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가죽깔개, 명성황후 것이 아니다(?)

[주장] 국립중앙박물관의 명성황후 관련성 부정은 경솔
송영한 | 입력 : 2010/07/23 [11:49]
  
  
▲ <라이프> 지가 보도한 명성황후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표범가죽카펫     © 문화재제자리찾기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21일 "명성황후 표범가죽깔개(오마이뉴스 5월17일 자 보도기사: 25달러에 팔려간 명성황후 표범카펫, 행방묘연)로 알려진 대한제국기의 표피(豹皮) 유물이 명성황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기자가 활동하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이 오는 8월 5일부터 명성황후 표범가죽깔개를 공개, 전시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 환영한다. 그러나 명성황후 표범가죽깔개에 대한 발견과 전시 경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 없이, 명성황후의 관령성을 부인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표피 유물의 오얏꽃문양이 대한제국 이전에 사용된 사례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표피 유물에 있는 문양은 매우 정돈된 형태를 하고 있어 대한제국 성립 이후의 유물이 확실하다는 것이 자문위원들의 결론"이라면서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문제의 표범가죽깔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 길트너에 의해 25달러에 팔려 미국 콜로라도까지 갔다가 반환받은 특이한 이력의 물건이다. 당시 미국 언론은 이 표범가죽깔개를 10만 달러의 가치를 갖는 명성황후가 썼던 깔개라고 보도했고 <라이프지>를 비롯한 언론에서 다루어졌다.
 
그런 우여곡절을 통해 반환된 문화재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깔개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60년 동안 단 한 번의 공개 없이 수장고에 방치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5월 문화재제자리찾기가 깔개에 대한 소재에 문제를 제기하고 감사원에 국민감사청구를 접수한 후 비로소 소장 사실을 시인한 바 있다.
 
소장사실을 확인할 때도 마치 국립중앙박물관은 스스로 공개하는 듯한 인상을 심으려고 노력했다. 시민단체와 민원인들의 계속된 노력으로 명성황후 표범죽깔개의 소재가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이 없었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8월 5일 역사적 유물의 공개에 앞서 충분한 자료 검토 없이 표범가죽깔개와 명성황후와의 관련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이 사건과 관련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잘못을 상세히 지적하고자 한다.
 
호피와 표피도 구분 못하는 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5월 표범가죽깔개의 소장사실을 공개하면서, 유물번호 덕근 201호란 자료를 공개했다. 그런데 이 목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호피(虎皮)라고 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의 깔개는 호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표피(豹皮)로 만든 것임을 상기할 때 이것이 정확한 유물목록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 없게 한다.
 
표피를 호피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가 호피와 표피를 구분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이란 걸 인정하는 꼴이 돼 버리고 만다. 또한 표범가죽깔개는 단순히 호피, 혹은 표피라고 기재할 유물이 아니다. 호피가 지시하는 대상물은 호피의 가죽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지 가공된 깔개를 지칭하는 물건이 아니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제시한 덕근 201호란 유물목록은 다른 유물(호피 자체를 지칭한다고 판단함)의 목록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표범가죽깔개는 유물번호조차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 ▲ 라이프지 기사 한 미군 병사가 표범가죽카펫을 25달러에 구입했다가 압수당해 한국대사관에 반환했다는 기사를 실은 1951년 8월20일자 라이프     ©문화재제자리찾기, 라이프지

 
국립중앙박물관, 표범가죽깔개 근거자료 있나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깔개 반환과 관련된 아무런 근거자료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표범가죽깔개는 1951년 길트너 병사가 불법 반출한 뒤, 미국 국무부의 아델리아 홀 여사의 주도로 인해 반환된 경과를 갖고 있다. 따라서 미국 메릴랜드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된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열람하기 전에는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없는 셈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가 정부기관에 수차례 질의한 결과, 우리 정부는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국립중앙박물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유물의 반출경위, 반환 경위, 반환 논의 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판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아델리아 홀 레코드의 자료를 입수한 뒤 신중하게 검토해 명성황후와 표범가죽깔개의 관계를 정리해야지, 표피 문양만을 근거로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경솔한 일이다.
 
표범가죽깔개와 관련된 미국 신문기사는 1951년 당시를 기자가 직접 취재해서 남긴 보도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주요정보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미국 기사들은 표범가죽깔개의 주인이 명성황후였다고 다루고 있다.  뉴욕주재 한국영사 데이비드 남궁은 "이 표범가죽깔개는 한국의 궁궐에 있었고, 명성황후가 사용하던 것"이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미국 정부에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고 한다(<헤럴드 트리뷴><라이프> 등 보도).
 
남궁 영사가 이런 성명서를 발표한 이면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확인절차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라이프>는 사진기자를 직접 서울에 보내 당시 깔개를 도난당한 장소까지 명기하고 있다. 이런 것을 참고할 때 표범가죽깔개가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은 높다.
 
게다가 미국에 현존하고 있는 아델리아 홀 레코드에는 당시 한국 측으로부터 전달받은 명성황후, 창덕궁과 연관된 메모자료, 서신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이 1951년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상반되게 표범가죽깔개와 명성황후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런 자세는 당시의 한국 정부가 표범가죽깔개를 반환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오얏꽃문양으로 명성황후와 관련성 판단은 경솔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깔개 뒷면에 있는 오얏꽃문양은 (문양이 공식화된 1897년 대한제국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 대한제국의 성립 이후에 넣은 것"라며 "이것이 명성황후의 깔개가 아니라는 결정적 단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얏꽃문양은 황실재산을 표기하거나 황제가 사용했을 때 얼마든지 후에 부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국립중앙박물관도 밝혔다시피 대한제국 전에도 사용한 예가 있으므로 결정적 단서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라이프> 기사에는 황제가 겨울여행에 이 깔개를 사용한 적이 있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궁궐 밖으로 겨울 여행을 떠난 왕은 조선역사상 순종 밖에 없으므로, 순종이 겨울에 지방 순시 중 이 깔개를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후대에 황제가 사용했음을 기념하기 위해 얼마든지 오얏꽃문양 장식을 깔개에 넣을 수 있는 셈이다.
 
표범가죽깔개는 명성황후가 남긴 유물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을 증언해 주는 유물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경위를 조사하고 전시해야 할 유물을 방치했던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커다란 과실이다.
 
나아가 깔개의 소재파악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음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명성황후와의 관련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으뜸에 오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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