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 과연 그녀는 위대한 총리였나?

김지호 | 입력 : 2013/05/06 [12:19]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총리로는 별 이견 없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윈스톤 처칠이 지목된다. 그 이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총리는 지난 4월 작고한 마가렛 대처일 것이다.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과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11년간 집권한 20세기 최장수 총리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그녀가 영국 정계의 거목이었음 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캐머런 영국 총리는 “위대한 총리, 위대한 리더,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며 고인을 애도했다. 그는 또 “그녀는 우리나라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구했다. 평화시기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녀가 위대한 수상이었다는 평가에는 영국민의 절반 정도만이 동의할 뿐이다. 그만큼 그녀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양분되어 있다.
대처는 지나친 복지정책에 의존한 근로의욕 감소로 영국병으로까지 불리던 고비용 저효율의 70년대 영국 사회를 시장경제라는 메스로 과감하게 수술해 치유했다는 평가에는 정적들도 동의한다. 그녀는 끊이지 않던 노동쟁의를 무관용의 원칙으로 일관하며 악순환을 끊어냈다. 20만에 달하는 석탄노조의 대규모 파업을 1년여 대치 끝에 아서왕으로까지 불리던 아서 스카길 전국 광부노조 위원장의 굴복을 받아냈다.


그녀가 위대한 리더였다는 찬사는 그 무엇보다도 포클랜드 승전이라는 치적에서 기인한다. 1만 3천 킬로나 떨어진 섬에 대한 전쟁 회의론과 미국을 위시한 주변국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속한 전쟁 결단으로 섬을 성공적으로 탈환했다. 국장은 아니었지만 처칠 이후 처음으로 여왕이 참석하고 국장에 준해 치러진 대처 장례식의 컨셉트는 철저히 포클랜드 승전기념이었다. 운구를 맡은 10명은 포클랜드 공수부대, 공군, 해병대의 참전용사들이었고 군악대를 비롯하여 700명의 정규군이 동원됐다. 장례식의 코드명 ‘트루 블루’는 그녀가 푸른색 옷을 주로 입었던 데서 따왔다는 설명이지만, 보수당의 색과 바다가 모두 블루 라는 사실은 숨은 메시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재정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시행해 온 정부가 장례식 비용으로 1,000만 파운드(약 170억 원)나 지출하는 것에 대해서 영국인들의 60%가 반대한 것으로 ‘선데이 미러’의 여론 조사에 나타났다. 이는 묘하게도 여론 조사에서 역대 총리 중 영국을 가장 분열시킨 인물로 대처를 꼽은 비율도 60%로 나타났다. 또 ‘평화시기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라는 캐머런 총리의 찬사에도 절반이상이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신봉했던 그녀가 구조조정 및 민영화를 밀어 붙이면서 따른 대량실업을 양산했고 남부의 금융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하면서 제조업이 붕괴되고 북부의 산업 도시들이 피폐해지는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반대자들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딩동! 마녀가 죽었다!”는 노래를 영국 음원 순위 2위까지 올리면서 대처의 죽음을 자축했다. 이들은 장례식 날 등돌리기를 하며 ‘그녀는 부자들을 위해 죽었고, 빈자들을 죽였다’며 시위를 했다. 아직까지 그녀만큼 살아서도 죽어서도 극명하게 양분된 논란을 일으키는 영국 정치인은 아직 없었다. 

노력한 만큼 운도 따랐던 입지전적인 인물

영국 중부지방의 그랜섬에서 채소가게 주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남작부인의 신분으로 왕립 첼시 안식원에 먼저 간 남편 데니스 대처경의 옆에 묻혔다. 이 모든 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룬 그녀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채소가게를 운영했지만 시의원과 시장을 했던 아버지로부터 ‘개인의 운명은 자신의 노력으로 결정된다’는 철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노력한 만큼 운도 따랐다. 그녀가 평민,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보수당의 당수를 거쳐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 또 비타협적인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나 연임을 하며 11년간을 집권한 것은 본인의 노력 외에도 시대적인 요구와 정치 운이 잘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보여진다.
70년대의 영국은 73년 석유파동 이후 76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후, 20%대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며 실업자가 160만 명에 달했고 만성적인 노사분규로 생산성은 극도로 악화됐다. 탈출구를 찾지 못해 절망감에 빠져 있던 영국인들은 변화를 고대하고 있었고 집권 보수당은 74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실패했다. 집권 초부터 10년 동안 자신을 주택장관, 재무장관, 교육장관으로 발탁하며 키워준 히스 당수에게 75년 보수당 당권경쟁에서 도전장을 내밀 때까지 누구도 앞으로 그녀가 영국사회에 일으킬 돌풍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는 1라운드 투표에서 히스 당수를 눌렀고 2라운드에서 경쟁자를 물리치고 거대 정당의 첫 여성당수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는 소련의 억압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소련의 신문은 ‘철의 장막’이라는 비난을 빗대어 그녀를 ‘철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고, 이는 그녀 자신도 싫어하지 않는 별명이 되었다.
78년 말부터 79년 초까지 겨울에 벌어진 ‘불만의 겨울’로 불리는 노동소요로 집권 노동당의 지지율이 급락했다. 보수당을 이끌던 대처는 79년 3월 노동당의 캘러한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고, 311대310 단 한 표 차이로 불신임안이 통과되었다. 이후 총리가 된 대처는 강경일변도의 개혁정책을 밀어 붙였으나 경제지표는 크게 개선되지 않으면서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해고로 실업자들이 증가하면서 81년 말에는 지지율이 25%까지 추락했다. 그러나 82년 포클랜드 승전으로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1983년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연임에 성공했다. 1987년 총선에서도 수년간 지속된 내부 분열로 안정을 찾지 못한 노동당을 손쉽게 누르고 유례없이 3차 연임에 성공했다.
이후 강경일변도로 치닫던 그녀가 인두세라고 비난을 받는 주민세(Poll Tax)를 강행하면서 전국적인 조세저항이 일었고 폭동사태로 발전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신임했던 동료의원들의 반란으로 당권 사수에 실패했고, 90년 3월 총리직을 중도 사퇴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관저를 떠났다.


1995년 남편인 데니스 대처가 세습 가능한 남작에 봉해지면서 그녀는 남작부인이 되었다. 작위의 명목상 배경은 미스터 대처의 2차대전 참전 공로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녀가 없었다면 영국의 모습은 현재와 많이 달랐을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분분하다. 지지자들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영국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대자들은 오히려 비타협적으로 밀어 붙인 해악을 지적한다. 노동당의 캔 리빙스턴 전 런던시장은 “금융위기, 제조업의 붕괴 등 오늘날 영국사회가 당면한 모든 문제에 대처는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총리가 아니었다고 해도 산업구조 재편,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대처는 그 것을 읽어내고 기회로 삼을 줄 알았던 능력이 초반에는, 적어도 포클랜드 승전에 도취 되기 전 까지는,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혼란스러운 위기에는 비타협적인 리더십으로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지지 층을 결속시킨 드문 정치인이기도 하다. “나는 계속 싸운다, 이기기 위해 싸운다”고 말했던 그녀는 “대안은 없다”를 되풀이하며 자신의 소신과 고집을 관철시켜 나갔으나, 그 끝은 결코 명예롭지 못했다.
이후 한동안은 세간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그녀가 죽음을 통해 또 다시 위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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