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할 수 없는 문명의 충돌은 난세를 낳고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20세기 초 최대의 격전지가 되는 중국 요동(遼東 랴오둥)반도에 위치한 여순(旅順 뤼순 port arthur)은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
천혜의 아름다운 항구인 여순은 동방의 맹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해양으로 뻗으려는 러시아와 대륙으로 나아가려는 일본이 맞부딪히는 숙명의 혈전지가 되었다. 시베리아-만주 철도를 연결시키며 태평양함대를 정박시킬 부동항이 절실한 러시아와 대륙진출의 교두보가 시급한 일본에게 나라의 명운이 걸린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야음을 틈타 어뢰를 기습 발사하여 적진을 교란시킨 일본함대가 해뜨는 동쪽 수평선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제물포에서 비운의 러시아 함정 버략호와 카라에츠호가 격침되던 1904연 2월9일 새벽이었다.
이날 아침 러시아함 아스콜드 등에 하달되는 전문을 감청하고 러시아함대의 정박 사실을 확신한 도고제독은 전 함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후일 쓰시마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하는 도고제독은 이순신제독 넬슨제독과 더불어 세계 해전사에 기록되는 3대 명제독이다. 러시아 함대에 많은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민첩한 기동력과 우수한 화력을 갖춘 일본의 승리로 평가되고 있다.
여순은 1895년 청일전쟁 승전의 대가로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일본에 조차 되었으나 서방 강대국들의 중재로 중국에 반환되었다. 이후 러시아가 1898년 랴오둥 반도의 조차권을 받고 시베리아 만주 철도와 연결하였고 태평양 함대를 위해 요새화 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여순을 러시아가 부당하게 훔쳐간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되찾아야만 할 국가적 자존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후 러일 양측이 약 11개월 동안 지속된 20세기 최초의 대전투를 벌이며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여순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여순의 함락은 러시아의 몰락과 일본의 부상이라는 지축의 변동을 세상에 알린 신호탄이었다. 이후 일본은 전쟁경비를 위한 국채모집이 용이해 진 반면 러시아는 국제적 위신이 추락하였고 러시아 왕정의 붕괴로 이어지게 된다. 훗날 레닌은 여순의 패배는 차르 체제 몰락의 서막이라고 말한바 있다. 일본 육군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두 아들이 여순에서 전사하고 2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처참한 싸움 끝에 여순을 탈환하였다. 그는 장병들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를 용서하라, 모두 내 잘못이다"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의 자결을 청하였으나 천황으로 부터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자결하지 말라는 답을 들었다. 7년 후 천황이 사망하자 장례식 날 노기장군은 부인과 함께 할복 속죄하여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켰다.
함대도 기병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신생 대한제국의 장군은 총 한자루로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격동기를 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 비록 태어난 땅과 지향점은 달랐어도 조국을 위해 바쳤던 그들의 생애는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있다. < 김지호 런던타임즈 발행인 www.londontimes.tv > <저작권자 ⓒ London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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