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寺奴) 걸승(乞升)이 지킨 낙산사의 유물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 입력 : 2008/02/11 [16:42]
▲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 박물관뉴스
[명사칼럼]
야만의 침략자 앞에서 목숨 걸고 낙산사의 문화유산을 지켰던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낙산사 법당에는 옥으로 조성한 관음상과 함께 의상이 전했다는 수정염주(水精念珠)와 여의보주(如意寶珠)가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남아오고 있었다. 염주는 관음보살이, 그리고 여의주는 용이 각각 의상에게 주었다는 설화와 함께.

의상은 문무왕 10년(670)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했고, 그 뒤 어느 해에 양양 동해변 오봉산을 찾았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함이었다.
 
굴 앞의 50보 쯤 되는 바다 속에 하나의 돌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했고, 수면에 잠겼다가 나타났다가 했다. 그 위에 자리를 편 의상은 정성을 다해 예배하며 관음보살의 친견을 원했다.
 
정성으로 기도하기 2주, 그래도 감응이 없자 그는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 때 동해용이 그를 붙들어 다시 돌 위에 올려놓았다. 관음보살은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말했다. “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다.
 
거기에 불전을 짓고 상(像)을 봉안하라.” 동해용도 여의보주와 옥을 주었다. 이에 의상은 낙산사를 세워 용이 준 옥으로 불상을 조성하고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법당에 함께 모셔두었다.

창건 당시부터 전해온다던 수정염주와 여의주와 관음상은 이 절의 보배 중의 보배였던 것이다.
 
몽고의 침략이 심해진 1253년(고종 40) 경에는 두 보물을 양주성으로 옮겨서 보관했다.
 
그런데 이 성까지도 함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낙산사의 주지 아행(阿行)이 두 보물을 가지고 도망하려 하였다. 절의 종 걸승(乞升)이 이를 빼앗아 깊이 땅에 묻으면서 맹서했다. “만일 내가 이 병란에 죽게 된다면 두 보배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는 없게 될 것이지만, 내가 만일 살아남는다면 이것을 나라에 바칠 것이다.”
 
1254년 10월 22일 성은 함락됐지만 다행이 죽음을 면한 걸승은 적병이 물러가자 이를 파내어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쳐서 창고에 보관했다.
 
그러나 명주성 마저 위험에 빠지게 된 1258년 10월에 대선사 각유(覺猷)는 이를 궁중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국왕은 이를 허락하고 군사 10명을 파견하여 걸승과 함께 두 보배를 궁중으로 옮겨서 보관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6백년을 전해오던 두 보물은 참화를 면했지만, 미처 옮기지 못했던 낙산사의 관음상(觀音像)은 몽고병의 약탈을 당했다. 
 
그들은 관음상을 부수고 그 복장 속에 있던 보물을 꺼내 갔던 것이다. 걸승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낙산사의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도 20년 뒤에는 원나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원의 황후는 일찍부터 낙산사의 관음여의주를 구해 보기를 원했다고 한다.
 
원종 14년(1273) 3월에 원의 사신 마봉(馬絳)이 귀국할 때, 대장군 송분(宋玢)이 수행했는데, 이 때 송분에게 그것을 헌납케 했다는 것이고, 이 사실은 고려사에 전한다. 원나라로부터 온갖 간섭을 받아야 만 했던 불운의 시절이었기에 문화유산도 지켜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조상의 문화유산을 땅 속에 파묻으면서까지 후세에 전하여 했던 걸승의 그 간절한 염원은 야만 몽고족의 말발굽에 무참히 짓밟혀버린 민족의 자존심과 난파의 현실, 그 슬픔을 삼키며 민족 과거의 역사를 삼국유사 속에 수록하여 후세에 전한 일연(一然)에게 계승되었고, 삼국유사를 바위 굴 속에 감추어 전함으로서 병화에도 보전될 수 있게 했던 승려들이 있었기에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우리가 이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불길에 휩싸인 낙산사를 보며 안타까워하던 기억이 채 잊혀 지기도 전에 어제 밤에는 남대문이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니, 마음 한 구석이 휑하다. 그러나 사제를 털어서 유물을 구하고, 박물관을 지어서 이를 보존하는 이들이 있는 한 우리의 문화유산은 지켜질 것이라고 다시 믿는다.  /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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