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는가?

엘리트의 위기와 아날로그 정치인들
신성대 논설위원 | 입력 : 2012/01/03 [07:52]
지금 우리는 엄연하게 새로운 문명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다른 여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도자들이 급격하게 변해야만 하고, 세계화, 새로운 기술, 지식의 보편화, 개방적인 경쟁, 정리해고, 인력감축, 수명의 연장, 경기침체, 부와 일자리 분배, 가치관의 변화 등등 긍정적이거나 때론 부정적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변화들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태백산 고목. (이미지자료출처:Daum)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다른 나라들의 지도자들보다 덜 지혜롭고, 덜 정직하고, 용기를 덜 가진 것처럼 국민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사회와 많은 괴리를 지닌 그들은 단 한 번도 사전적 엘리트, 즉 ‘가장 훌륭하고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그룹’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도 권위적이고 중앙집권적이며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구시대의 리더십 모델로 군림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그저 우리 사회의 운 좋은‘특권층’이었지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여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지도 못할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좇아가는데 급급할 뿐이다. 그들의 행동은 극히 보수적 혹은 진보적 편가르기로 어느 한쪽 끝으로만 치우치고 있다. 하여 한국사회의 공적인 공간은 21세기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동안 내내 우리의 지도자들은 통합을 촉진시키는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분열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제는 그러한 것을 사회에 전달하는 원초적 기능마저도 마비되어 버렸다. 해서 작금의 정치적 위기는 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이러한 정치인의 위기, 나아가 우리 사회의 엘리트의 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사람들은 기존의 상호 교대하는 여야간의 정권교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모습 다른 성격을 지닌 지도자층으로의 완전한 교체를 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보다는 그들의 존재양식, 그들의 윤리의식, 그리고 그들의 감정적인 카리스마에 대해 더 많은 회의를 느끼기 때문이다.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불확실성, 사회학적 공허함, 지표의 부재, 그리고 포기하는 느낌이 강화될수록 리더십 교체에 대한 열망은 강해지고 있다.

우상들의 인기와 한계
 
스타, 예술가, 강사, 작가, 종교가, 방송인, 스포츠 영웅, 성공한 벤처기업인 등등 선천적 재능이나 비범함을 지녀 대중적 인기를 얻은 유명인들. 일반 대중들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성공으로 본보기로 숭배되고 있는 월등한 자들. 이들은 통과의례의 오랜 과정을 거쳐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정당성은 다시 매체 시스템에 의해 신성화되어 거의 종교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서 차츰 그들은 현실들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하찮은 일거리들로부터 멀어져 경탄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우상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상상체계에서의 영웅대접을 받지만, 실제 현실과 관계를 갖지 않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들은 물질적인 제약에서 벗어난 꿈의 이상을 구현하지만 그 꿈은 사회적 게임을 벗어나고 일상의 제약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 한국사회와 같은 신뢰의 위기는 이런 엘리트우상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우상들의 대안제시적 이미지들은 집단적 상상을 부추기는 데 알맞은 성공, 행복, 그리고 신분상승의 예들을 제공함으로써 대중들의 허전함을 메우러 온다. 하지만 이러한 모델들은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상상만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집단적인 고뇌를 완화시켜 주는 꿈의 유익한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실제 위기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 다양한 그들은 어떠한 가치체계도, 일관되고 합의에 의한 어떤 형태의 모델도 그려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그들은, 그들 스스로 작금의 위기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을 모방하는 것이 가능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촉매자로서의 엘리트 등장과 한계
 
한국 사회가 엘리트의 개편을 요구하는 단절과 변동의 주기에 접어들었음은 분명하다. ‘미네르바의 새는 황혼이 되어야 깨어난다.’고 했다. 모든 것이 어두워졌을 때, 해체, 혼란, 파괴, 불의, 쇠락, 변동의 과정에서 ‘아무런 주요 인물들’이 아닌 촉매자적인 엘리트들이 출현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주역들이 아닌 온갖 시민단체에 웅크리고 있던 시민운동 전문가들이다. 그들의 에너지를 너그럽게 이용하여 신뢰도와 영향력을 키워낸 유명 인사들이 의사결정권을 지닌 엘리트로 변신한다.
 
그들은 기존 엘리트들과는 달리 전적으로 순간순간 당면한 환경의 필요성에 의해 살아간다. 그들은 시민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과 삶을 공유한다. 그들은 경험에 의해 의사결정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스스로 엘리트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무대에 갑작스레 등장할 때에는 미숙하고, 이국적이고, 충격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촉매자적인 엘리트들은 사회적 재난이 축적될수록, 기성엘리트들이 부패할수록, 상황이 불안할수록 인기를 축적해간다. 그러나 그들의 인기는 선도자라기보다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역할에 기인한 것이다. 이들은 시민들과 그들의 요구를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못 들은 척하는 청각장애 정치인들 사이를 파고들어 오로지 촉매자로서 실용적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해 현장에서 활동하는 자들이다.
 
변화인가, 위기인가?
 
판도라의 상자는 진즉에 열렸다. 지난 세기에 이미 거리는 의미가 없어졌다. 현실에서 시간상의 가까움은 즉각적인 것에 과도한 집중을 유발시키고 있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인터넷 텔레커뮤니케이션 도구들은 문명의 근본에 해당하는 ‘연결하기’에 혁명을 불러왔다. 이제 공간을 뛰어넘기 위한 기간이나 구역은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여기’와 ‘저기’란 말은 의미가 없어지고, ‘과거’나 ‘미래’ 또한 ‘지금’ ‘즉각’의 들러리 단어일 뿐이다. 세상은 하나의 네트워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
 
이번 보궐선거에서 보듯 이제 인터넷 혁명은 더 이상 예언자들이 말하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임을 직접 보여주었다. 쌍방향 직접민주주의가 쓰나미처럼 아날로그 민주주의를 덮쳤다. 인터넷 소통을 유권자들의 동태나 살피고 여론 청취를 위한 종소리 정도로 생각하던 기성 정치인들은 졸지에 ‘도전받는’ 위치에서 ‘버림받은’ 난파선 선원 신세가 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민주사회에서 항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의 원인은 신뢰의 악화, 너무 많은 실망들, 지켜지지 않은 너무 많은 약속들, 너무 많이 실패한 청사진들, 바로 이런 것들이 여론과 정치적 리더십 사이에 응축되어 불안과 불신을 부풀려온 때문이다. 이번에 그것이 폭발한 것이다. 바야흐로 지도층 엘리트의 도덕적 정당성, 정치의 비전의 부재와 미래에 대한 계획 결핍, 신으로부터 물러 받은 것 같은 재벌들의 세습경영에 대한 공공시민의 직접적인 심문이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리더의 자질 혹은 의무
 
즉답의 의무 : 참아야 하는 시대에서 선택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쌍방향 정치에서 정치인은 신속하고 적절하게 답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시민들은 단순하게 어떤 의견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의 참여 동기는 자신의 권리 인식, 심리적 가까움, 익명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에서 나아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으며, 의사결정권자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해서 그들이 제시한 의견들의 ‘구체화’를 기다리는 동안 생겨날 조바심에 대해 보다 신속한 회답의 의무를 지닌다.
 
전임자들에 비해 임기 중 그다지 특별한 과오도 없이 맡은 일을 그런대로 잘 하면서도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 즉결, 즉답의 소홀함이다. 그는 매사의 결정과 답변을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답을 내놓는듯한 처신을 하는 바람에 이미 답답함에 분통을 터트린 국민들에게서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투명성의 의무 : 퇴조하는 리더십의 주기에서는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모든 특권계급은 의혹의 대상이 된다. 시민들은 사회변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엘리트의 전복을 갈망하게 된다. 리더는 나무랄 데 없어야 하고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어떤 규칙도 정당화 되지 못한다. 
 
▲ 한한국 작가의 희망대한민국.  
변화의 시대를 맞아 우리 한국사회는 ‘정치적인 것’에 대해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해서 리더들의 전통적인 역할이 변했다. 정치인들은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권자들의 상이한 수준들의 다양한 논쟁을 종합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시민들과 이러한 대화를 시작하여 그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현실적인 논리 증명을 책임져야 하며, 연장된 대화 체계를 구축해야 할 필요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투명성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균형자의 의무 : 실시간 쌍방향 소통은 지나치게 여론에 의존함으로써 중대한 정치적 혼동으로 이행할 우려가 있다. 다수의 논리에 따라 그날그날의 여론을 대량화하여 정부의 형태를 이끌어 가는 것은 시민들을 재조직하고 끌어들일 수 있는 이점은 있으나, 일상적인 우민정치에 빠질 위험성이 매우 크다. 해서 정치인은 선동적이고 민중주의적인 분산을 경계하면서 일관성 있는 방향을 유지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정치 계급은 기존의 거시사회적인 것으로서의 확실하고 장기적인 프로그램 외에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미시사회적인 것으로서의 전략적 적응과 소규모 문제들에 관한 것들도 프로그램화해야 하고 매일매일 그에 대한 시도를 해야 한다.
 
유연성의 의무 : 역동적인 시민과 단체들의 다원적 조직 네트워크에 신속하게 대응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언제 어디서나 지정된 주체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고정적이고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것은 없다. 해서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네트워크 구축이 절대적이다. 이를 위해 정치인은 전반적인 비전을 지님과 동시에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대한 정확한 감각을 지녀야 하고, 훈련능력을 지님과 동시에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도덕성의 의무 : 실제 우리가 처한 경제적 사회적 위기를 떠나서, 이 나라가 전례 없는 도덕적 위기를 겪고 있음을 모를 리 없다. 국민들은 항상 더 많은 부와 더불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배척당한 자를 양산하고 있는 세계화의 결과들에 불안해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는 타인들은 소외시키면서 자신이 속한 단체에게는 유리하게 배려하려 조직의 도덕을 강화하게 된다.
 
해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관례들을 세우고 회복시키며 수정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도덕의 부활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지난 시절 정치가는 관념론자였고 민주적 선거 덕분으로 구현되는 집단도덕을 소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중립’이 도덕 노릇을 한다. 사회의 균형을 보장하는 것에서 합법성을 쟁취할 수 있다. 극단의 대립 또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투쟁의 가능성을 없애는 상황을 유지시키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실업은 지속적으로 자리를 잡아 도덕문제 이상으로 절실한 사회문제를 낳는다. 무법 경쟁과 극단적인 규제불능은 여론을 민감케 하여 도덕에 대한 자각을 불러 온다. 정치인은 더 많은 투명성, 통제와 참여를 위한 새로운 민주적 규칙을 정하려는 도덕적 명령에 직면하게 된다. 미래에는 도덕의식 없는 그 어떤 것은 영혼의 파멸일 뿐이다. 이 나라에서 지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리더들에 대한 도덕적 의구심은 심각할 정도이다. 때문에 리더들의 도덕적 차원에서의 약속은 필수적이다.
 
융합의 의무 : 아직도 사람들은 진보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기실 진보의 미래를 무턱대고 믿는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기술적, 과학적,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지지자들을 판단하고 그런 것들에 대한 결과에 대해 평가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해서 진보사상을 통해 더 이상 대중을 불러 모으지 못한다. 오직 융합, 병합, 합치를 통해서만 불러 모을 수 있을 뿐이다.
 
정치인은 모든 종류의 지식에 관해, 기술에 관해 나타나는 다양한 진보 노선을 분석하고 이성에 호소하여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것, 주어진 목표를 중심으로 최대한 사람들을 규합하고 동원하기 위한 협력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책임의 의무 : 작금의 정치인, 넓게 잡아 엘리트에 대한 신뢰의 위기는 책임감 상실에서 기인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리더라면 투명해야 하며, 속임이 없어야 하며, 자기 행동의 결과들에 대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책임을 진다는 것을 행동으로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규칙도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 도덕을 구현하고, 게임의 규칙들과 그 결과들을 받아들여야만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정치는 현실을 신화 속으로 접목시키는 기술이다. 지도자라면 비전과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여 주변에 인재들을 불러 모을 수 있어야 하며, 공동체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청사진에 대한 믿음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부정할 줄 아는 겸손함을 지녀야 하며, 자신의 분야에 정통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 분야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또한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을 해야 하며, 그 모든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전망의 의무 : 세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급격히 변하고 있고 우리 사회 역시 무섭게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의 리더들은 그러한 상황의 정도를 실제적으로 측정하고, 그것을 느끼고 설명하며 새로운 전망들을 그려나가는데 부족하고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화 또한 일부 기업과 개인에게는 더없는 기회이지만 지나친 개방은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해서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정치적인 것에 대한 거부와 공적인 것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예측이니 전망이니 하는 것들이 흔히 과거에 대한 일반화와 미래에 대한 꿈에 불과하기 때문에 간혹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엘리트라면 다른 사람보다 앞서 우리 사회의 변동들과 관련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미래의 역사를 써나가고 그것을 설명하며 자신들이 그 변화의 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안정되고 거의 변동이 없는 전통적인 준거의 모델을 기반으로 존재해온 기존 정치인들의 리더십을 깊게 수정해야 한다.
 
선택의 의무 : 정치인은 가치의 선택과 추구에 대해 비전을 지니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해시켜 주며, 정치적인 선택을 제안하며, 선택의 정의과정을 투명하게 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켜야 하며, 최종적으로 그것이 인기가 없을지라도 결정하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렇지만 주변의 선동에 대해 주의해야 하며, 정치성 및 대표성이 흔들릴 때마다 극단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적인 조류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목표 제시의 의무 : 오늘날 혼돈의 핵심은 지도자들의 목표들에 대한 선명성의 결핍에서 기인한다고 단정할 수 있다. 해결 난망해 보이는 실업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우려를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식의 재분배와 사회조직을 모색케 하고 있다. 노동은 이제 인간 존엄성의 구성 요소로 남았다. 부의 분배 이전에 노동의 분배가 무엇보다 시급하며, 새로운 필요성에 부응하는 새로운 종류의 노동을 창조하고 개발하기 위한 특정한 변화를 장려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가 해결해야 할 핵심적인 주제이다.
 
일관성 없는 목록에 불과한 ‘선거 공약들’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정의로운 사회’ 등등 추상적이고 상투적이고 무의미한 개혁이미지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목표 구현을 위한 모험에 동참하는 각자에게 책임과 권리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효율성의 정치를 넘어, 당장의 생존을 위한 확신과 방법을 넘어, 장기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유토피아, 야심에 찬 꿈, 사회와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지도자들은 철저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소통의 의무 : 아마 이번 정권처럼 소통의 문제가 화두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난 시대의 ‘공인된 권위’를 넘어 지금은 ‘정당화된 권위’를 확립해야 한다. 게다가 그 권위가 행하는 모든 결정도 정당하다고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당화는 결정과 수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해서 의사소통의 능력은 리더십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제까지의 대중매체를 통한 의사결정자들의 담화, 연설과 같은 방식은 더 이상 믿음과 확신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더욱이 결집력도 없다. 사고방식의 반전과 사회 변화의 조화, 중계자를 거치지 않고 국민과 직접 접촉하여 그들의 역동성을 생산해내기, 이익의 차원에서 제안들을 해석하여 결정의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 가능한 언어로 표현하고, 그들이 이용하고 있는 새로운 매체들을 이용하여 혁신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개념 만들기의 의무 : 오늘날과 같은 환경에서는 오르지 부정적인 결정들만이 국민들 머릿속에 강한 자국을 남긴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결정들은 그 표현에 있어 매체에 의해 함몰되어 버리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오르지 강력하게 개념화된 형식들만이 필요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메시지 송신자들의 다양화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을 점점 더 강하게 기억시킬 수 있고 사람들의 뇌리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개념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記述)문화에 익숙한 지금의 리더들은 자신들의 직업적 언어로 표현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미 더 이상 기술문화가 아니라 구두(口頭)문화이다. 형상화된 짧은 문장들, 단순하고 직접적인 언어와 같은 젊은 세대의 소통문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습득해야 한다.
 
신뢰의 의무 : 정치인, 엘리트, 지도자들에 대한 신빙성 내지는 신뢰성의 상실은 문민정부 들어 꾸준히 진행되어 왔었다. 여당과 야당 간의 전통적인 정권 교체는 더 이상 신뢰와 확신을 쇄신시키고 모두의 노력과 희생을 바탕으로 결집시키는 데 적절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위기의 시절 국민적 국가적 지원으로 구조조정을 통해 생산적인 에너지와 경쟁력을 갖추게 된 대기업들의 기업문화 변화 역시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 미래의 주역들이 희망의 글로 태극기를 만들고 있다.(이미지 자료출처:Daum) 
작금의 우리 사회의 위기를 더 이상 인간성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의 탓으로 돌릴 수만도 없다. 지도자들은 한 세대 전체가 자신들의 권위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그들만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퇴출당할 위기에 놓인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 전체에 해당하는 신뢰문제인 것이다. 문민정부의 늑대형 속임과 특권층들의 거짓말에 대한 시민들의 직접공격은 과거 군사정권의 사자형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화 항거와는 그 성격에서 같지 않다. 작금의 지도자들에 대한 환멸의 표출이자 신뢰를 옮길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갈망인 것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지도계급의 탈바꿈이 목적이다. 해서 그들 충동적인 감정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냉철한 통찰력으로 지켜보는 것은 경멸하는 태도로 비쳐진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변화의 여지를 수용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니고 그들과 최소한의 목표를 공유하며, 게임의 규칙조차 공유하며, 상호 동등한 조건하에서 지속적인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시켜 나가면서 신뢰성을 회복시켜가야 한다.
 
세상을 걱정하는 새로운 방법
 
개인주의가 가족, 단체, 민족 집단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한국에서 개인주의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사회관계의 분열과 불신이 역사상 지금처럼 폭넓게 퍼졌던 적은 없었다. 사회는 이제 더 이상 통합체가 아니라 조각난 개인성의 집합일 뿐이다. 해서 이제까지 우리 사회를 결속시키고 형성시켰던 가치들 중의 상당 부분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난 날 기계화는 에너지와 권력의 집중을 조장했지만 통신 테크놀로지의 혁명은 분산이라는 반대 효과를 가져 왔다. 이 기술적 진보는 근본적으로 사회문화적 대변혁을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대변혁은 우리를 이끌 의사결정 주역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능력, 그리고 책임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에서 유독 SNS사업이 발달하고 거기에 전 국민이 빠져드는 것은 편가르기, 개인주의, 그리고 참을성 없는 한국인 정서의 반영이라 하겠지만, 극도로 분산된 개인은 다시 그만큼이나 소외감, 무력감에 시달리며 소통에 목말라 하게 된다. 흡사 한국은 이러한 SNS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임상실험 하는 곳 같다. 즉각적이지 않으면 촌각도 못 기다리는 시대가 도래 했다. 지도자가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는 임기 중이라도 언제든 그만두어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보수 혹은 진보를 넘어서는 역동성을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복이란 말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어려운 현상을 그저 경제적 불확실성, 진보 보수 간의 이념 혹은 정치적 갈등으로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한국 정치의 위기, 정당의 위기는 이 땅에 엘리트라 불리던 리더들의 위기에서 온다. 현실에 대한 지독한 반성적 성찰 없이 야당은 그저 통합에만 정신이 없고, 한나라당은 박근혜 체재로 비대위를 구성하여 재창당 수준의 인적쇄신을 하겠다고 한다. 새로 출범하는 비대위가 과연 얼마나 훌륭한 새 인물들을 발굴해낼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먼저 그 비대위 자신들부터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로서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추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역동적인 한 해가 될 것은 틀림없다.
원본 기사 보기:한국무예신문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