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풍상 애환…노년의 사랑스런 아내”

<土 曜 隨 筆> 수필가 신상채, ‘저물녘 산골 풍경’
수필가 신상채 | 입력 : 2010/01/08 [14:17]
▲ 신상채
모처럼 아내와 단 둘이 이웃 마을로 나선다. 꼬불꼬불한 고샅에 들어서니 때마침 왁자지껄하게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먼 옛날 고향의 골목길 모퉁이에서 소꿉동무 아무개가 달려 나오던 그 정경이 되살아난다.

이렇게 좁다란 골목길에 들어서면 애틋한 추억에 젖어들고 말 못할 행복감에 눈물이 난다. 낯선 골목길이라 알아보는 이들이 없을 테니 염치불구하고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도 누가 흉을 보지는 않겠지? 

온통 허옇게 센 머리를 감추느라 자주 염색을 해야 하는 저 사람은 얼마나 번거로울지 짠한 마음이 밀려온다. 천하일색(天下一色)이라기에는 어림도 없는 비유일 테고, 그래도 동네일색쯤은 된다던 낯이었는데 어느덧 잔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안타까움에 목이 메는 걸 어쩐다?

흐르는 세월을 거스를 자가 어디 있으랴. 머잖아 손자까지 보게 될 처지이니 이제는 차라리 노년의 안온함을 무방하게 여기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어야겠구나!

힌두교에서는 인생을 4주기로 나누는데 첫손자를 보는 ‘바나프라스타’라는 세번째 시기가 되면, 가업이나 집안일 같은 세상살이에서 물러난다고 한다지만, 난데없이 얼마 전 세상 떠난 전직 대통령의 사진 속 모습이 떠오른다. 자전거 뒤에 손주를 태우고 동네길을 쌩쌩 달리던 그 장면은 이 시대 노년들의 만면에 웃음이 피어오르게 했으리라.

초등학교 1학년 때 옆자리 소녀를 만나면서 생긴 상사병이 워낙 중증이라서 여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는지 어느 날 나타난 아내가 그 소녀로 보여 주저 없이 평생의 반려자로 삼고 말았다.

처녀 시절 동네에서 제법 왈가닥 축에 들었다던 아내가 나를 만나 그 성질 다 죽이고 꼼짝없이 사는 게 신통하다고 사람들이 수군대지만 나는 아내의 마음고생을 너무나 잘 안다.

몰락한 집안 장손에게 시집와서 남들이 쉬이 겪지 않을 몹쓸 일을 무던히도 많이 치렀다. 결혼하자마자 장인의 별세로 한층 어려워진 친정 생각에 오목  가슴에는 늘 무엇이 얹힌 것처럼 큰 멍울을 달고 살았다.

또 오랫동안 중병을 앓는 시부모들 수발하느라 또래 아낙들처럼 마음 놓고 외출 한 번도 할 수 없는 젊은 날을 보냈다. 사람들은 효부상을 주어야 한다고 추천했지만 아내는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끝내 상 받기를 사양했다.

30년을 넘게 같이 살았어도 성격이나 취미가 너무 딴판이라 못마땅한 구석이 많지만, 그럴 때마다 부모님 간병하느라 고생시킨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마음을 다잡아보곤 한다.

사실 남편이란 작자는 또 얼마나 애물단지였던가? 제 목줄을 쥐다시피 한 까마득히 높은 상사와의 회식자리에서 소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부르라는 지엄한 명령을 거부한 것이 큰 화근이었다.

죄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괘씸죄에 걸려 좌천과 핍박에 시달리는 벽창호 같은 남편 때문에 그 고충이 오죽했을까? 부러질지언정 결코 굽히지 않는 대쪽 같은 성미라서 지켜보는 가족들은 늘 마음을 졸여야 했다. 

“상사가 거짓말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는 순진한 이유로 공직생활 3년 만에 대책도 없이 사표를 던진 것은 수난시대의 서막에 불과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의한 상사에 맞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병통이 도졌으니 그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었을 게 뻔하지. 그런 험하고 고단한 판에도 아내는 늘 남편을 믿고 말없이 따라주었지 

부양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남처럼 둥글둥글하게 살지 못하냐며 원망할 만도 하건만 단 한 번도 그런 남편의 결정에 시비를 건 적은 없었다. 심지어는 남편을 설득하라는 온갖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도, “내 남편의 신념은 아무도 꺾을 수 없다.”며 담담하게 응수했다지 않던가? 집안 대소사로는 자주 다투지만 공적인 일에는 단 한 번도 끼어들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순종적 처신으로 일관했지.

산골에 산지 5년이나 되었고 옆 골짜기에 더 큰 마을이 있지만, 워낙 비위가 없어 여태 한 번도 그곳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하루 종일 꾸무럭한 날씨 탓에 집밖을 벗어나지 않았더니 저녁 무렵이 되자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다.

어제 서울 친지의 결혼식에 다녀온 아내는 피곤한지 자꾸 누우려고만 하더니, 늦은 오후의 외출에 길동무하자고 조르자 의외로 선뜻 따라나선다. 둘만의 나들이가 수상한지 행선지를 묻는 아들 녀석에게는, “저녁 식탁에 올릴 상추 한 단을 사러간다.”는 엉뚱한 핑계로 둘러댄다. 

요즈음 아내는 평소에 하지 않던 언행이 부쩍 잦아졌다. 말수는 늘었고 걸을 때면 바짝 붙어 팔짱을 끼려 하는 통에 멋쩍어서 나는 주위를 살피기 일쑤다.

오늘도 마치 외국여행이나 하는 것처럼 데이트 내내 들뜬 기색이 역력하다. 젊은 날 오붓하게 지내지 못한 아쉬움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이 ............

산골은 아랫마을보다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긴 산 그림자가 마을을 감싸는 저물녘 어둑한 골목길로 귀가하는 늙은 부부는 아직도 두 손을 놓지 않는다.

멋들어진 동양화속 선경(仙境)이 눈앞에 펼쳐지고 비온 뒤 앞산에 걸린 흰 구름떼가 우리 쪽으로 달려드는 것 같다. 산 그림자에 둘러싸이고 흰 구름에 휘감겨 오늘밤엔 깊은 잠에 빠져들겠구나. 내일 아침 산새들이 창밖에 찾아와 단잠을 깨울 때까지.......



▽ 신 상 채 프로필

- 전남 고흥 출생
- 한국문인협회 회원
- 경찰문인협회 회원 
- 문예사조 수필부문 신인상
- 김제,순창,전주덕진,부안,군산
완주,익산경찰서장 역임
- 녹조근정훈장








원본 기사 보기:breaknews전북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