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 먹고 살기위한 처절한 투쟁?

<뉴욕칼럼> 금메달보다 더 바람직한 것
채수경 | 입력 : 2010/02/19 [22:38]
어느 동네에 가서 스포츠를 보면 그 동네 사람들의 삶의 질이 보인다. 이곳 미국서도 대도시 변두리 흑인 빈민촌에서는 좁은 공간에서 공 하나로 여럿이 즐기는 농구가 인기를 끄는 반면 교외의 백인 부촌에서는 넓은 잔디밭에서 글러브와 배트 등 각종 장비를 필요로 하는 야구를 즐기는 것을 본다.
아이스 링크와 스케이트 등 비싼 장비가 필수적인 아이스하키의 경우 흑인선수가 거의 없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고 하겠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의 한국서도 맨몸으로 즐기는 권투나 태권도 등이 인기를 끌었던 가운데 동네 꼬맹이들 또한 바람 빠진 축구공 하나로 수 십 명이 즐겼었다.
 
스포츠(sports)는 ‘놀다’ ‘즐기다’라는 의미의 ‘disport’의 줄임말, ‘disport’의 뿌리는 ‘-로부터’를 뜻하는 접두사 ‘dis-’와 ‘옮기다’라는 의미의 ‘porter’가 붙은 중세 프랑스어 ‘disporter’, 먹고사는 일로부터 분리하여 즐기는 것을 말한다. ‘disporter’의 어원 역시 ‘저쪽으로 옮기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deporatare’다.
먹고사는 일로부터 떨어져 놀고 즐기려면 그 만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먹 하나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헝그리 복서’ 김득구는 1982년 11월 14일 라스베이거스 특설링에서 wba 라이트급 챔피언 레이 맨시니에게 14회 ko 패를 당한 뒤 의식을 잃고 뇌수술을 받았으나 4일 후 사망했고, 미 lpga에서 인생을 역전시킨 박세리가 무명시절 담력을 기르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연습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제2의 박세리를 꿈꾸는 후배들이 밤중에 공동묘지에 가서 연습하고 있는 것도 스포츠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국가 기강 운운할 때마다 정권 차원의 골프 금지령이 내려지는 가운데 얼마 전 김준규 검찰총장 인준 청문회에서 요트와 승마가 문제가 됐던 것도 한국의 스포츠가 아직도 ‘놀고 즐기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보면 틀림이 없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세계무대에서는 무명이었던 모태범이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여자 500m에서도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따내자 세계가 놀란 것 같다. ap 통신은 “지금까지 한국은 동계 올림픽에서 쇼트트랙 이외의 종목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으나 이번 대회에서는 모태범과 이상화가 500m 스피드 스케이팅을 싹쓸이(sweep)했다”고 타전했고 월스트리 저널 또한 “한국의 스피드 스케이팅은 한마디로 서프라이즈”였다면서 “이상화의 레이스는 놀라운 이변(surprise upset)의 연속이었다”고 보도했다.
한국인들 또한 감격하여 “밴쿠버 동계 올림픽의 한류” “당차고 겁 없는 대한민국 신세대” “선진국형 스포츠의 복덩이가 된 올림픽 베이비들” 등 각종 자아자찬을 쏟아내고 있지만 여름이면 바람 빠진 공을 차고 겨울이면 중랑천 구정물 얼음판 위에서 썰매 타던 세대의 눈에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의 질이 그만큼 윤택해졌다는 반증으로도 보인다. 실제로 놀고 즐기면서 배운 스포츠로 떼돈을 버는 ‘스포츠 재벌’들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동네 라면가게 주인들 또한 주말이면 가게 문 닫고 골프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 금메달을 딴 이상화의 부모가 전지훈련 비용 마련을 위해 빚을 내고 이상화가 밴쿠버로 떠나기 전 거실 달력에 ‘인생역전’이라고 쓴데서 보듯 아직도 헝그리 스포츠 정신이 말끔히 지워진 것 같지는 않지만.
 
흔히 스포츠를 중요성을 강조할 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을 끌어다대지만 그 격언의 원전인 고대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의 발언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면 바람직할 것(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이었다고 전해진다. 지지리도 못살던 나라 한국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선진국형 스포츠 잔치인 동계 올림픽에서 무더기로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 품위까지 보태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채수경 / 뉴욕거주>

원본 기사 보기:worldanew.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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