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주간지 사건의 내막에서는 <中東 대탐험> 아랍의 어제와 오늘!’의 제하 하에 독자들의 비상한 주목과 열띤 호응 속에 인기리에 절찬 연재된 바 있다.(총60회)
‘수메르에서 페르시아까지’ 연원장구 BC 4세기까지 ‘고대사 전성기’ 주역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 중심으로 흥망성쇠 비옥한 토지 ‘전략적 요충지’ 도시국가로 교역활발 함무라비왕 ‘아카드어 오리엔트 공통어로’ 역할지대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에 마지막 ‘페르시아 종말’ 나일강 유역에서 번성한 이집트 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황허강 유역의 황허 문명 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은 비옥한 반월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주가를 올린 고대문명을 일컫는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다른 문명의 근간이 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셈족(Sem族)에 속하는 아카드인(Akkad), 아무르인(Amorites, 고대의 서(西)셈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아카드어로 아무루, 수메르어로는 마르투이다. 성경에서는 아모리 족속으로 명기), 아시리아인(Assyria), 칼데아인(Chaldea) 등과 인도-유럽 인종에 속하는 히타이트인(Hittite, 소아시아 시리아 북부를 무대로 하여 BC 2000년대에 활약했던 인도 유럽계 민족), 카사이트인(Kassites, 아카드어로는 카슈인), 메디아(Media, 기원전 8세기에 이란 고원의 북서부에 세운 왕국. 기원전 612년에 신바빌로니아와 동맹하여 아시리아를 멸망시키면서 크게 번성하였으나, 기원전 550년에 페르시아에게 멸망), 페르시아인, 수메르인(Sumer), 엘람인(Elam, 수도는 수사 ‘Susa’로 티그리스강 동쪽 자그로스 산맥 일대인 이란 고원에 위치) 등이 맹활약하였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원초는 수메르 지역에서 발전한 수메르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수메르의 문명과 신앙은 페니키아(Phoenicia)에 영향을 주었고, 페니키아는 크레타(Creta)에, 크레타는 그리스와 로마에 손길을 뻗치게 된다.
◇ 그리스에서 유래 ‘메소포타미아’ 강들의 사이(현재 이라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아나톨리아 (Anatolia,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터키의 넓은 고원 지대)에서 발원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문명의 원초 되는 ‘메소포타미아’는 고대 그리스어(Μεσοποταμα)에서 온 말로서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래로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적 명칭으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북서로 뻗어나가 바로 바그다드(현재 이라크의 수도)북쪽까지의 지역에 위치하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유역을 아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변지역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지대하다 하겠다. 특히 세계 고대사에서 종교와 정치사상의 태반이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사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이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고대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폐쇄적 이집트 문명과는 무척 상이한 개방적 지리적 요건 때문에 여러 도시 국가가 출현하고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상시 이민족의 침입이 빈번하여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다.
◇ 수메르에서 舊바빌론까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류문명의 토대가 된 수메르문명이 중핵을 이루었으며, 아카드·아무르 인들의 문명이 가미되었다. 수메르 문명 다음에는 바빌론이 탄생했고, 바빌론은 아시리아에, 아시리아는 신(新)바빌론에게, 신바빌론은 페르시아에, 페르시아는 마케도니아(Macedonia)에 멸망당함으로써 대서사시적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들 왕조의 변천사의 연대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수메르 왕조(기원전 4000~기원전 2000) △구(舊)바빌로니아(기원전 2000~기원전 1000) △ 아시리아(기원전 1000~기원전 612년경) △ 신(新)바빌로니아(기원전 612~기원전 538) △ 페르시아(기원전 550~기원후 651) ▼ 수메르(Sumer) 시대 /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에는 수메르라 일컫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북부에는 아카드(Akkad)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결국 이 두 지역은 앞으로 인류사에 바빌로니아 왕국이라고 불려질 한 집단아래 하나로 통일되었다.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는 금속과 돌을 함께 사용하는 문명이 ‘알 루바이드(Al Ubaid)’ ‘우르크(Uruk)’ 등과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높은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다. 이곳 남부에 수메르인들이 나타난 것은 BC 3500년경이다. 수메르 남부 도시 국가는 말기가 되면서 ‘라가슈(Lagash)’ ‘움마(Umma)’ ‘우루크’ 등이 서로 패권을 잡으려고 유혈이 멈출 날이 없었다. 이와 연관 수메르 문명의 또 하나의 축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에 거주했던 유목민으로 셈족인 아카드(Akkad)인이다. BC 2350년경 셈계(系) 아카드 왕조의 초대왕 사르곤 대왕(Sargon, BC 2371-2316) 1세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남부로 진격해 남부 수메르 인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여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첫 아카드 통일제국을 수립하였으나 오래 지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약 180년 동안 계속된 아카드 시대에 수메르인과 아카드인 두 종족이 융합함으로써 수메르 문명은 점차 바빌로니아(Babylonia) 문명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이에 아카드 시대 말기에는 혼란상태가 계속되었으며, 이어 구티인(Gutians, 카프카스 계에 속하는 특이한 민족)의 왕조가 100여 년 계속하게 된다. 잠시 수메르인은 BC 2100년경 우르(Ur) 제3왕조 때에 번영을 회복하였으나 엘람인의 침공에 의해 5대 109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어 BC 2000년대 전반(前半)에는 인도-유럽 어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 이동이 오리엔트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산 속의 민족이라 불리던 히타이트, 푸루리, 카사이트인 등의 침입이 성행했다. 이후 BC 19세기 초 바빌로니아인(Babylon)이 이들 지역을 한 제국으로 전격 통합시키게 된다.
▼ 舊 바빌론(BC 1800) 아무르(Amorites) 시대 / 바빌로니아인이라 불리우는 아무르人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여 이 지역을 통일하면서 바빌론에 도읍지를 정하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 중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은 바빌론 제국의 최전성기인 제1왕조 제6대 왕으로 대법전을 편찬한 ‘함무라비(Hammurabi, BC 1792∼1750) 왕’이다. 함무라비는 ‘이신(Ishan)’ ‘라르사(Larsa)’ ‘마리(現 탈알하리리)’ 등을 정복하고,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함무라비왕의 치적 중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카드어의 보급으로, 이때부터 아카드어는 오리엔트 세계의 공통어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셈계 종족에 의한 바빌로니아 세계가 태동하였고, 바빌론은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다. 세계사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바빌로니아를 구분한다. 하나는 기원전 1830년부터 1531년까지 3세기 동안 존속한 바빌론 제 1왕조인 구(舊)바빌로니아와 그 뒤 천년 후에 동일지역에서 1세기를 못 넘긴(BC 605-538)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신(新)바빌로니아이다. BC 1530년경에 오리엔트 최초의 철기 사용자인 히타이트인의 침입으로 바빌론 제1왕조는 멸망하였으며 그 후 약 1000년 동안 메소포타미아에는 이민족이 꼬리를 물고 침입하여 분립 ·항쟁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함무라비의 뒤를 이은 왕조시대에는, 자그로스산맥(지금의 루리스탄지방)이 본거지인 카시트인(아카드어로는 카슈인)이 바빌로니아에 침공하여 그 후 약 150년 동안 평화적 이주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BC 1530년 무렵, 히타이트왕 무르실리슈 1세가 인솔하는 군대가 수도 바빌론을 약탈하자,빈사상태에 있던 왕조를 카사이트인이 급습하여, 이를 무너뜨리고 카시트왕조(BC 1530∼BC 1150)를 건립하였다. 빈사 상태에 빠진 왕조는 BC 1150년 무렵, 수사(Susa)를 도읍으로 하는 엘람왕국의 ‘슈루크나훈테’에 의해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 아시리아에서 페르시아까지 ▼ 아시리아(Assyria) 시대 / 그 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다가 BC 667년경 아슈르시(市)를 중심으로 철제의 무기를 가진 강력한 군사적 국가로 발전한 아시리아에 의해 통일되었다. BC 2300년경부터 존재했으며, 성경에 앗수르(창세기 10장 22절)로 나오는 도시국가인 아시리아(Assyria)! 원래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원 전 18세기부터 왕국을 형성한아시리아의 조상은 구약성경에서 ‘노아의 아들 셈의 한 아들인 앗수르(Asshur)’이다. 대부분이 셈족인 이들 민족은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했으며, 니네베(니느웨) 성을 중심으로 거주했다. 아시리아는 BC 15∼14세기에는 이집트 접경까지 정복하고, BC 12세기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가 히타이트의 쇠퇴를 틈타 지중 해안에서 소아시아까지 판도를 대폭 확장시킨 민족이었다. BC 8세기의 사르곤 2세(BC 722∼BC 705), 아슈르바니팔(BC 668∼BC 628) 등 과감하고 용맹한 왕들에 의해 번영의 최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오리엔트의 일체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BC 612년 아시리아는 메디아(Media)에게 멸망된다.
▼ 新바빌론 (BC 612년) 시대 / 앞서 약술한 바빌론 제1왕조가 망한 뒤에도 바빌론은 계속 고대 세계의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다가 아시리아 제국 당시에는 봉신(封臣)왕국이 되었다. 이윽고 기원전 626년에 이르러 구(舊)바빌론의 승계자임을 자처한 칼데아의 봉신왕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재위 BC 625∼BC 605)’는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아시리아와 전쟁에 착수했으며, 결국에는 메디아와 동맹을 맺는 한편, 스키디아(Scythians)의 지원을 얻어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를 함락시킨다. 기원전 605년에는 칼케미슈에서 이집트 대군과 아시리아 잔군의 연합 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명실 공히 근동(近東)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며, 같은 해 서거한 부왕 나보폴라사르을 승계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는 느부갓넷살 왕, 재위 BC 605∼BC 562)는 이집트군을 아시아로부터 추방하고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까지도 지배하였다. 바야흐로 대제국 신(新)바빌로니아의 찬란한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포로‘는 이 때였다. BC 586년에 이스라엘의 남 유다는 바빌론에 점령당하고 포로로 끌려간다. 바로 이 신바빌로니아가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의 주요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빌론을 정비하여 지구라트를 재건하였는데, ‘바벨탑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신관(神官) 계급의 내분으로 칼데아의 바빌론 번영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87년만인 BC 538년 신흥세력인 페르시아에 멸망되었다. 이로써 2500년이라는 장기간 서남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찬란한 영광은 뒷전으로 하여 문화의 중심은 이란고원으로 이동된다. ▼ 페르시아(BC 539~331년) 시대 / 페르시아(성경은 바사)는 키루스(성경은 고레스) 왕 때 기원전 549년 병합한 메디아(성경은 메대, 현재의 터키)와 연합군을 이루어 BC 539년에 바빌론을 정복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메디아를 침략한 리디아(Lydia,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소아시아 서부 지방에서 번성하였던 왕국)에 대해 메디아 왕의 후계자로서 응전하여 기원전 546년경에 리디아를 멸망시켰다. 페르시아인은 BC 1000년부터 러시아 남부로부터 이란 지역으로 이동한 유목민으로 페르시아만 동쪽에 정착했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 민족이 이란 남부의 페르시스(Persis : 현재의 파르스) 지방에 정착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발흥했다고 하여 고대 그리스 등 서방세계에서 부르던 명칭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아리아인의 땅이라는 뜻인 이란으로 불러주기를 바랬다. 이란이라는 명칭이 예시하듯, 본디 인도 아리아계 민족으로서 인종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와 같은 타민족과는 차이점이 있었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인 같은 유럽인들과 가까웠다. 바빌론을 정복함으로써 키루스는 바빌로니아가 정복하였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역도 관할하게 되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여 자신들의 아버지라 칭송하였던 인격적인 군주였던 키루스 대왕! 그는 바빌론에 억류되어 있던 유대 민족을 본토로 귀환시켰으며 유대인들에게 바빌로니아가 파괴했던 예루살렘 성전도 복구하도록 성전 재건축 역사를 확약했다. 고레스왕의 허가 하에 유대인은 BC 538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된다. 소아시아 일대(에게 海 동쪽)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속국으로 복속시킨 키루스 대왕에 이어 키루스의 사후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 기원전 530~522년)에 의해 이집트까지 페르시아 제국에 복속되었다. 드디어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es 王朝)’로 불리는 페르시아 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그 후 다리우스(Darius, BC 521∼486) 1세 때에는 맹렬한 정복사업을 벌여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Thracia, 발칸반도 동부 일원에 걸쳐 있는 지방)를 정복했다. 이런 페르시아 제국이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은 기원전 5세기 말, 그리스 원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서부터이다. 일명 페르시아 전쟁(BC 492-479)으로 불리는 대(對) 그리스 전쟁은 동·서양이 대혈투를 벌인 최초의 전쟁이었다.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제국은 는 그리스를 통일한 대맹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BC 331년 공격에 처참하게 무너지면서 역사 속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페르시아 제국은 정복국가의 문화와 전통을 널리 존중하여 두루 흡수함으로써 다양하면서도 웅장한 문화를 심화시킨 공로자였다. 이 후로는 헬라 문화가 유입되고 회교 문화가 형성되어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특유의 색채를 상실하게 된다. 원본 기사 보기:jb-breaknews.com <저작권자 ⓒ London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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