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 역사적 국가묘역으로 복원될 수 있을까!

(사)역사복원국민운동본부, 정부에 장충단복원 요구, 삼성에 앞장서라고 충고
김란기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장 | 입력 : 2011/07/11 [10:32]
서민들의 정서서린 장충단공원의 어제와 오늘

안개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 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 앉고
울고만 있을까?


요절한 70년대 가수 배호의 ‘안개낀 장충당공원’의 첫대목이다.
이 노래는 1967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60년대 후반, 보릿고개를 넘어서기 위해서 몸부림치던 시대의 노래이다.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아쉬움을 달래가면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었을까?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청춘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것일까? 그리고 그때도(아직도) 그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혹시 아직 남아 있는 <장충단비>에 적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은 아니었을까?

그런 장충단공원에 최근에 이상한 한옥건물이 한 채 새로 들어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충단공원의 조금 안쪽, 좀 더 설명하자면 ‘장충단’이라는 비석을 지나 더 깊이 들어가면 동국대 후문으로 들어가는 길목 앞에 있다.

이 한옥은 어떤 건물일까?
서울시가 시비(市費)를 들여 지은 음식점 건물이다. 찻집으로 운영하도록 위탁업체에 주었다지만 과실주같은 주류도 판다고 한다. 사람들은 분개한다. 여기가 어떤 자리인데 음식점을 짓고 술까지 파는 것이냐고.
 
▲ 최근에 장충단공원에 들어선 음식점. 찻집으로 위탁운영된다지만 술도 팔고 있었다.                       © 역사복원신문

▲ 장충단제단은 파괴 후 복원되지 않고 입구에 서있던 비석만 외로이 옮겨져있어 당시의 슬픈 사연을 말해주고 있다.  

 
장충단(獎忠壇)은 ‘전망사졸(戰亡士卒)’위한 ‘국가묘역’이었다

장충단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 앞, 바람 앞에 등불 같던 근대시기에, 고종이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을 위한 제단을 건립하고 건물들을 지어, 이 일대를 성역화하여 1년에 두 번씩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오던 곳이다. 여기에서 동학농민전쟁 당시 관군으로 싸우다가 전사한 전몰장병과, 민비가 시해당할 때 온몸으로 막아 일본의 낭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충신들을 배향하였고 이후로 정기적으로 추모하는 국가 묘역이 된 곳이다.

▲  장충단의 제단(단사(壇祠))로 여겨지는 옛 사진. 고종이 집무했던 대한제국의 정궁 경운궁(덕
수궁)과 원구단(환구단)을 향하여 서향하고 있다. 호텔신라 건물의 바로 뒤 언던 위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바로 앞 골짜기에는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인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이
있었고 그 건너에는 부속건물 9체가 있었다. 지금은 공원의 체육시설들이 차지하고 있거나 이상한 한
옥음식점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복원신문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이곳은 조선총독부가 훼손하여 체육공원으로 만들고 벚나무를 심어 민족정신을 희석시키고 유원지로 만들어 버린 곳이 되었다. 마치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어 조선왕조의 전통성을 말살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더욱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저격하여 살해한 조선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을 이곳에 설치함으로써 조선의 백성들을 능멸하고 식민지 압제를 강화하였다. 그 사당은 경복궁의 선원전을 뜯어오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이축해와 지었으며 그 이름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博文寺)라고 하였다.
 
이것은 1932년의 일이고 이후부터는 일제의 지배자들, 친일파 관료들이 매년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사당이 되었다. 또한 1935년에는 고종이 새로운 국가체제를 세워 만천하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원구단의 석고각(石鼓閣)을 이전해 와서 종각까지 지었다.
 
▲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가 들어선 장충단.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한 정문(경춘문)이 있고 박문사본당과 그 옆에 원구단의 석고각을 이전해서 만든 종각이 보인다.                                                                              © 역사복원신문


 
해방 후에도 장충단은 험난한 길을 걸었다

그런데 장충단의 질곡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박문사 자리에 영빈관을 짓게 했고, 그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1960년대 후반)에 삼성그룹의 한 계열회사인 주)임페리얼에게 매각하였으며 여기에는 엄청나게 넓은 장충단공원 용지(2만 7,883평)까지 끼워 팔았다. 현재의 호텔신라의 ‘영빈관’은 옛 박문사 바로 그 자리이다.

그 밖에도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무분별하게 건물을 짓도록 하고 공원용지를 불하하여 결과적으로 장충단을 훼손하였다. 반공연맹회관과 국립극장 등 여러 가지 국가기관, 더구나 옛 재향군인회와 옛 중앙공무원교육원 등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공원을 불하받아 건물을 지었다가 이전하면서 인근의 동국대학 등에 팔았고 동국대학교는 장충단을 야금야금 잠식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수만평이나 되는 땅이 동국대학교 땅으로 바뀌었다.

일제가 1919년 장충단을 장충단공원으로 만든 이후, 1940년에는 이 일대 41만 8천m2(박문사 제외)를 근린공원으로 고시했었다. 광복 후인 1955년에 한국정부는 장충단 공원 영역을 크게 넓혀 69만9,500m2가 되게 했으나 박정권을 지나오면서 공원용지를 이리저리 불하하여 1984년에는 29만 7천m2로 축소되었다. 이 해에 근린공원 장충단공원은 남산공원에 통합되어 자연공원이 되었다.

시민단체, 정부에 장충단복원 요구, 삼성에는 앞장서라고 충고

그러나 이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장충단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사단법인 역사복원국민운동본부(상임대표 송태경, 이하 국민운동본부)가 7월 7일 ‘말살된 역사, 유적, 인권 복원 학술토론회’를 열고 장충단 복원운동에 나섰다.
 
이날 학술토론회에 발표자로 나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의 ‘일제 천인공노의 명성황후 시해진상’이라는 주제 발표문에 이어진 주제발표자 김란기박사(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는 옛 장충단의 위치와 규모, 그리고 그 구성을 새롭게 밝힐 예정이며  ‘원조 현충원인 장충단 자리에 호국영령들의 위패는 간 데 없고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회장의 동상이 서있다’고 지적하고 삼성이 앞장서서 장충단부터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호텔신라의 뒤쪽 숲 속에 옛 장충단의 제단과 단사(壇祠)가 있었으며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 건너에는 장충단을 구성하는 건축물도 10채에 이르며 그 위치는 현재 장충단비가 서 있는 곳부터 유관순동상이 서 있는 지역까지를 포함한 일대로 지목하고 있다. 또한 옛 사진들과 [獎忠壇營建下記冊(장충단영건하기책)]이라는 기록물에서 전하는 건물의 규모와 형태를 분석하여 장충단의 제단(단사(壇祠))의 옛 모습을 찾아냈다. 김박사는 사진을 분석하여 3개 층의 석조 기단 위에 전면5칸 측면 3칸의 15칸이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하고, 이 단사는 고종이 집무했던 대한제국의 정궁 경운궁(덕수궁)과 원구단(환구단)을 향하여 서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옛 지도에 나타난 장춘단의 모습. 제단과 부속건물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경성부명세신지도, 1914)    ©편집부

▲ 호텔신라의 뒤 숲 속에 자리 잡은 옛 삼성그룹의 총수 고 이병철 회장의 동상. 이 자리를 포함하여 이 일대에 ‘장충단’의 제단(단사(壇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역사복원신문

 
한편 국민운동본부는 이날 발표할 성명서에서 정부는 신라호텔로부터 장충단 부지를 즉각 회수하고, 원조 현충원이었던 장충단을 원형대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삼성측에 대해서도 장충단 복원에 앞장서라고 요구했다. 또한 성명서는 정부에 대해 민관합동 ‘장충단복원 범국민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을 추진하고 지하철 3호선 ‘동국대입구역’을 ‘장충단역’과 병행해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제까지 잊고 지냈던 장충단에 첨예한 역사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배호라는 가수가 불렀던 70년대의 흘러난 노래 속에서나 살아 있었던 장충단이라는 말이 역사의 진실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식민지 쟁탈전의 마지막 보루였던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국체를 지키려 무던히도 애썼던 고종의 통치 흔적이 되살아 날 수 있을까? 후세들의 손에 달려 있다.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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