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만의 왕의 귀환 - 비운의 리처드 3세 명예 회복할까?

김지호 | 입력 : 2013/03/25 [13:15]
15세기 영국의 30년 장미전쟁에서 헨리 7세에 패해 비참한 최후를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왕 리처드 3세. 레스터의 슈퍼마켓 주자창 아래 묻혀있던 그가 레스터 대학 발굴팀에 의해 기적적으로 527년 만에 유골의 모습으로 세상 밖으로 다시 나와 숱한 화제를 뿌리고 있다.

발굴팀을 이끈 리처드 버클리 교수는 “리처드 3세의 유해를 찾아낸 것은 기념비적인 고고학적 성과”라며,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람인 리처드 3세에 대해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흥분되는 발견”이라고 자평했다. 이러한 성과는 한 역사학자의 수년간에 걸친 끈질긴 탐구가 결실을 본 것이다. 리처드 3세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묻힌 것으로 전해져 왔다. 이후 교회가 철거 되면서 리처드 3세의 유해는 인근의 강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리처드 3세의 최후의 날들’의 저자인 역사학자 죤 애시다운-힐 박사는 리처드 3세의 매장지를 찾기 위해 지난 수년간 자료를 조사하던 중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그 것은 헨리 7세가 리처드의 무덤 비용을 승인한 회계문서로서, 그레이페어 교회 성가실 바닥에 짓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1530년에 교회가 철거되면서 그 위치는 미궁에 빠졌다. 그러던 중 힐 박사는 17세기의 지도 제작자인 죤 스피드도 리처드의 무덤을 찾으려 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역시 무덤을 찾지 못하고 지도에는 교회가 있었던 위치를 잘 못 표기했다. 한편 힐 박사는 리처드 3세의 누이인 요크의 앤의 가계도를 조사했고 3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가까스로 캐나다에 사는 후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힐 박사의 탐구에 힘을 보탠 이는 리처드 3세의 명예회복을 위해 1920년대에 결성된 리처드 3세 협회의 필리파 랑리 여사다. 그녀는 17세기 지도를 들고 레스터 대학의 고고학자 버클리 교수를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 레스터 대학 발굴팀은 고지도와 현지도를 면밀히 비교 검토한 후, 교회가 있던 위치가 현재 슈퍼마켓의 주차장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후 레스터 시청을 설득하여 주차장 바닥을 파는 허가를 얻어냈다. 지난해 8월 25일에 시작해 9월에 두개골에 상흔이 있고 척추가 심하게 옆으로 휘어진 유골을 발견했다. 또 척추 부근에서는 화살촉도 발견됐다. 발굴팀은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통해 꼽추왕으로 묘사되었기에 직감적으로 유골이 리처드의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학문적 뒷받침을 위해 힐 박사가 찾아낸 후손과의 모계 유전자인 미토콘드리아 DNA 일치 검사, 탄소 연대측정 및 두개골의 상흔과 역사의 기록 등을 조사 비교했다. 또한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두상을 재현해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던디 대학에 의뢰해 실물에 가까운 얼굴을 복원했다. 이러한 절차를 마친 레스터 대학은 지난 2월 기자회견을 열고 발굴된 유해가 리처드 3세가 99% 확실하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장미전쟁

플랜태저넷 왕가는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인 붉은장미 문장의 랑카스터공의 증손자들과 넷째 아들인 흰장미 문장의 요크 공의 증손자들이 왕위 계승권을 놓고 30년간 장미전쟁을 벌였다. 랑카스터 공의 아들이 장손인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로 즉위하고 헨리 6세까지 이어지는데, 요크공의 증손인 에드워드가 랑카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의 부당함을 명분으로 병약하고 무능했던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에드워드 4세가 되어 왕위에 오르면서 붉은 장미 가문과 흰장미 가문 사이의 30년 장미전쟁이 시작됐다.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요크가의 리처드는 형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충성을 다했다. 리처드는 충성심과 공을 인정 받아 글로스터 공작 작위와 막대한 영지를 받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가 죽고 12살인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에드워드 4세의 왕비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섭정에 나섰다. 랑카스터 가문편에 섰던 그레이경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둔 미망인이었고 탐욕스러웠던 것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는 귀족이었으나 왕족의 혈통은 아니었다. 당시의 전통으로는 왕실결혼에서 왕족의 혈통이 아니면 귀족이라도 평민으로 치므로 잉글랜드 최초의 평민왕비인 셈이다. 엘리자베스의 미모에 빠져 주위에 반대를 무시하고 결혼을 한 에드워드 4세는 처가인 우드빌가를 편애해 다른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에드워드 4세가 죽자 리처드와 귀족들은 평민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엘리자베스를 그레이 부인으로 격하시켜버렸다. 아들들은 서자가 되어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런던탑으로 유배됐다. 리처드는 귀족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리처드 3세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리처드는 반대파와 우드빌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심지어는 우드빌가 숙청에 앞장서며 자신을 따랐던 충신 윌리엄 헤이스팅스도 어린 왕의 폐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러자 민심이 이반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에 망명해 은둔해 있던 랑카스터 가문 외가의 피가 섞인 헨리 튜도에게 기회가 왔다. 헨리 튜도의 조부인 오웬 튜도는 별볼일 없는 웨일즈의 일개 지방 호족이었으나 랑커스터가 헨리 5세의 미망인과 결혼해 신분이 격상했고 그 아들 에드먼드 튜도는 서자 계열이지만 왕족의 피가 흐르는 마거릿 보퍼드와 결혼하는 행운을 잡았지만 곧 전사했다. 둘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헨리 튜도는 2대에 걸친 신분 상승으로 미약하지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 

비운의 리처드와 행운의 헨리

리처드가 왕위에 오른지 3년째 되던 해 28살의 헨리는 2천여 명의 망명자와 노르망디 용병들을 이끌고 웨일즈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웨일즈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 7천으로 늘어난 헨리 튜도의 병력은 결전지로 진군했다. 리처드는 1만의 왕군을 이끌고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8월 22일 아침 양군은 레스터의 보스워즈에서 격돌했다. 헨리가 소수의 호위병들과 있다는 정찰병의 보고를 받은 리처드는 친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헨리를 향해 돌격했다. 길을 막아선 호위 기사들을 쓰러뜨리며 헨리에게 불과 몇 미터 앞까지 다가갔으나 이내 적군에 포위 되었다. 말이 진흙에 박혀 낙마한 리처드는 자신을 둘러싼 적군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고 33살의 나이에 목숨과 왕국을 모두 잃었다. 당시 헨리의 부관으로 웨일즈 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해 기사작위를 받은 웨일즈의 라이스경은 자신의 전공을 칭송하기 위해 웨일즈의 시인 구토스 글린을 불러 시를 짓게 했는데 그는 “돼지를 죽였다, 그의 머리를 깎았다”라고 읊었다. 그의 시는 발견된 두개골의 상흔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개골의 뒤쪽 하부 일부분이 머리카락이 담긴 채로 칼날에 의해 썰려 나간 상흔이 있다. 또한 두개골 상부에 8개 이상의 타격흔적과 골반의 한쪽 뼈가 잘려 나간 것으로 보아 리처드는 매우 잔혹하게 살해된 것으로 보여진다. 리처드의 죽음으로 플랜태저넷 왕가는 끝이 나면서 영국의 중세는 막을 내리고 헨리 튜도가 헨리 7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튜도왕조가 시작된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통해 양 가문의 반목을 종식시켰다. 이들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헨리 8세다. 튜도의 문장은 붉은 장미 바탕에 흰 장미 잎이 들어간 튜도 로즈로서 통합을 상징한다.    

리처드, 명예 회복할 수 있을까?

패자가 된 리처드는 왕위를 찬탈한 폭군이라는 오명과 꼽추라는 조롱을 받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세익스피어는 희곡 리처드 3세에서 그를 조카들을 죽인 사악한 꼽추 폭군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리처드가 조카들을 런던탑에 유배시킨 것은 사실이나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오히려 리처드 사후인 헨리 7세 시절에 죽임을 당한 것 아니냐는 설도 공존한다. 에드워드와 리차드 왕자 형제들은 런던탑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1674년 나무상자 안에서 이들로 보이는 유해가 발견되어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또 리처드에게 척추측만증이 있었다는 것이 유골을 통해 확인되었지만 꼽추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문헌에도 한쪽 어깨가 올라가 있다고 묘사된 적은 있지만 꼽추였다고 기록된 사실은 없다. 또한 말을 타고 용맹하게 전장을 누볐던 리처드가 꼽추라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발굴에 참여했던 레스터 대학의 린 폭스 홀 교수는 “유골의 발굴을 계기로 우리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평가해야 될지도 모른다”며 그에게 낙인 찍혔던 부정적 이미지들이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레스터시는 내년 8월까지 레스터의 세인트 마틴 성당 등에 유골을 안장하겠다고 정부에 신청했고 법무부는 결정권이 레스터시에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유해의 연고지를 주장하는 요크시에서는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리처드를 적지였던 랑카스터 지역에 매장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요크인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사자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요크의 학생들은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여왕에게 청원했지만 왕실은 민감한 사안에 개입하기를 꺼리고 있다. 두 도시들이 명분으로는 지역 정서를 내세우고 있지만, 리처드 3세가 가져다 줄 관광효과도 포기하기 어려운 매력이라 안장지를 놓고 현대판 장미전이 재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또한 1200년대에 건설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1760년까지 500년 동안 왕의 유해를 안장해왔던 전통에 따라 리처드 왕의 유해도 이 곳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성공회 측은 리처드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한편 아직도 건재한 리처드 3세 협회와 같은 일단의 지지자들은 이번 발굴을 계기로 명예회복을 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한 리처드 3세 논란을 계기로 스코틀란드에서는 세익스피어에 의해 맥베드도 충분한 근거 없이 악인으로 묘사되었다며 명예회복을 시켜줘야 할 것이라고 거들고 있다. 자존심과 이해관계가 걸린 논란인지 노이지 마케팅인지 현재로선 분간하기 어렵지만, 논란이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런던타임즈 www.londonim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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