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사회의 ‘인성’, 그 기만성에 관하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한국 대학교수 사회의 부끄러운 현실
이순철 법학박사 | 입력 : 2010/04/05 [08:55]
[편집부 주] 한국의 대학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그것은 대학교수의 임용과 재임용의 기준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아니함이다. 더러들 전문능력과 자질보다는 "인성"을 중시하나, 그것은 위선과 가식을 조장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이 글은 지난 20년 간 대학교수 재임용제를 온 몸으로 부닥치며 살아온 필자가 대학사회에 내리치는 죽비(竹扉)다.
 
교육 얘기만 나오면 따라 나오는 것이 인성교육이 안 되어서 어쩌고 하는 말들이다. 초중등에서만이 아니라 전문교육기관인 대학에서까지 이 말이 일상처럼 들먹여 진다. 오래 전에 대학교수를 뽑는 덕목(criteria)을 두고 학계의 원로 한 분과 대화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하는 분이고, 닮으려고 노력한다. 나의 전공분야에서 당당하게 삶을 살아 온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분과 나의 생각이 크게, 그리고 유일하게 서로 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 분은 지원자의 인품을 중점적으로 보아야지, 잘 못 데려오면 큰 분란 일어난다는 것이다. 성공한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큰 대학의 총장까지 지낸 분이라 조직의 원만한 운영을 염두에 두었으려니 하면서도 속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분 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내 주위의 존경하고 친하게 지내는 많은 분들이 이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자 이전에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다. 참 좋은 말이고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대학교수를 뽑는 첫 번째 덕목이 과연 사람 됨됨이라야 할까? 사람은 이미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이 도대체 어디까지 되어야 제대로 된다는 것인가?
 
잘 알려지지 않는 치부... 비일비재한 위선과 가식들
 
결코 제대로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람을 찾고 앉아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 몇 년 전 재임용탈락 사건 재판장을 향하여 석궁을 쏘았다는 전직교수, 계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학총장들의 표절사태들과 연구윤리 문제들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글머리에 던진 인성이니, 인품이나 인화의 문제가 결국은 얼마나 거짓과 위선을 조장하고 있는가를 몸으로 겪고 느껴온 사람이다.
 
다소 건너뛰어서 결론에 이르는 감이 있지만, 나는 인품이나 인격은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능력이 없는 자, 당당하지 못한 자는 결국 변칙을 쓴다. 정면 돌파를 못하니까. 꼼수를 쓰는 것이다. 단적으로, 아니 내가 비교적 오류를 덜 범할 수 있는 분야인 대학교수 사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학교수라는 것이 일단 전공 공부를 많이 한 자들의 집단임을 부인할 수 없으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공부를 많이 한 자가 그 인격도 고매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격에서 문제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평범하게 사회생활 해온 사람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남들 놀 때, 혼자 책 보고, 남들 돈 벌 때, 돈 안 되는 학생들과 토론을 좋아 하니, 인화도 처세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공부와 돈, 처세에 다 같이 능한 사람도 많고 바람직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교수사회의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동료 교수가 나보다 실력이 좋다’, ‘연구실에 처 박혀 있는 시간이 훨씬 길다’, ‘외국어를 더 많이 하고 잘 한다’, ‘책을 더 많이 읽었다’.......동료교수가 이 같은 덕목을 가지고 있다면 교수를 천직으로 여기는 필자 한테는 더 할 수 없는 행운이다. 바로 내 곁에 그런 좋은 동료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나는 그런 이들과의 잦은 교환(contact)을 통하여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밤을 새워 따라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 재미로 사는 것이 학문사회의 달콤한 참맛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대학교수들은 결코 그렇지를 못한 데서 석궁 사건으로 웅변되는 일들이 벌어지는게 아닌가 한다.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아서 그렇지 현재 대학사회에서는 석궁 사건보다 더 한 일도 무수히 벌어지고 있다.
 
자신보다 늦게 임용받은 교수가 공부를 제대로 하고, 학생들의 인기가 모아지면 공연히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그 수준을 따라 가려는 플러스적인 사고보다는 오히려 괜찮은 그 동료 교수를 내려 앉히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마이너스적인 사고관인 셈이다.
 
공부보다는 처세에 능숙한 그들은 대학에서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보다는 어떻게 하면 보직을 맡을 수 있을까 안달한다. 보직을 맡게되면, 연구를 안 해도, 그리고 업적이 부족하다고 해도 승진이 보장되고 재임용은 두말할 것도 없다. 또한 대학사회를 모르는 일반인들의 인식에 처장, 학장, 대학원장 맡았으니 출세했다고 부러워한다. 그런 사람들이 다음 잘 나아가는 곳은 대개 청와대나 여의도이기도 하니까.
 
그 같은 융숭한 세간의 평가를 안락의자에 편안히 누워 그저 즐길 뿐이다. 연구라는 고난의 의자에는 앉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누리기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또 하나의 권력을 갖고 있다. 바로 유능하고 ‘인화가 안 좋은’ 교수를 승진 누락, 재임용 탈락시키는 권한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교수사회의 문제점 그대로 답습하는 학생들
 
학생들은 어떤가. 씁쓸한 세태이지만 필자의 시선으로는 요즘 학생들은 교수보다 훨씬 더 처세에 능하다. 그들은 공부만을 쫒아 좋아 교수가 된, 그러나 인화성 없는 저네 교수더러 ‘머리가 나쁘다’고 한다. 애칭으로 그렇기도 하지만, 아예 멸시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런 학생들은 보직을 맡고 있는 이른바 힘 있는 교수 편을 기웃거린다. 학점이 보장되고, 졸업 후도 보장되어서 그럴까? 또 그들은 전공지식을 열심히 습득하여 잘 가르치는 것보다는 취직을 잘 시키는, 취업알선에 능한 교수가 더 좋은 교수로 떠 받든다. 하기야 대학은 이미 취업학원이 되어버린지 오래니까 어쩔수 없다고 해야할까?
 
교수들한테 따돌림 당해, 학생들은 겉으로만 좋아해. 그렇게 되면 대학에는 정작 남아야 할 교수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자들의 판이 되어 버린다. 결국 새로 오는 교수도 기득권 세력들의 입맛에 맞는 자들로만 채워진다. 인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입학할 때, 비교적 순수하게 들어온 학생들이 몇 년 남짓동안 인성 좋은 교수(?) 밑에서 ‘세상 맛’을 보고 나면 타락해서 학교를 나간다.
 
이러한 현실에서 제대로 된 대학교수가 얼마나 남아 날 수 있는가, 적어도 침묵하면서라도 말이다. 그렇게 제 공부라도 할 수 있는 교수가 남아있는 대학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여 제대로 된 교수가 한 명도 남아나지 아니한 대학보다 나을테지만 더욱 큰 문제는 지금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크게 호응 받기 힘든 세상이라는 것이다.  
 
▲ 이순철 교수 자료사진     ©편집부
능력이 없는 자는 당당하지 못하다. 당당하지 못한 자는 정면에서 말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뒤에서 말하는 자는 비겁하고 치졸한 술수로 세상을 산다. 비열과 술수를 무기로 하는 자들은 남과 저를 죽이고 조직을 죽인다. 작은 조직을 죽이는 자는 결국 국가 사회를 망친다.
 
그래서 이 사회는 능력 있는 자가 즉, 당당한 자가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능력은 대학교수에게 있어 전공실력을 말한다.
 
전공실력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말 되지 않는 논문을 양산하거나, 육두문자 섞인 강의로 불쌍한 아이들 웃기는 한 시간을 허비하는 자들을 말함이 아니다. 별 볼일 없는 내용을 부지런히 토해내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열심히 읽고 더 생각하는 교수를 말하는 것이다.
 
인성이니, 인화니 하는 하나마나한 소리로 사람을 평가하고, 특히, 진리와 정의를 추구한다는 대학교수를 그 따위 위선적 기준으로 옭죄려는 이 사회가 희망이 없다고 보는 이유이다. 그래서 대학교수 임용기준은, 재임용기준은 엄정한 업적심사라야 한다. 인성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만이니까.


                                               [ 본보 제휴사: 신문고 ]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