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하라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칠레 민중을 위해 노래를 불렀던 아름다운 전사
굴렁쇠 | 입력 : 2008/10/12 [08:21]
▶ 빅토르 하라는 라틴 아메리카 노래운동의 상징인 누에바 깐시온 운동을 벌이다가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처형된 칠레를 대표하는 민중가     © 굴렁쇠


칠레의 혁명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펜이 총이었다면,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대를 살다가 같은 시기에 작고한 빅토르 하라에게는 기타가 총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제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심장을 겨눈 총알이 있었다.
 
시 그리고 노래. 네루다는 민중 속으로 시를 들고 갔고, 하라는 민중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국과 민중을 뜨겁게 사랑했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칠레 군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의 소용돌이에 갇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네루다와는 달리 세월이 흘렀어도 빅토르 하라의 죽음에서 그 아픔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도 아니고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
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어
의미를 지닌 노래는 고동치는 핏줄 속에 흐르지
참다운 진실을 노래하면서 죽어갈 자의 혈관 속에서
내 노래에는 덧없는 칭찬이나
국제적인 명성이 필요 없다네
내 노래는 한 마리 종달새의 노래
이 땅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지"

 
- 빅토르 하라의 노래 선언 부분

빅토르 하라(victor jara)는 라틴 아메리카 노래운동의 상징인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 운동을 벌이다가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처형된 칠레를 대표하는 민중가수다. 1932년 산티아고의 변두리 로꾸엔이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칠레 민중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노래와 연극으로 달래준 문화전사였다.
 
그는 한때 산티아고대학에서 연기와 연출을 공부한 전공을 살려 칠레에서 뿐만 아니라 남미와 유럽을 순회하며 연극활동에 심취하기도 했다. 토속민의 혈통을 이어받은 어머니로부터 칠레 구전 민요를 들으며 자란 그는 시와 노래와 연극을 사랑하던 청년이었다. 스무살이 되던 해에는 사라져가는 칠레의 전통민요를 조사하고 채집하면서 포클로레(forklore, 안데스의 민속음악)의 뿌리찾기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빅토르 하라의 민요채보여행은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전통문화와 고난에 찬 생활상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일찌감치 사회모순에 눈을 뜨게 했다. 그런 그에게 누에바 깐시온의 선구자 비올레따 빠라와의 만남은 그의 신념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안데스 민속음악을 복원하고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집단 작업을 거치면서 동시에 핍박받는 민중들의 삶 속에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좌절과 저항을 노래하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칠레 정치에 주목하게 된 것도 칠레 민중들을 궁지에 내몬 궁핍한 시대의 징후를 읽었기 때문이다.
 
1966년 첫 솔로음반을 내고, 문예비평과 연극, 음악활동을 폭넓게 벌여 나가던 빅토르 하라는 1969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개최된 제1회 누에바 깐시온 페스티벌에서 그의 유명한 자작곡 농부의 기도(la plegara a un laborador)를 불러 우승하게 된다.
 
▶ 칠레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     © 굴렁쇠 ◀
이 노래로 그는 조국 칠레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고난 받는 민중의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신앙의 힘과 연대의식을 일깨운 영혼의 노래였다. 예술가가 왜 게릴라만큼 위험한 혁명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그는 이 노래로 보여 주었다.
 
빅토르 하라는 그뒤 몸담았던 산티아고대학의 연극연구소 일을 그만두고 비올레따 빠라, 잉띠 일리마미, 낄라빠윤 등 민중가수들과 함께 인민연합 문화선전대 활동에 뛰어 들었다.
 
그들은 전국을 돌며 민중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을 벌였고, 가는 곳 마다 민중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1950년대 후반부터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싹튼 뒤 그 범위가 넓어져 카리브해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된 민족문화운동이었다.
 
시작 초기에는 전통민속문화에 대한 연구와 채집, 보급이 중심이었다. 칠레에서는 파블로 네루다의 권유로 비올레따 빠라에 의해 시작됐다. 이런 노력은 점차 자신들의 문화가 단순히 스페인 등 유럽에서 이식되어 온 것이 아니라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300여년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잉카조상의 후예 인디오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각성으로 이어졌다.
 
칠레 민중들의 정체성을 찾아낸 것이다. 민중들에게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 이 운동이 써내려간 노랫말과 인디오의 선율들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수백년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970년대에는 이미 라틴 아메리카 민족운동의 큰 줄기로 자리 잡았다. 가난한 민중들을 억압하는 제도, 집단, 계급, 문화를 추방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독재정권과 지배자들의 기반을 허무는데 큰 몫을 했다. 정치에서 종속을 거부하고, 경제에서 착취를 반대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에서 정체불명의 제국주의 문화 침투를 배격하는 문화예 인들의 이러한 저항운동에는 당연히 혹독한 탄압과 희생이 뒤따랐다.
 
누에바 깐시온은 칠레의 음악, 라틴 아메리카만의 음악이 아닌 세계의 음악으로서, 제3세계를 포함한 전 세계 민중이 인종과 종교, 가치와 신념을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음악 언어로 재정의할 수 있다. 아따우알빠 유빵끼를 누에바 깐시온의 아버지라 한다면 비올레따 빠라는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빅토르 하라는 바로 비올레따 빠라의 사상, 이념, 노래운동의 진정한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아만다, 너를 기억해(te recuerdo amanda)라는 노래에서도 그 사실이 틀리지 않았음을 잘 말해준다. 빅토르 하라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노동자들의 피끓는 분노와 좌절, 고통과 슬픔을 가슴이 저미도록 아프게 노래했다. 노랫말과 선율에 담겨진 서정성과 사회현실에 대한 명징한 메시지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 누에바 깐시온의 명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칠레의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민중의 삶과 정치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촉매가 됐다.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 민중들은 진보정치에 대한 기대와 변혁을 열망했다. 그 중심에는 노래하는 전사 빅토르 하라가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의 승리를 위해 민중벽화운동, 민중발레단, 새노래운동 등의 활동을 하는 민중문화운동 세력을 모아 나갔다. 그는 또 대통령 후보인 아옌데를 지지하는 노래와 연극 공연을 잇달아 개최하면서 파시스트 군부와 극우파, 미국을 등에 업은 대지주·자본가계급 등 반민주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상대후보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1970년 9월 4일, 마침내 대선에서 아옌데는 민중의 뜨거운 지지를 받으며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과 칠레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세계 최초로 선거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정권을 탄생시키는 순간이었다.
 
동토의 왕국을 무너뜨린 자리에 찾아온 칠레의 봄. 그 봄의 주역 중 한 사람인 빅토르 하라는 아옌데 정권의 음악대사가 됐다. 누에바 깐시온의 지평도 크게 넓어졌고, 새노래 운동은 더욱 민중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1971년 말부터 빅토르 하라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순회하며 칠레 민중들이 겪었던 삶의 역사와 조국이 처해 있는 고난의 현실을 노래했다. 이 무렵 그가 부른 선언(manifiesto)은 칠레 민중은 물론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큰 울림이 됐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누에바 깐시온의 테마처럼 그의 노래는 파시스트의 폭력에 항거하는 무기가 됐다.
 
▶ 빅토르 하라, 그의 영혼은 칠레 민중의 가슴 속에 붉은 심장이 되어 그가 불렀던 노래와 함께 지금도 살아 있다.     © 굴렁쇠

 
아옌데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는 미국의 시장 교란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칠레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73년 3월 의회선거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은 과반수가 넘는 지지를 확보했다. 아옌데의 개혁은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개혁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9월 11일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려고 했던 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군부를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산티아고의 봄은 짧았다. 1844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1932년 이후로 여러 차례 쿠데타를 겪으면서 정치 혼란과 경제 불황에 시달려 왔던 칠레.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최초로 민주주의 선거에 의해 사회주의 정권을 탄생시켰던 그 칠레가 다시 암흑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쿠데타 당일 3군총사령관 피노체트는 2대의 전투기로 대통령궁을 폭격했다. 당시 상황을 그린 영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는 쿠데타군의 작전 암호를 타이틀로 삼은 것이다. 아옌데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모네다 대통령궁에 남아 쿠데타군에 맞서 의연히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다. 모네다궁이 포위되기 직전 아옌데 대통령은 비장한 각오로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대국민 방송연설을 남겼다.
 
"누군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쿠데타 1주일 동안 아옌데 대통령을 포함해 3만여명의 칠레 민중이 대량학살됐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찰국가답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미국 cia는 칠레 비밀경찰과 손잡고 양심을 지키는 지식인들을 암살하기까지 했다. 쿠데타 이후 아옌데 정권에 협력했거나 인민연합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국외 강제추방, 구금, 고문, 사형집행 등 가혹한 탄압이 자행됐다.
 
아옌데 대통령의 지지와 지원이라는 엔진을 달고 민중 속으로, 나라 밖으로 확산되던 누에바 깐시온 운동도 혹독한 시련을 맞았다. 노래운동에 참여한 음악인들은 대부분 추방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피노체트 집권 기간동안 사망자 3,200여명, 실종 1,200여명, 고문 피해자 10만명, 국외추방 100만명에 이른다. 17년 피의 독재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이렇게 서막을 알리며 칠레 역사를 20년 거꾸로 돌려놓았다.)
 
빅토르 하라는 아옌데가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던 바로 그 무렵 체포되어 총살됐다. 1973년 9월 16일, 쿠데타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에스타디오 체육관에서 아옌데의 전사들과 함께 마흔 한 살의 짧은 생을 마쳤다. 누에바 깐시온의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을 실천해왔던 그의 손목은 부러져 있었다. 총을 빼앗고 총알을 빼앗은 피노체트 군부의 이 잔인한 선물로 칠레 인민연합과 함께 했던 그의 노래, 민중의 노래, 혁명의 노래는 끝난 것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1973년 9월 14일과 15일 집단 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도 빅토르 하라는 인민연합 찬가 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를 쉬지 않고 부르며 동지들을 다독거렸다. 서슬퍼런 군부의 총구 앞에서도 의연했고 흔들리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벼랑에 내몰린 칠레 민중을 위해 노래를 불렀던 아름다운 전사. 그의 영혼은 칠레 민중의 가슴 속에 붉은 심장이 되어 그가 불렀던 노래와 함께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지금도 살아 있다. Ø굴렁쇠
 
굴렁쇠 님의 한겨레 블로그 바로가기 ☞ http://blog.hani.co.kr/rufdml/

원본 기사 보기:신문고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