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훼손한 장충단의 슬픈 사연을 아십니까? (1부)

장충단은 명성황후를 지키다 산화하신 분들을 제사지내던 원조 현충원
편집부 | 입력 : 2011/06/27 [17:10]
 
60년대 불멸의 가수 배호의 히트곡 안개 낀 장충단공원“의 가사는 참으로 애절하다.
(1절)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 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2절)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위의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과 뚜렷이 남은 이 글씨’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가슴을 움켜지게 한 수많은 사연과 가버린 그 사람의 남긴 발자취’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이 노래가 그냥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며 흐느끼는 애절한 사랑의 노래일까? 그 슬픈 사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장충단공원의 슬픈 사연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냥 근처에 있는 동네 이름이 장충동이라 ‘장충단(獎忠壇)공원’으로 명명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배호의 노래와 족발로 유명한 곳으로만 알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 장충단공원은 ‘서울남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이제는 그 자리가 장충단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왜 이렇듯 우리 국민들은 장충단의 그 슬프고 애절한 사연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 나라가 해방 후 친일청산을 하지 못하여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바로 장충단은 항일의 상징이며, 극일의 표상으로 국립현충원(顯忠院)의 원조였는데 해방 후 정권을 틀어쥔 친일파들이 일제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장충단을 제대로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충단은 역사적으로 명성황후시해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일본 지식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범죄인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명성황후를 지키려다 순국한 훈련대장 홍계훈 연대장과 궁내부대신 이경직공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제단이 있었던 곳이다. 이후 이곳은 대한제국의 현충원과 같은 성지(聖地)가 되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가 이곳을 훼손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했던 것이다. 과연 어떻게 장충단이 변모했는지 기록과 사진으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 김홍도가 그린 남소영의 그림     ©편집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충단 

* 전 남소영의 유지에 장충단을 세우다 (고종 37년(1900년 광무 4년) 10월 27일 양력),
전 남소영(前南小營)의 유지에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원수부(元帥府)에서 조칙을 받들어 나랏일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주: 죽은 사람들이란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수비대 훈련연대장 홍계훈과 궁궐을 지키다 산화한 장졸들과 궁인들이며,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백성기가 충신에 대한 표창을 건의하다 (고종 38년(1901년 광무 5년) 2월 16일 양력)
육군 법원장 백성기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을 드러내 표창하는 것은 임금이 세상 사람들을 격려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분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의리를 지키고 절개를 위해 죽은 신하가 있으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니, 육신사(六臣祠)나 사충사(四忠祠) 따위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근년에 의리를 지켜 죽은 정승이나 재상들에 대해서만은 아직껏 미처 그렇게 해주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그러한 사람을 일일이 열거해 보겠습니다.
 
이를테면 임오년(1882)에 절개를 지켜 죽은 고 영의정 이최응, 고 판서 김보현, 고 판서 민겸호, 고 참판 민창식과 갑신년(1884)에 절개를 지켜 죽은 고 찬성 민태호, 고 판서 조영하, 고 판서 민영목, 고 판서 한규직, 고 참판 윤태준, 고 참판 이조연, 중관 유재현과 을미년(1895)에 절개를 지켜 죽은 고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충숙공(忠肅公) 이경직(李耕稙), 고 시종관(侍從官) 충민공(忠愍公) 임최수(林最洙), 고 참령(參領) 충민공(忠愍公) 이도철(李道徹)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이 죽음으로 절개를 드러낸 것이 옛 충신들보다 무슨 크게 못한 점이 있다고 겨우 자기 집 사당에서 제사나 받을 뿐 따로 한 칸의 사당도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 충성에 보답하고 절개를 표창하는 은전에 있어 과연 어떠합니까? 지난날 장충단(奬忠壇)을 특별히 만들어 제사를 지낸 뒤로 군사들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감격하고 고무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여러 신하들이 한 목숨 바쳐 순국(殉國)한 충렬(忠烈)은 실로 한 때의 싸움에서 죽은 장수나 군사들보다 더한 점이 있는데, 단지 군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독 제단에서 제사지내는 대상에 끼지 못하였으니, 선후가 도치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따로 하나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면 저세상에 있는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충성을 표창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데 어찌 문관과 무관을 구별하겠는가? 진달한 내용은 자못 일리가 있으니,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하였다. 

주 : 위 기록에서 보듯이 장충단은 호국의 성지로 국가를 위하다 죽은 자들의 혼백을 모셔놓은 곳으로, 그 사당을 세움으로써 군사들의 사기가 오르고 임금이 세상 사람들을 격려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분발시키기 위한 것 즉 국가정의(國家正義)를 바로 세운 것이었다. 당시 이 같은 항일·배일의 인물들을 장충단에 제향한 일은 장병들을 크게 감격 고무시켰으며 일제의 횡포가 극심함에 따라 일반의 장충단에 대한 경모심도 더욱 커졌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애창된 《한양가(漢陽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그러한 일면을 말하여 준다. "남산 밑에 지은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 바친 신령 뫼시네. /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 장한 그 분네."  

▲   장충단 건립 당시 제단의 위치는 현재 신라호텔 자리이다.



장충단에 배향된 주요 인물 

1. 홍계훈(洪啓薰, ? ~ 1895년)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6시) 을미참변 때 일본군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초명은 재희(在熙),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신원은 확실치 않으나, 미천한 신분이었다.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1882년 8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출세하였다. 1884년 장위영 영관(領官)을 지냈다. 그해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출전하여 전주를 탈환하고 그 공으로 훈련대장이 되었다.  

을미참변 때 광화문 앞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죽었는데 다만 《고종실록》에서는 광화문 밖에서, 《한국통사》에서는 궁궐 안에서, 《대한계년사》에서는 궁궐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다. 또 《매천야록》에서는 총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일본 장교의 칼에 피습한 뒤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썼다. 그는 을미참변 때 조선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지키다가 죽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더불어 1900년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계훈을 “졸병에서 일어나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는데, 인품이 염결(廉潔)하고 근신(勤愼)했다.”라고 호평했다. 

2. 이경직 1841(헌종 7) ~1895(고종 32) 충북 청주.
한말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위양(威穰), 호는 신부(莘夫). 아버지는 참판 선보(善溥)이며 명성황후의 외사촌 오빠이기도 하다. 1876년(고종 13) 동몽교관이 되고, 1885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 뒤 홍문관부수찬·참의내무부사 등을 거쳐 189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해 12월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요구하고, 동학도에 대한 침탈을 금지해달라는 소장을 제출하자 동학은 이단이므로 계속 금압할 것이며, 교도들에 대한 지방 관리의 침학만은 금단하겠다고 약속하여 동학교도들을 해산 시켰다.  

이듬해 동학교도 40여 명이 과거 응시를 가장하여 서울로 올라가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고종에게 직접 교조신원을 요구한 사건이 일어나자, 교도들의 상경을 미리 막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1895년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그해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일본군인과 낭인집단을 동원, 궁궐로 난입해 민비를 학살한 을미사변 때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에서 난입하는 폭도들을 막다가 총탄을 맞고, 고종이 보는 앞에서 이들의 칼에 참혹하게 사지가 잘려 죽었다. 
 
▲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장군과 궁내부대신 이경직공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던 장충단의 옛 모습

 

장충단 비문의 내용 

<국역문> 장충단비 전경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은 상성(上聖)을 타고났고 운수는 증흥(中興)을 만나 태산과 만석 같은 공업을 세우고 불운의 조짐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시국이 가끔 험난하다가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武臣)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충성을 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서릿밭보다 늠름한 의열과 태양처럼 빛나는 명절(名節)은 길이 재향을 누리고 기록에 남아 있어야 마땅하다. 이리하여 임금은 특별히 충성을 포상하는 의리를 기려 이에 애통해하는 조서를 내리고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였으며 이어 또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는 법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교화를 심으니, 이는 참으로 백대를 놓고 보아도 없는 특전이다. 사가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키는 것은 오직 여기에 있다. 아, 위대하다. 아, 훌륭하다. (정일품 보국숭록대부 원수복회계국총장 겸 임표훈원총재 육균부장 훈일등신 민영환(閔泳煥) 삼가 칙서를 받들어 비문을 짓고, 아울러 서문을 쓰다. 광무4년(1900년) 2월 일) 

大皇帝陛下 姿挻上聖 運撫中興 奠泰磐之業 惕履霜之漸 無奈天步時或迍邅 乃有甲午乙未之事變 而武臣之投難効死者多 嗚呼 其毅烈之凜於霜雪 名節之炳如日星宜乎永享芬苾 不朽竹帛 是以 聖明特軫褒忠之義 爰降惻怛之詔 設壇竪碑而表旋之 繼又定春秋祀儀 以示崇報 以樹風聲 此誠百世之曠典也 勵士氣 激軍心 亶在於斯猗歟盛哉 猗歟盛矣 (正一品輔國崇祿大夫 元帥府會計局摠長兼任表勳院摠栽陸軍副將勳一等臣 閔泳煥 奉 勅謹記幷書 (光武四年 二月 日)) 

현재 장충단은 파괴되어 없어져버리고 그자리에는 위락시설인 신라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현재 장충단공원에 있는 외로운 비석 하나뿐이다. 비석은 원래 장충단 입구에 서 있었으나 장충단이 없어진 후 현 위치로 옮겨졌다. 장충단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에 이른다.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 일제의 만행이 저질러지는지 (2부)에 계속됩니다.
 
▲ 장충단 제단 건물은 파괴된 후 복원되지 않고 입구에 서있던 비석만 외로이 옮겨져있어 당시의 슬픈 사연을 말해주고 있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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