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정치혁명을 주도하는 젊은 리더들

김지호 | 입력 : 2010/06/12 [12:48]
의회민주주의의 대명사, 500년 전통의 영국의 국회의사당 the parliament. 글로벌 파고를 맞아 출렁이는 영국호의 사령탑인 이곳에 젊은 ceo들이 새로 탄생했다. 5월 6일 실시된 총선을 통해 과반에는 못 미치지만 제1당이 된 보수당이 제 3당인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이러한 연립정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이 이끌었던 전시내각 이후 처음이다. 

▲  영국 국회의사당 the parliament   ©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the parliament의 공식적인 대표이사는 first lord of the treasury 이며 20세기 초부터 더 이상 별도로 선임하지 않고 수상인 prime minister가 겸직해왔다. 흔히 수상관저라고 알고 있는 다우닝가 10번지는 바로 first lord of the treasury의 관저이고, 11번지는 second lord of the treasury 즉 재무상인 chancellor of the exchequer의 관저인 것이다. 공식적으로 수상에게 제공된 관저는 버킹험셔에 소재한 주말 별장인 chequer 밖에 없다.


▲ 수상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downing street)  ©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2005년부터 야당이었던 보수당을 이끌어 온 데이비드 카메론(david cameron) 당수는, 이번 총선에 이은 연정의 성공으로, 약관 43살의 나이에 200년 만의 영국 최연소 수상이 되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숙부로서 적자가 없었던, 윌리엄 4세의 서자계열 후손이며 이튼 스쿨과 옥스포드 대학을 나온 수재로서, 당내의 서민친화적 진보주의자다. 자민당의 닉 클레그(nick clegg) 당수는, 카메론 수상과 동갑인 43살이고 케임브리지 출신으로서, 국회의원이 된지 5년 만에 부수상의 위치에 올랐다.

총선을 통해 13년의 노동당 장기집권을 종식시킨, 보수당과 카메론 수상이 혁명의 주인공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최대의 수혜자는 자민당과 클레그 당수라고 할 수 있다. 제3당으로서 정치 일선에서는 늘 소외될 수 밖에 없었던 자민당이, 이번의 연정을 통해 총 23명의 각료 중 부수상이 된 클레그를 포함하여 5명을 포진시킴으로써,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유권자들의 성향이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아 어떤 당도 과반수를 차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총선 전 여론조사를 통해 짐작한 결과였다. 이 경우에 일반적인 예상은 보수당과 군소정당, 또는 노동당과 자민당의 연합이었다. 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자민당이, 보수당과는 이념과 정책의 차이가 큰, 오히려 노동당에 가까운 진보성향이기 때문이다.

보수-자민 연정은 5일간의 어려운 협상 끝에 타결되었으나, 당 안팎 강경파들의 반대와 주고받기 거래라는 비난여론을 무마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클레그 당수는 “경제회복을 위한 정국의 안정을 최우선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표에 나타난 유권자들의 요구에 거스를 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자민당이 노동당과의 연합하여 노동-자민 정권을 수립할 수도 있겠지만, 두 당이 합친 의석수가 근소한 차이로 과반에 미달하여 주요사안들을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렵게 보였던 이질적 세력간의 연정이 큰 무리 없이 성사 된 것은, 노동당의 고든 브라운 전 수상이 욕심을 버리고 조기퇴진입장을 밝혀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역시 변화를 선택한 국민들의 표심에 반해 맞서지는 않았던 것이다. 성숙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브라운이 수상직을 사임하지 않고 노동-자민 소수정부 구성을 시도하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의회를 회산한 후 재선거를 하는 옵션들이 남아 있었다. 관례법에 기초한 영국의 법에는 수상을 해임하거나 수상이 되기 위한 절차를 명기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다음과 같은 수상의 기본적인 자격요건만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첫째, 하원이나 상원의 멤버. 둘째, 큰 정당의 리더. 셋째, 하원의 과반수 이상이나 총선에서 제일 많은 의석을 차지한 정당으로부터 위임 받은 자.’

실제로 소수정당이 정권을 구성하려 했던 선례가 있었다. 1974년 총선에서도 과반의석을 획득한 정당이 없었다. 전체 득표수에서는 집권당이던 보수당이 노동당에 비해 0.7% 앞섰으나, 표가 우위지역에 과다하게 쏠려 실제로 획득한 의석수에서는 4석이 뒤졌다. 보수당의 히드 수상이 전체 득표수 우위를 명분으로 수상직을 유지한 채 자민당과 연정으로 정부를 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자민당이 제시한 선거방식 개정을 포함한 과다한 요구를 거절한 히드 수상이 사임함에 따라, 노동당의 윌슨이 소수정부를 구성하고 수상이 된 것이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영국 수상은 반드시 하원에서 선출한다는 것도 정확한 말은 아니다. 영국역사에서 수상은 하원뿐 아니라 상원에서도 배출되었으나, 100년 전 발생했던 상원과 하원의 5년에 걸친 힘겨루기에서 하원이 주도권을 잡게 된 후, 줄곧 하원의 리더들이 왕에게 가서 자신을 임명해 줄 것을 청원해 왔기 때문에, 상원에서 수상을 배출하지 못했던, 혹은 않았던, 것뿐이다. 1911년에 하원주도로 제정한 parliament act 에 따라 오늘날까지 first lord of the treasury를 별도로 뽑지 않고 수상인 prime minister가 겸직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관례법에 의해 확정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바 없다.

오늘날 총선에서 승리한 당의 대표가 prime minister가 되기 위해 국가 주권자인 왕에게 청원하여 임명을 받는 절차의 개념은, first lord of the treasury 로서 국가 운영에 대한 위임을 받는 것이다.  

<수상직을 상원에서 다시 가져오려 시도했다는 야화가 있다.>

▲처칠 동상   © 런던타임즈
아버지 죠지 6세의 서거로 엘리자베스 2세가 대관식을 준비하던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1951년 10월 총선에서 처칠 수상이 이끄는 보수당이 집권당이던 노동당에 과반에 못 미치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자, 일부에서 prime minster를 상원에서 선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78세이던 귀족가문의 처칠에게 두번째인 수상직에는 큰 미련이 없는 입장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를 무척 좋아했고 수상하면 처칠 이라고만 여겼던 25살의 젊은 엘리자베스가 처칠을 고집함으로써, 이런 시도가 무산되었다는 야화가 전해진다.      

이번에 왕족 후손인 카메론의 보수당이 제1당이 된 상황에서 노동당이 자민당 등과의 연정으로 정권을 구성하려 무리한 시도를 했다면, 아마도 수상을 다시 상원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와 논란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전후 60년 만에 탄생한 혁명적인 연합정권은 여러 가지로 독특한 면이 돋보인다. 보수당의 왕족서민과 진보당의 서민귀족의 조합, 유서 깊은 경쟁상대인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의 연합, 젊음과 젊음의 투합으로서 극과 극이 서로를 중화시킨 조화인 셈이다. 이는 양 극단을 피하고 중도와 조화 속에서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들의 표심이 만든 성숙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두 리더는 재정적자를 줄이고 경제를 회복시키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선정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또한 향후 상원인원의 감축과 선거방식의 혁신안도 제시했다. 경제 불안의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정치개혁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을 중시하는 원로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이들 두 젊은 리더들이 어떻게 슬기롭게 해쳐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혁명적인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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