-17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고린도전서 5장 12절>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고린도전서 6장 1-2절, 5-6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성경시대에는 정부에게 이혼허가를 받지 않았다. 단지 이혼증서를 배우자에게 주면 이혼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변호사를 선임하여 세상 법정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런 흐름들을 미연에 예견한 듯, 통분해 마지않는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서로를 법정으로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아니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결혼 ․ 이혼 ․ 재혼”의 저자인 제이 아담스(jay e. adams)의 성경적 고견을 다시 들어보기로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내를 법정으로 데려가는 것을 금하셨다. 모든 문제를 세속적 법정에서가 아니고 교회를 통해 해결 받아야만 한다. 믿는 자가 변호사를 고용하여 이혼을 논의하는 과정에 있다면 성경을 따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이 상황에 일찍 개입해야만 한다. 사실, 교회는 너무 늦게 개입하여 화근을 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 목사와 직분자들이 이 복잡한 문제를 자초한 셈이다. 좋은 목회는 문제를 더 일찍 파악해서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위의 고린도전서 6장 1절에서 6절의 말씀 따라 변호사를 만나지 않도록 단호하게 요구해거나 또는 철회하도록 해야만 한다. 교회는 즉시 그것에 대해 경고하고 개입해야 한다. 때로는 변호사가 그릇된 상담자처럼 결혼문제(가능한 해결책처럼 이혼 혹은 별거)를 부추키면서 악화시킨다. 가정문제로 시련과 고난속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로 인해 더 복잡한 문제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부터 개입하고 적극 노력해야 한다. 

<누가복음 17장 3-4절>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제1차적으로 문제 해결의 단초이자 핵심은 용서와 화개에 있다. 믿는 자들 사이의 이혼 문제에는 결합의 소망이 있고 화해를 주장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신앙을 고백한 두 그리스도인이 계속 결혼을 유지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메리와 조는 신앙 고백을 한 그리스도인이다. 둘 다 간음죄를 짓지 않았다. 조는 모든 것에 말다툼하고 싸우는 것에 지쳤다. 그리고 이혼을 결행에 옮길 태세이다.

이렇듯, 믿음을 고백한 그리스도인 남편이 아내가 간절히 화해를 원하고 있음에도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고 하자. 계속 화해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서 모든 시도가 실패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 때는 교회에서 한두 사람을 오게 해서 남편과 만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순종은 기본적 헌신에 속한다. 성경에 나오는 화해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면 대부분의 결혼이 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합당한 도움을 받아 급속히 좋아질 수 있다. 화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화해하려고 노력한 믿는 자에게 미해결된 체로 문제가 남아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일 어느 한쪽 혹은 둘 다 화해의 과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면 최후의 가동 수단으로서 교회의 징계 과정이 있다. 제명이라는 최악의 경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계속해서 화해를 거부한다면 교회는 그 대상이 누구이든 불복종의 죄로 제명해야 한다.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복음 18장 17절)  그리스도인의 제명이 믿는 자였던 사람의 위치를 이방인과 세리의 위치로 바꾸어 놓는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에 누룩 같은 존재로서 이 누룩이 삽시간에 퍼지는 것을 응당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 내부나 외부로 큰 해악을 끼칠 것이기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더욱이 제명으로 이끄는 교회의 최종 결정까지는 세상의 민사 재판보다 항상 앞서야 한다. 성경은 믿는 자들의 민사재판을 불허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단호한 이런 조치는 성급한 행동을 자제시키고 화해를 목표로 하는 모든 과정에 사활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해 모든 과정이 실패한 후에야 법적인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일 한 교회에 같이 출석한 부부 중의 한명이 이혼을 강행한 이후 화해와 회개를 받아들이지 않는 체, 성도의 눈총이 부담스러워 다른 교회로 적을 옮겨 신앙생활을 지속하려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교회에 개입을 요구해야 한다. 새교회의 징계권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는데도 새교회에서 그를 교회 성도로 여긴다면, 한쪽 교회의 직분자들이 새교회의 직분자들을 겸손히 만나 도움과 지지, 방향, 격려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최종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 무렵 새교회는 모든 과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새교회에서조차 지속적 권면을 싸늘하게 대한다면 응당 성경적 관점에서 새교회도 이 성도를 제명시켜야 한다.

이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신약시대 이후의 이혼 관점을 제시한 바, 신자의 경우에는 간음을 유일한 허용의 기준으로 삼았다. 누누이 살펴보았듯이, 간음의 죄를 지었을 때, 상대방과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하지 않는다. 다만 이혼을 허락할 뿐이다. 죄를 지은 배우자가 회개한다면, 남편이나 아내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간음 역시 결혼 생활에 엄청난 갈등과 변질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결혼 자체를 궁극적으로 해체시키지 못한다. 간음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화해의 길로 접어들었다면 이혼시키는 것에 진력을 다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과 새로운 관계로 이끈다. 믿는 배우자와의 이혼은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로 제한해야만 한다.

하물며 간음의 대상이 아닌 경우,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진노로서 이혼을 여하간 불허하시며, 이를 관철시키려 하는 성도들에게는 징계의 채찍질을 가중시킬 것 이라는 점이다.

거듭 강조컨대,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간음을 행한 신자와 불신자를 둔 신자, 이들에게는 혼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오히려 부부 중 어느 한 쪽 혹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으므로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혼을 묵허(默許)하셨다는 의미이다. 

 
◆  ‘결혼은 神權’ 사람이 나눌 수 없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세기 2장 24절)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에베소서 5장 31절)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장 5-6절) 


▲ 결혼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거룩하고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함부로 나누는 것은 몸을 나누는 파괴 행위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대역죄가 된다.

 
바로 위의 창세기 2장 24절의 말씀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여기에서  연합하여라는 단어는 아교풀로 단단히 붙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교풀로 두 종이를 붙이면 어떻게 될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찰싹 달라붙는다. 사실 그것을 분리해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태 19장 6절)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될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결혼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거룩하고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함부로 나누는 것은 몸을 나누는 파괴 행위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대역죄가 된다.

예수안의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다를바 없이 이혼의 행렬에 편승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유감스러운 일로 간주된다. 어떤 연유에서 결혼했던 결혼한 이상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이다. 비록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결혼이 아니었다 할지라도우리 믿는 사람들은 가정의 신성함을 지켜 나가야 한다. 참된 신앙의 소유자라 할 것이면 이혼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명심하여 가정의 평화를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살펴보았듯이, 이혼은 가정의 해체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성한 가정을 몰락시키고 사회 불안의 요소도 되기 때문에 특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이혼은 절대 바람직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도전하면서 배은망덕한 행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행위로서, 하나님은 세우시고자 하는데, 이혼은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혼은 비단 부부 두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여파가 너무나 커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 공동체까지 파괴되어진다. 이처럼 대역죄가 어디 있단 말인가? 

 
◆ 위기와 파국의 초점에 냉철하자

▲ 이혼의 사례들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혼은 사랑의 상실과 관계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혼에 대한 반응은 그 슬픔이 포함하는 모든 감정들과 함께 슬픈 반응이다. 기실, 심리적 이혼이 더 일찍 발생한다. 거절, 억압, 불안, 죄책감, 적대감, 자존감의 상실, 삶의 무의미성을 갖게 된다.

이혼의 사례들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며 다루기 쉽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마음의 고통, 깨어진 삶, 처절한 몸부림, 산산조각난 기대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혼이 급증하고 가정의 위기가 심각하게 사회문제와 교회문제로 파급되는 이 시점에서 교회에서 이들 적응 프로그램의 계발과 적용이 시급하게 대두되고 있는바,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우선적으로 ‘이혼의 심리학적 측면’에 대한 다음의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파국’ 심리학적 단계들

<1단계 : 문제의 자각> 이혼에 있어서 첫 단계와 일차적인 위기는 부부의 한쪽이나 둘 모두가 결혼 생활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었거나 불행하다는 공허한 느낌을 가질 때 발생한다. 이 단계에서 서로가 가진 불만을 격의 없이 표출할 수 있도록 힘껏 조력해야 한다. 목회상담자는 결혼에서의 긴장과 고통을 알 수 있도록 관계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2단계 : 이혼을 고려> 분명한 이혼 결정을 내려지지 않았지만 각각은 그들이 함께 살 수 없는 사실들에 골몰하면서 그 근거들을 제시하게 된다. 이 때 죄책감, 공포, 불안, 위축, 분노, 두려움, 공격과 같은 감정을 나타낸다. 목회상담자는 이 단계에서 부부의 문제와 결핍 요건을 충분히 나누도록 양쪽 모두에게 요청해야 한다.

<3단계: 이혼의 결단> 화해의 노력이 성공하면 이혼은 유보되어지고 둘 사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속개되지만, 결혼관계의 개선을 향한 노력이 실패한다면 이혼 결정은 명료해진다. 목회상담자는 이 과정에서 배우자의 한쪽이나 양쪽 모두가 이혼 결정에 이른 적대감과 반감을 표현하도록 하며, 상상이나 잘못 인지된 문제들을 정확하게 인지시켜야 하며 이혼 결정에 따르는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찾도록 해야 한다

<4단계 : 법적절차의 시작> 이혼 결정 후 변호사를 만나게 되고 법적인 과정이 시작된다. 이때에 이혼의 확실성과 사실성에 의한 첫 충격이 두 사람에게 찾아온다.

 
○ 이혼위기 심화 징조들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부부간 적신호는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 일단, 부부간의 완전한 대화 단절이다. 실패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본다. 배우자에 대한 공개적 인신공격도 당사에게든 제3자에게든 서슴지 않는다. 타인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동정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배우자에 대한 비판을 한다. 더욱 세부적으로 그 현상들을 총괄하여 본다.

▽ <자폐현상> 배우자와의 일체 교류를 단절시키고 자신을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고립시킨다. ▽ <자신감 상실> 결혼 생활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실패감과 절망감에 빠지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한 자책감을 갖게 된다. 즉, 존재의미를 상실한다. ▽ <타인의 애정 추구> 배우자로부터 충족되지 못하는 욕구 불만은 타인이나 이성에게 기대고 싶은 욕구로 발전한다. ▽ <포기 현상> 상대방에게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끝났다는 것이다. 배우자나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완전히 포기된 것이다.

이상의 위험 신호를 체험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특징은 배우자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 배신감, 불신감, 분노심, 적개심, 버림받았다는 느낌, 외로움과 두려움, 초조감과 불안감, 회의감  좌절감, 실패감, 자책감,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고수하게 된다.

 
○  갈등증폭 다양성 요체들

<차이에서 오는 갈등> 부부는 성장 배경이나 교육수준, 종교, 생활습관 등에 있어서 많은 차이점이 있다. 주요 차이점은 기대감의 차이이다. 상호 상이한 기대감을 가지고 결혼을 하는데 배우자가 동일한 수준의 기대감을 적극 갈망할 때 문제가 심각하다. 목회상담자는 부부가 상대편 배우자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를 현실 수준으로 재조정해 두어야 한다.

또 다른 차이점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이다. 부부가 각기 자기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생활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욕구불만이 과도하게 축적되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자는 부부가 남성심리와 여성심리에 대해서 연구하고 토론하므로 배우자의 입장에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상담해야 한다.

또 다른 차이점은 개성과 가치관의 차이이다.  이를 서로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하면 심각한 갈등으로 표출된다. 목회 상담자는 갈등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인격적인 성숙, 영적인 성숙을 위한 상담을 해야 한다.

 
<의사소통 결여> 커뮤니케이션이란 상호교류의 과정이다. 상호교류적이란  말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부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하는데, 감정과 생각을 공유할 여건이 부재할 때 갈등이 증폭된다.

클라인벨은 대화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서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법을 배우고 주의깊게 경청하는 법도 숙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투어트는 의사 소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다섯 가지 기술 훈련을 제시하고 있다. 배우자의 말을 더욱 효과적으로 듣기, 자기 표현법을 배우기, 요구하는 것을 배우기, 서로 적절한 피드백 정보를 교환하기, 명료화하기 등이다. 

 
<性的 문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성적(性的)인 존재이다. 성생활은 서로를 위로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강력한 촉진제이자 치료제이다. 부부의 성생활은 하나됨과 친밀감을 더해주는 부부 결속의 수단이며 전인격적인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을 표현하는 최고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성적인 문제는 부부간의 갈등을 야기 시킬 수 있다. 

<경제적 문제> 우리나라에서 imf 이후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어 이혼으로까지 치닫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편의 생활 무능력이 자존감 저하, 폭행, 알콜 중독과 노숙자의 증가로 이어지며 가정의 부부위기에서 핵심 원인으로 앞순위를 다투고 있다. 

 
○ 이혼자녀 사례들 ‘미연에 숙지’


▲ 가정해체로 마음의 상처를 안게 되는 자녀들이 급증 추세에 있다.
이혼은 부모와 자녀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둔감하거나 망각한 듯, 결혼의 문제는 단지 남녀 두 사람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최근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그런 결과로 이 땅에는 점점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마음의 상처를 안게 되는 자녀들이 급증 추세에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주신 명령이 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다스리라!는 명령이시다.(창세기1장 26-28절) 이 명령은 남녀간의 결합만으로 일단락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이들과 함께 삶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이루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는 절대적 관계이다. 어느 누구와  대체할 수 없으며, 깨뜨릴 수도 없다. 여기서 아내와 남편,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관계적 책임을 응당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혼 자녀가 된 자녀들은 다양한 유형의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되는데 연령별 반응은 대략 이러하다.  2-5세 유아는 발달의 퇴행, 의존성, 대소변 못가리기 등의 태도를 보이며 부모의 이혼을 자신의 잘못이나 어떤 행동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시기에는 부모의 이혼에 대해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

6-8세 아동은 이혼을 자기 탓이라고 책임을 느끼며 버려질까봐 두려워하고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부모에 의해 거부되었다고 느끼며 이 연령층이 가장 충격을 받는다. 부모의 재결합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가진다.

9-12세 아동은 이혼한 부모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학교 친구들과도 멀어질 수 있다. 13세 이상의 청소년은 부모의 이혼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강한 분노, 슬픔, 부끄러움 등을 표현한다. 편부모로서의 역할 모델 밖에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에 대한 건전한 태도를 길러 주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목회상담자는 이혼 자녀들이 갖게 될 왜곡된 자아정체성, 정서적 혼란, 이성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의 문제를 파경에 이른 부부들에게 강력하게 주지시키면서 지혜롭게 상담해야 한다.

 
○  이렇게 도움을 주어야

위기의 부부들을 상담하는 데 상담자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부부들의 심정을 따뜻한 자세로 경청하고 공감해야 한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자기 책임과 결혼 생활에 대한 자기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상호 편견과 오해들을 풀고 서로의 신뢰를 회복시키고 이해와 용서의 가치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또한 목회상담자는 위기 상황을 입체적으로 상세 파악하여 적재적소에서 조력을 아끼질 않아야 한다. 촉발된 위기가 일상생활에 어느 정도로 손상을 주는가? 주위사람들에게 얼마나 장애를 주는가? 과거에 치명적인 위기 경험이 있는가? 현실감각이 있는가? 위기해결을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이 존재하는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부부 위기 상담의 목표는 부부로 하여금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직면해서 그 문제를 통하여 성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부부 위기 상담의 목표는 다음에 집중되어야 한다. 

 
▲ 목회상담자는 위기 상황을 입체적으로 상세 파악하여 적재적소에서 조력을 아끼질 않아야 한다.


▽ 막혔던 의사소통의 길을 다시 열고 더욱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술을 터득한다.

▽ 상호간 필요의 충족이 좌절된 것을 계기로 서로 공격하고 보복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

▽ 자신과 관계 속에 많은 장점과 가능성을 활용하여 건설적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다.

▽ 변화 가능성을 인지케 하여 현실적 희망을 품고 변화를 초래하도록 한다.

▽ 실행할 수 있는 변화 계획에 대해 협의 후에 실천한다.

상담에 대해 부정적 반응은 문제를 거부하고 회피하며 위기의 본질과 해결을 위한 대안을 탐색하는 것을 난망하게 할 것이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더욱 멀어질 것이다. 반면, 긍정적 반응은 문제의 본질에 대해 이해를 강화하며 책임의식을 넓힌다. 현실적 상황에서 변화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별하면서 자기의 큰 기대를 포기한다. 도울 수 있는 사람들과 대화의 길을 열어놓는다.

 
◆ ‘지상의 천국’  동반자 구축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창세기 2장 18절)

배우자에 대한 그릇된 역할 기대감은 결혼관계에서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다 준다. 부부간 역할 모형이 재정립되지 않으면 무수하게 갈등이 초래된다. 부부의 역할 모형은 시대적 상황과 문화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 그럼에도 기본적 모형은 성경의 원리에서 탐색해야 한다.
아내가 아이들로 남편의 자리를 채우려고 하며, 헛되이 외로움과 싸우고 있을 때, 혹은 남편이 사업에 파묻히는 것으로 외로움을 채워보려고 할 때, 이는 이미 커다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래에서 남편과 아내는 다른 모든 것 모든 활동보다 서로를 첫 번째 자리에 놓아야 한다.

남편과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는 두 사람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지적, 감정적,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동반자 관계에서 언약은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부부관계는 영구적인 것이며 결코 깨어져서는 안 된다.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다. 가장 근본적이고 으뜸이 되는 제도이다. 언약과 구속력이 있다. 동반자 관계의 언약이다.

동반자란 생각과 목표, 계획과 노력에서 친밀하게 연합된 자를 말한다. 진정한 동반자란 의논할 사람, 돌볼 사람, 기쁨과 어려움, 생각, 두려움, 슬픔, 실망을 나눌 사람 바로 돕는 자가 바로 곁에 있는 것이다. 결혼의 동반자는 느긋하게 쉬며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성의 신비의 영역을 남성의 기질 속에 들여와서 남성이 홀로 있었을 때보다 더 큰 사람이 되게 한다. 마찬가지로 남성의 고유 특질을 아내에게 들여와서 아내의 삶을 질적 양적으로 무르익게 한다. 쌍방이 없었을 때보다 더 풍성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날 인본주의적 상담가들은 그런 지옥 같은 결혼생활에서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라고 되묻는다. 이들뿐만 아니라 세속주의적 매체들 역시이혼을 부추기면서 참고 인내하는 부부는 바보들인 것처럼 묘사하고, 그리스도인들 상담가 가운데 에서 조차 이혼을 합리화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당사자 외에 아무도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성경과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 않는다. 사랑은 인내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꿋꿋이 이겨나가는 것이 진정 참된 인내라 할 것이다. “오래 참고(고린도전서 13장 4절) 허물을 덮어 주며”(고린도전서 13장 7절)라는 말씀 따라, 진정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화평을 보여주고 함께 거룩에 이르게 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함으로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한다. 그 인내와 희생의 열매는, 생명과 평안의 열매들을 가득하게 맺게 될 것이다.  
 
▲ 결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 주신 최상의 선물  
하나님의 뜻과 나라와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는 각 지체들의 아픔과 고통에 더욱 민감해야 할 때이라 생각된다. 부부의 위기인 이혼 문제가 교회에서 성숙하게 다루어져서 더 아름다운 부부로, 부모로, 가정으로, 사회로, 교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를 갈급해야 한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편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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