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 회복차원에서 장충단과 석고각의 복원을 촉구한다

박관우 국제칼럼니스트 | 입력 : 2011/12/26 [10:36]
지난 2009년 11월 대한제국의 발상지 원구단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당시 원구단의 동쪽영역에 위치하면서 고종황제의 권위와 관련있는 석고각을 주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진을 통하여 볼 때 그 웅장한 위용에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본격적으로 석고각의 행방을 추적하게 되었다.
 
▲   박문사로 옮겨 가기전 웅장한 석고전의 모습, 1935년 3월 23일자  매일신보는 국보적 조선 대표건물의 하나로 보도했다. 고종의 대한제국 황제 즉위기념으로 건조 한것이다.                         © 역사복원신문


석고각은 경술국치 이후 13년째가 되는 1923년 그 터에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세워지면서 그야말로 방치상태가 되는데, 이러한 석고각이 1935년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절인 박문사의 종루로 이용되기 위하여 옮겨지게 되는데, 바로 박문사의 위치가 장충단의 동쪽영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필자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장충단의 의미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인식하였지 부끄럽게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그동안 필자의 온통 관심은 원구단과 석고각에 모든 촛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석고각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결국 장충단까지 이르렀는데, 이렇게 뒤늦게 나마 장충단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원구단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반포한 발상지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반하여 장충단은 그로부터 3년뒤인 1900년 11월 10일 고종황제가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신 제단으로 건립한 것이니 오늘날의 국립현충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한제국을 반포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을 만든 고종황제를 떠받드는 양대축이 원구단과 장충단이었는데, 필자는 그동안 우둔하게도 원구단에만 모든 연구의 촛점을 맞추었지,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라 할 수 있는 장충단에 대하여는 그리 깊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며칠전, 장충단에 관련된 자료집을 통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엇는데, 장충단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민족혼을 말살하는 차원에서 그 성스런 영역을 공원으로 격하시켰으니, 이는 원구단을 철거하여 호텔을 만들고, 경희궁을 파괴하여 경성중학교를 세우고 더불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정책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되니 이는 그야말로 철저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일제는 장춘단을 공원으로 격하시킨 것도 모자라 대한제국 침략의 대표적인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절인 박문사를 1932년 장춘단의 동쪽영역에 세우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니 참으로 나라없는 민족의 위상을 보는 거 같아서 아무리 지난 역사이지만 그 비통한 심정을 이루헤아릴 길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박문사의 종루로 원구단에 있던 석고각이 1935년에 옮겨지는 수모를 겪게 되었으며 일제시대까지 보존되었던 석고각이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영빈관 착공지시 이후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속으로 사라진 점에 장춘단의 파괴만큼이나 통탄스러운 심정 금할 길이 없다.
 
▲  귀빈관(영빈관) 건립지를 시찰하는 이승만(1958.11.27)  - 이승만 뒤에 보이는 건물이 원구단의 석고각 건물이다 1936년 박문사 종루로 사용했다. 광복이후 6.25전쟁 와중에도 보존되어 오랬동안 남아 있었다.   © 역사복원신문 

한 나라의 성스러운 제단이 이렇게 무참히 파괴되었지만 일제시대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해방 이후 그러한 유서깊은 장충단에 영빈관을 비롯하여 호텔 이외에 그 밖에 다른 시설을 세울 것이 아니라 당연히 본래의 장충단을 복원했어야 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며, 이 점에 대하어 통렬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장춘단의 동쪽 영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박문사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1958년 11월 이승만 대통령 지시에 의하여 영빈관이 착공되어 우여곡절 끝에 결국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7년 2월 영빈관이 완공된다.
 
이러한 영빈관을 국가가 관리하다가 그 이후 당시 삼성의 자회사인 (주)임피어리얼이 인수하고 정부로 부터 장춘단 부지를 불하받아 거기에 신라호텔을 건립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박관우 (국제칼럼니스트)  
석고각이 현재 어떻게 없어지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정확히 모르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긴
하나 고종황제의 권위와 더불어 귀중한 문화재라는 차원에서 원래 위치는 현재 롯데백화점 주차장 일대이기는 하지만 종루로 이용되었던 박문사가 원래는 장충단 영역이었으므로 장충단이 복원될 때 석고각도 함께 그 자리에 복원시키는 것이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현재 신라호텔 본관에 장충단 비석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정부와 이건희 회장은 실추된 민족정기 회복차원에서 장충단과 석고각이 복원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하여줄 것을 촉구한다.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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