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수환 추기경 분향소 조문객 행렬

박보생 김천시장 김천황금동성당 빈소 조문
윤학수 기자 | 입력 : 2009/02/18 [20:52]
▲     © 윤학수 기자
 
한국 천주교의 큰 별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향년 87세의 나이로 지난 2월16일 오후6시경 선종(善終)한 가운데 김천황금동성당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가 마련되고 조문객들의 행렬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제서품 후 안동천주교회를 거쳐 55~56년까지 주임신부로 근무했던 김천시 황금동 소재 김천황금본당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지난 2월17일(화) 오후4시30분 박보생 김천시장이 분양소를 조문하고 성당관계자들을 위로하였으며,  이어 고 이철우 국회의원, 김천시의원을 비롯한 김천시민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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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수환 추기경의 약력 *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김영석 요셉과 서중하 마르티나 부부의 5남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김수환 추기경의 집안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광산 김씨 일파로 조부인 보현공이 서울에서 순교했으며,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 밑에서 자랐다.
8살에 부친을 여윈 추기경은 행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린 어머니로부터 신부가 될 것을 권유받고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와 동성종합학교를 거쳐 일본 상지대학에서 유학을 하게 된다.
당시 학병으로 소집돼 죽음의 위기를 넘긴 추기경은 해방 후 성신대학에 편입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여러 은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사제성소를 확인한 추기경은 전쟁 중 대구에서 신학과정을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김수환 추기경은 안성 목성동 성당 주임신부를 시작으로 대구교구장 비서, 김천성당 주임신부, 김천성의중․종합고등학교 교장으로 사목했으며, 1956년, 다시 한번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귀국 후에는 가톨릭시보사, 현재의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6년 새로 생긴 마산교구의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 서품을 받게 된다.
2년 뒤에는 서울대교구장에, 다음해인 1969년에는 한국 교회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30년 가까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수장을 역임하면서 힘없는 이들을 대변하고 정의의 편에서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
김 추기경은 특히 광주 민주화 운동을 재임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로 회고하기도 했다.
1983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앞두고 인생의 가장 친한 벗이자 위안이었던 김동한 형님 신부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던 김 추기경은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함으로써 교회 수장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2009년 2월 16일, 하느님 품 안에 안식을 얻을 때까지 기도와 봉사로서, 우리들에게 신앙적인 삶의 모범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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