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진단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하소서> 록펠러의 40년
최형선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12/26 [00:52]
성격은 각 사람의 특징을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나는 스스로를 이기적이고 쉽게 화내는 성격에다 마음에 꿍한 것을 쉽게 풀지 못하는 독선까지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주변에서 변론하는 것을 좋아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남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이들도 많이 본다. 내 짧은 경험에 비추었을 때 다른 이를 비난했던 말들은 나에게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사람은 홀로 격리되어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의미가 사람과 사이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인간의 속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격리되어 도를 닦는 스님들의 몸에서 사리가 발견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큰 고뇌를 했는지를 보여준다. 약간 다른 경우지만 팝콘보고서에 보면 cocooning이라는 성격 유형이 있는데 이는 자기 집을 아지트 삼아 스스로가 선호하는 모든 것을 집에서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솔직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갇힌 이런 사람들에게도 행복은 다른 사이버 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 외에 달리는 생각하기 힘들다.

세상에는 많은 현자들과 지식인들이 존재하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는 적다. 이 세대가 요구하는 인간형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은 가슴에 묻어두는 그런 기억 속의 유물이 아니다. 사랑은 나와 상대를 변화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금융왕 록펠러는 한때 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 받았었다. 이에 록펠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곧 세상을 떠날 텐데 네 마음껏 자선 사업이나 하고 가렴." 록펠러는 그때부터 자선 사업을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아낌없이 주니 가슴이 확 트이면서 마냥 행복해졌다.
 
결국 록펠러는 의사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 무려 40년이나 더 살았다고 한다. 삶은 의사의 진단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돈을 받은 사람들은 꾸어준 이가 잘 되기를 기원한다. 그러한 바람은 바로 현실로 나타나곤 한다. 항상 계산만 하는 사람은 돈의 노예일 뿐이다. 돈은 잘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또 지적하고 싶은 것은 대화의 필요성이다. 인간은 서로 소통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 간다. 조직 사회에서 대화의 부족은 조직원들의 불화로 이어진다.
 
많은 이들이 호소하기를 누구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각자의 존재감을 찾게 해주는 역할은 조직의 지도자가 할 몫이다. 우리 사회에 훌륭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은 서로에게 행복을 공유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디의 독립투쟁 방법은 사타그라하, 즉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간디는 폭력이 더 커다란 폭력을 부른다는 것을 남아프리카 보어족이나 줄루족의 예를 보면서 배웠다.
 
폭력으로 호소하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쉬워 보이지만 비폭력이야 말로 가장 커다란 용기임을 그는 힘있게 증거하였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리는 용기를 강조했다. 그의 가르침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힌두교도뿐 아니라 회교도들 조차 그의 투쟁에 함께 동참케 만들었다. 그리고 서로가 인도인임에 감격할 수 있었다. 화합은 바로 소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영국인들은 서슴없이 처칠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세익스피어를 제치고 영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 문제아였던 처칠을 위대하게 만든 원동력은 그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3수 끝에 들어간 것,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찾아가 비굴함을 보이면서까지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 낸 것 등 그의 도전하는 정신은 영국인들의 삶 속에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그는 의회에 참석했을 때마다 문제에 봉착하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행복은 사랑과 소통과 소망 가운데 존재함을 말하고 싶었다.



원본 기사 보기:breaknews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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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보고 2009/12/26 [12:04] 수정 | 삭제
  • xxx ---- xxx

    잊을 수가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