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에 우수한 장수로 기록된 관우는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천하무적의 위대한 장수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명나라는 그런 소설 <삼국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관우를 군신(軍神), 무신(武神), 전신(戰神) 급으로 격상시키는 역사왜곡을 단행하여 관제(關帝) 신앙을 만들어냈으며,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關王廟)를 전국에 설치하였다. 게다가 당시 속국이었던 조선에까지 많은 관왕묘를 세웠다. 그렇게 세워진 대표적인 관우의 사당이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東廟)인 것이다. 그 이유는 한족(漢族)의 우수성을 내세워 당시 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침체되었던 한족의 사기를 올리기 위함이었고, 당시 동방의 군신(軍神)이었던 우리의 치우천왕을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로 정사 <삼국지>가 위(魏) 정통성에 입각한 반면, 소설 <삼국연의>는 촉(蜀) 정통성을 내세웠다. 그 이유는 촉한의 유비가 한족을 상징하는 한나라 왕실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조작된 장수 관우는 한족(漢族)이 아니라 고구리(高句麗)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근거는 정사 <삼국지 촉서 관우전>의 기록에, “관우는 하동 해현 출신으로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는 아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관우의 출신지인 하동 해현은 지금의 산서성 남부 운성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탁군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제목: 수나라 대운하의 탁군은 어디인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92§ion=sc7§ion2= 우선 정사 <삼국지 촉서 관우전>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번역) 관우는 자가 운장이고 본래 자는 장생이며, 하동 해현 사람이다.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 유비가 고향에서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면서 적과 싸우는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 건안 5년(200), 조조가 동쪽을 치자 유비는 원소에게 달아났다. 조조는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와 편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후하게 예우했다. (이하 생략) (원문) 关羽字云长,本字长生,河东解人也。亡命奔涿郡。先主于乡里合徒众,而羽与张飞为之御侮。先主为平原相,以羽、飞为别部司马,分统部曲。先主与二人寝则同床,恩若兄弟。而稠人广坐,侍立终日,随先主周旋,不避艰险。先主之袭杀徐州剌史车胄,使羽守下邳城,行太守事,而身还小沛。建安五年,曹公东征,先主奔袁绍。曹公擒羽以归,拜为偏将军,礼之甚厚。 관우는 160년생이고 유비는 161년생으로 실제로는 관우가 유비보다 한 살 더 많다. 소설 <삼국연의>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으면서 나이순으로 유비가 맏형, 관우가 둘째, 장비가 막내로 묘사되어 있어, 관우를 162년생으로 말하는 학자도 있으나 이러한 도원결의는 정사 <삼국지>에는 없는 허구의 내용이다. 즉 세 명은 동거동락하는 형제와 같았을 뿐, 의형제간이 아니라 존경하는 주군(主君)과 친밀한 신하의 관계였던 것이다. 관우는 160년에 태어나 하동 해현(산서성 운성)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다가, 큰 죄를 짓고 쫓기는 몸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 망명을 해 유비가 살고 있는 한나라 땅 탁군(涿郡)으로 가게 된다. 야사에는 성격이 강직했던 관우가 부정을 저지르는 관리를 죽였고, 관의 추격을 피하다 망명했다고 한다. 여하튼 큰 죄인인 관우가 망명을 해 한나라 땅으로 들어갔다면 관우는 원래 한나라 사람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망명이라는 단어의 뜻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다움 백과사전) 망명(亡命) : (1) 정치나 사상, 종교 등의 이유로 자기 나라에서 탄압이나 위협을 받는 사람이 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나감. (예문) 그는 소련으로 정치적 망명의 길을 떠났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결국 망명을 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생명의 위협을 받아 망명을 떠났지만 김선생은 조국을 잊을 수 없었다. (2)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 몸을 숨겨 멀리 도망감. (원어 망명도주 (亡命逃走))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 망명(亡命) :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민족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외국에 도피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 망명은 단순히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한 난민과는 구별된다. 위 <백과사전>의 뜻에서 보듯이, 관우는 원래 한나라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관우의 고향인 하동 해현이 한나라 땅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 사실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 동양사학계에서 고대중국의 영토를 현 하북성과 요녕성의 경계인 산해관까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당시 한나라와 대치하고 있던 고구리의 영토를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로 보는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이론과 같은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한사군전쟁 때 잃었던 유주를 되찾는 고구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하동 해현 즉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 일대는 분명 고구리 땅이었다. 왜냐하면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핵심강역도 산서성이었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가 이를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국력이 약했을 때는 유주를 중국에게 잠시 내준 경우도 있으나 많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한사군 전쟁의 결과로 유주에 조선 5군이 설치된 경우다. 당시 한 무제는 전쟁에 참패하고도 번조선의 신하들이 우거왕을 죽이는 내분으로 인해 그 땅에 조선인 제후 5명을 봉하는 어부지리를 얻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한나라의 식민지설치로 왜곡된 것이 바로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한사군(漢四郡)인 것이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80§ion=sc6§ion2= 참조)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우북평군, 어양군과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 현토군 등 7개 군이 유주(幽州)에 속해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유주가 지금의 산서성 남부라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유적이 바로 요서군을 상징하는 고죽국 백이.숙제의 묘인 것이다. 고죽성이 있는 영지현은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의 서부에 있는 영제(永濟)시로 이 일대가 바로 요서군의 땅이었던 것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이곳을 고구리가 다시 되찾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모본왕 2년(49) 장수를 시켜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가, 요동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하므로 다시 화친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유주가 고구리 영토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태조대왕 3년(55) 2월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확한 지명은 생략되어 있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아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의 기록이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안시(安市)는 개평(開平)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건흥은 난하(灤河)의 서쪽,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 요택은 하남성 제원시 근방의 현 황하습지 즉 한사군 전쟁 때 민족반역자들 때문에 잃었던 산서성 남부(유주)는 이때부터 고구리의 영토로 복속되고, 이후 이를 다시 빼앗기 위해 중국의 간헐적인 도발이 있었으나 고구리가 이를 물리쳤기 때문에 산서성 남부(유주)가 중국 땅이 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관우 출생 이후의 고구리와 한나라와의 전쟁 관우가 한나라로 망명하기 전후의 고구리와 한나라의 전쟁 상황은 아래와 같다. 관우가 18살 때인 172년, <삼국사기>에 “신대왕 8년 한나라가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이 굶주려 마침내 돌아가므로, 명림답부는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를 추격하였다. 좌원(坐原)에서 싸워 한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리고 한 필의 말도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침범한 한나라 대군이 100% 몰살(沒殺)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좌원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산서성 남부로 추정된다. 관우가 24살 때인 184년, “고국천왕 6년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치니 왕은 왕자 계수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므로, 왕이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좌원에서) 한나라 군대와 싸워 무너뜨림과 동시에 베어버린 적군의 머리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역사적으로 좌동친전(坐東親戰)이라 한다. 이렇듯 참패한 한나라가 어떻게 유주(산서성 남부)를 지배할 수 있었겠는가! 이즈음 관우는 중죄를 짓고 관헌에게 쫓기다보니 결국 망명하게 되는데 망명지가 한나라였다. 그렇다면 관우는 고구리 사람 아니겠는가! 관우가 망명할 즈음 한나라에서는 황건적이 난(184~204)이 일어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천왕 19년(197)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니 한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몰려와서 의탁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때가 한나라 헌제 건안 2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큰 난리란 바로 황건적의 난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리사초.략>에는 “투항해오는 한나라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에 관리를 두어서 그들을 위로하고 직책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서로 가까웠다는 증거이다. 많은 한나라 사람들이 황건적의 난을 피하기 위해 고구리로 피신하고 있을 때, 오히려 관우는 고구리에서 한나라로 망명했다. 야사에서 관리를 살해했다고 하는데, 관우가 죽을죄를 진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관우의 출신지와 망명이라는 기록으로 본 관우는 분명 고구리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또 고대중국의 역사는 많은 부분을 우리의 것을 도용해 자기네 것으로 조작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고대중국의 역사는 창피할 정도로 처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곧 2/2부에 이어집니다.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저작권자 ⓒ London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